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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재능이 아닌 노력

by 배대웅

글쓰기의 시작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있다. 바로 “나는 글쓰기에 소질이 없어서”라는 생각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글쓰기를 타고난 재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고 열심히 하려는 사람도 사정은 비슷하다. 글을 잘 쓰고 싶지만, 모니터 앞에만 앉으면 머리가 하얘지고, 첫 문장을 쓰다 지우기만 반복한다. 어쩌다 그럴듯한 문장이 나오다가도 갑자기 별로라는 느낌이 들면서 다시 멈춰 선다. 블로그나 SNS에 글을 올려도 ‘좋아요’ 수가 기대만큼 안 나오면 좌절한다. 이 경험들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하게 된다. “내가 정말 글쓰기에 재능이 있을까?”


‘재능’은 글쓰기에 가장 흔히 갖는 오해다. 글쓰기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노력으로 길러지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서에 자주 등장하는 ‘1만 시간의 법칙’은 글쓰기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 법칙에 따르면, 세계적 수준에 오른 사람들 - 과학자, 소설가, 운동선수, 음악가 등 - 의 공통점은 엄청난 연습량이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는 천재라는 화려한 찬사를 듣는다. 그런데 인생 이력을 깊이 들여다보면 특별한 비결이 없다. 모두가 정해진 시간에 꾸준히 반복 연습을 이어왔을 뿐이다.


글쓰기도 같은 맥락에 있다. 물론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감각적인 표현을 곧잘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글쓰기 실력은 연습량과 반복의 질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나는 글재주가 없어”라는 말은 글을 써 본 경험이 부족하다는 자기 고백일 때가 많다. 실제로는 누구든 글쓰기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 글쓰기를 어렵게 만드는 원인은 재능의 한계가 아니라, 훈련의 결핍일 뿐이다.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분명히 있지만


글쓰기가 노력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근거가 있다. 바로 ‘글을 잘 쓰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글쓰기가 순전히 재능에 달렸다면, 원칙이나 요령을 배우는 일은 무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다.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는 글쓰기 교본들, 그리고 그 저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조언을 한다. 글쓰기는 신비한 영감의 산물이 아니라,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기술이라는 것.


『글쓰기 생각쓰기』의 저자 윌리엄 진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좋은 글쓰기의 핵심이다. …(중략)… 그런 원칙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일까?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원칙은 대개 익힐 수 있는 것들이다.” 도로시아 브랜디 역시 『작가 수업』에서 “나는 글쓰기에 비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비법은 분명히 있고, 또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강조했다. 대가들이 한 목소리로 하는 이 진술은, 글쓰기가 순간의 영감이 아니라 습득의 규율임을 증명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닌 ‘실제로 하는 것’이다.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명료하게 써야 한다.”, “군더더기를 덜어내야 한다.” 같은 원칙쯤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그것을 습관으로 체화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과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글쓰기가 사람들을 좌절하게 만든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익히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이것은 수험 공부에도 비유할 수 있다. 수학 문제집의 해설을 읽을 때는 “아, 그렇구나” 하고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막상 시험장에서 비슷한 문제를 풀려고 하면, 손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해법의 논리를 충분히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초고를 쓰고, 읽고, 고치고, 다시 쓰는 과정을 지겹도록 거듭해야 한다. 그래야만 내 것이 된다. 이렇듯 글쓰기는 원칙을 배운 뒤 반복적으로 몸에 적용하는 훈련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작가에게 어떤 환상을 품는다. 대략 이런 이미지다. “어느 날 갑자기 영감이 번쩍 떠오른다. 그 즉시 자리에 앉아 일필휘지로 문장들을 써 내려간다. 그것들이 모여 명작이 탄생한다.” 그런데 실제 작가들의 삶은 이런 한가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신의 계시를 기다리는 신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매일 책상에 앉아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노동자에 가깝다. 문장을 쓰고, 지우고, 고치고, 다시 쓰는 일. 이러한 반복을 거쳐 힘겹게 작품을 만들어 나간다.


대가들의 글쓰기 루틴


이것은 경력이 짧은 신진 작가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대가일수록 철저하게 일상화된 규율에 따라 글을 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소설 쓰기를 “통상 영업 행위(business as usual)”라고 했다. “나 자신을 정해진 생활패턴에 몰아넣고, 생활과 일의 사이클을 확정할 때에야 비로소 장편소설 쓰기가 가능해진다.”라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5~6시간 집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 매일의 작업량을 200자 원고지 20매로 정해 둔다. 글이 잘 써져도 20매에서 멈추고, 뭔가 좀 안 풀리는 것 같아도 어떻게든 20매를 채운다. 어찌 보면 직장인이 매일 출퇴근 카드를 찍는 것과도 비슷하다. 하루키는 이 반복을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이라고 했다. 단조롭지만 규칙적인 생활이야말로 창작의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하루키가 인용하는 이사크 디세넨의 말은 설득력을 발휘한다.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


스티븐 킹도 마찬가지다. 그는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마추어는 영감을 기다린다. 우리는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킹도 하루키처럼 매일 2,000 단어 이상 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크리스마스나 생일 같은 특별한 날에도 예외는 없다. 글쓰기가 하루키에게 통상 영업 행위라면 킹에게는 목수의 작업이다. 목수가 널빤지를 잇고 벽돌을 쌓아서 건물을 짓듯, 작가는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차곡차곡 엮어 작품을 쓰기 때문이다. 유명한 고전이라고 해서 더 특별할 건 없다. 킹에 의하면, “건축재료를 한층 한층 가지런히 쌓아 올리고 문짝도 고르게 대패질하면 무엇이든 건설할 수 있다.” 우리가 고전으로 추앙하는 책들 또한 똑같