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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삶의 무기가 된다면

by 배대웅

사람은 누구나 글을 쓴다. 현대인의 삶에 이것만큼 필수적인 행위도 없다. 직장인의 업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하루에도 수많은 메일, 보고서, 회의록, 기획서 등을 써야 한다. 학생의 공부도 마찬가지다. 강의 노트, 레포트, 시험 답안을 써서 성적을 올리고, 논문이 통과되어야 졸업한다. 주부도 예외는 아니다. 아이를 위해 쓰는 육아일기, 학교에 제출하는 가정통신문 회신, 학부모회 회의록, 심지어 가족여행 계획서도 글쓰기다. 자영업자는 다를까? 가게의 홍보글, 메뉴판의 소개글, 고객 리뷰의 답글을 써야 한다. 투자나 대출을 받으려면 사업계획서도 필요하다. 이처럼 현대인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글을 생산해 내야 하는 존재다.


사실 인류의 역사 자체가 글쓰기와 함께해 왔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는 국가 재정을 기록하는 회계의 도구였고,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는 법률과 행정의 근거였다. 글쓰기가 권력과 제도를 유지하는 장치였던 셈이다. 또한 중세 수도원의 필사 작업은 신앙인의 의무이자 지식을 보존하는 핵심 수단이었다. 수많은 수도사가 평생을 바쳐 고전을 옮긴 덕분에, 철학과 과학이 중세의 암흑을 건너 이어질 수 있었다. 15세기 인쇄술의 발명은 글쓰기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책과 신문, 우편과 출판 매체가 대량 보급되면서, 지식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을 넘어 사회 전체로 퍼졌다. 근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바로 그 지식 대중화의 산물이었다. 글쓰기가 사회 변동의 촉매가 된 것이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는 온라인 플랫폼과 소셜미디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글을 통한 사회적 소통이 전례 없는 범위와 규모로 활성화되었다. 전 세계의 누구나 손 안의 기기로 생각을 기록하고 전파할 수 있다. 트윗 한 줄이 정치적 사건을 촉발하고, 블로그의 한 문장이 대중의 소비 습관을 바꾼다.


이렇듯 문명과 기술은 계속 바뀌었지만, 그 변화의 지속성을 보장한 것은 언제나 ‘글’이라는 체계였다. 이는 기기와 장치가 교체되어도, 운영체제(OS)만큼은 변함없이 작동 원리를 제공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글쓰기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라고 했다. 즉, 글쓰기는 시대와 문명을 가로질러, 인간이 인간다움을 발현하는 보편성의 도구다.


글쓰기라는 경쟁력


이렇게 글쓰기는 예나 지금이나 불가피한 일이다. 글쓰기가 싫거나 자신이 없다고 안 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마지못해서 하는 것보다 능숙한 무기로 삼는 게 낫지 않을까? 『논어』에서도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고 했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아는 수준을 넘어서, 좋아하고 즐기는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글쓰기를 무기로 삼는 순간, 나를 둘러싼 삶의 지형도 달라진다. 일터에서 기회가 열리고, 관계에서 신뢰가 쌓이며, 혼자일 때조차 사유와 감정을 정리해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그래서 글쓰기는 삶을 바꾸는 가장 값싼 혁명이 될 수 있다.


글을 잘 쓰는 직장인은 일터에서 돋보인다. 명료한 문장은 곧 논리적 사고의 증거다. 간결하고 정확한 보고서는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돕고, 상사의 신뢰를 얻는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조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의사소통 실패”라고 지적했다. 그가 말한 실패의 대부분은 글의 부정확함에서 비롯된다. 반대로, 잘 쓴 보고서와 기획서는 조직의 판단력을 강화한다. 조직이 직면한 기회와 위기를 성찰하고, 현재 자원으로 가능한 혁신 전략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삼성경제연구소를 비롯한 ‘빅 3’ 연구소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산업을 넘어 국가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 곁에는 이런 글쓰기의 힘을 보여준 연설문 작가 테드 소렌슨이 있었다. 그가 쓴 명문장이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라” 이 한 줄의 문장이 새로운 시대를 맞는 미국인의 애국심을 일깨우고, 케네디가 제시한 뉴 프런티어의 비전을 각인시켰다.


자영업자의 글쓰기는 매출 영향을 미친다. 강렬하고 트렌디한 홍보 문구는 기업의 정체성을 재창조한다. 나이키는 1988년 “Just Do It”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브랜드로 도약했다. 그전까지는 스포츠 신발 시장에서 여러 기업과 경쟁하던 ‘원 오브 뎀’이었다. 그러나 이 슬로건이 나오고 10년 만에 매출이 10배 이상 폭증했고, 북미 시장의 43%를 점유하는 ‘스페셜 원’이 되었다. 단 세 개의 단어가 브랜드의 정체성을 바꾼 셈이다. 또한 스타벅스의 창업자 하워드 슐츠는 다른 커피숍과 달리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집과 직장에 이은 제3의 공간”이라는 서사를 강조했다. 그 ‘글’로 된 서사가 전 세계 수억 명의 고객을 끌어들이는 브랜드의 이미지가 되었다. 글 한 편이 고객의 신뢰를 얻고, 매출을 늘리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주부의 글쓰기는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가족의 기억을 남기는 근거가 된다. 가계부의 지출 내역에 하루의 소감을 덧붙이면, 소비 패턴은 물론 가족의 정서까지 기록된다. 나아가 쇼핑 목록이나 집안일 계획을 글로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생활의 우선순위가 명확해지고, 불필요한 낭비도 줄일 수 있다. 또한 아이의 성장을 일기로 기록해 두면, 추억의 저장은 물론 교육에 참고할 소중한 자료가 된다.


학생의 글쓰기는 배운 것을 이해하고 자기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이다. 과제물과 시험 답안을 논리적으로 잘 쓰는 학생은 성적이 좋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글쓰기 습관은 훗날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면 더 큰 자산이 된다. 연구자가 생산하는 논문이야말로 가장 고도화된 형태의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논문은 자료 해석, 논리 전개, 문장 형식 등을 엄격히 준수해야 하는 종합적인 글이다. 따라서 학생 시절부터 논리적 글쓰기 훈련을 한 사람은 연구자가 되어서도 좋은 성과를 낼 가능성이 크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그랬다. 그는 16살 때부터 편지 같은 일상적 글도 주장의 세밀한 근거와 논리의 전개 단계가 잘 드러나게 썼다. 이러한 습관이 불과 26세의 나이에 물리학의 역사를 바꾼 특수상대성 이론 논문을 쓴 단초가 된 것이다.


결국 글쓰기는 직업을 막론하고 ‘더 잘 사는 방법’과 직결된다. 말은 사라지지만 글은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설득하는 힘으로 이어진다. 소렌슨의 연설문, 슐츠의 서사,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그러했다. 글쓰기는 시대와 분야를 넘어 경쟁력을 결정짓는 무기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더 오래, 더 깊이 인정받는다.


글쓰기를 통한 자아실현


그러나 글쓰기를 무기로 삼는다는 말은 기능적 유용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깊은 차원, 즉 인간의 본능과 존엄에 뿌리내린 인문학적 행위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문자의 발명 훨씬 전부터 인류는 벽에 그림을 그려 자신을 드러냈다.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는 사냥의 기록이자, 자아를 세계 속에 각인하려는 본능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토록 오래전부터 인간은 자신을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본질은 오늘날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유튜브, 블로그, SNS가 큰 인기를 끄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싶어서다. 물론 많은 매체가 화려한 영상을 앞세운다. 하지만 성공적인 영상 뒤에는 언제나 잘 써진 대본이 있기 마련이다. 일례로 과학 유튜브 채널들은 주제를 정하고 학술적 근거를 조사한 뒤, 작가가 스토리라인과 메시지를 구체화해 치밀한 스크립트를 만든다. 그래서 화면이 바뀌어도 설득은 여전히 문장 위에서 이루어진다. 글이 구조를 만들고, 구조가 주의를 붙잡는 셈이다. 따라서 글이라는 뼈대가 견고하지 못하면, 영상의 시각 효과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기표현이 쉬워진 시대에 많은 사람이 글로 인생을 바꾸고 있다. 평범한 공대생이었던 앤디 위어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더 마션』을 연재하여 자비로 출판했다. 여기에 독자들의 피드백이 더해지며 메이저 출판 및 할리우드 영화로까지 이어졌다. 안나 토드가 원디렉션의 팬픽 플랫폼에서 시작한 『애프터』도 억대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책과 영화로 확장됐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던 황보름은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며 전업 소설가가 되었다. 처음에는 단 3명의 독자만 있었을 뿐이지만, 꾸준히 쓴 글은 베스트셀러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로 이어졌다.


이 사례들의 공통점은 글쓰기를 잘했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그보다는 ‘평범한 개인들이 이룬 자아실현’의 의미가 더욱 크다. 글은 개인의 기록을 사회의 공론장으로 이동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세계 속에 자리매김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글쓰기는 기능적 도구를 넘어 인간이라는 사회적 존재의 본질과 연결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이를 철학적으로 정식화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인간의 능동적 삶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순환 활동이고, 작업은 인공물을 만들어내는 생산 활동이다. 그러나 아렌트가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행위’였다. 행위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소통하며, 세계 안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활동이다. 인간은 그저 먹고 만들며 인생을 살지 않고, 다른 이와 관계 맺으며 자기 이야기를 남기는 존재라는 의미다.


글쓰기는 아렌트가 말한 ‘행위’를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이다. 영상은 즉각적인 주목을 얻지만 금세 사라진다. 반면 글은 공론장에 남아 시간이 지나도 읽히며, 맥락의 변화에 따라 새 의미를 획득한다. 이러한 지속적 상호작용 속에서 글은 사라질 순간을 붙잡아, 개인의 발화를 공동체의 서사로 확장시킨다.


이렇게 볼 때 글쓰기는 삶을 편리하게 만드는 기술을 넘어선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고, 나의 사유를 세계와 나누며, 타인의 공감과 지지를 얻는 수단이다. 한 편의 글을 통해 나는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누군가는 그것에 응답한다. 이러한 공명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더욱 또렷해진다. 그것은 입술의 떨림이 금속관을 통과하며 아름답고 선명한 소리로 바뀌는 트럼펫 연주와도 비슷하다. 이로써 고립된 개인은 거대한 오케스트라에 소속되어, 합주를 통해 많은 관객에게 울림을 전하는 연주자로 자리 잡는다.


여기서 얻는 만족은 돈이나 명예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자기표현의 기쁨, 공감이 주는 울림, 기록이 남긴 지속성은 물질적 보상과는 바꿀 수 없는 성취감을 준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작가도 바로 이 동기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들이 처음부터 위대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프란츠 카프카는 보험회사 직원이었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즈바 사장이었으며, 박완서는 전업주부였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바를 남기고 싶다는 소박한 욕망에 따랐을 뿐이다. 이 평범하고 단순한 글쓰기의 시작이 그들을 만인의 우상으로 만들었다.


이제 결론을 말하자. 글쓰기는 자아실현의 기술이며, 궁극적으로 행복을 이루는 능력이다. 글쓰기는 일상의 경쟁력일 뿐만 아니라, 인간다움의 근거이자 삶의 본질을 발현시키는 행위다. 바로 이 점에서 글쓰기는 우리 삶의 강력한 무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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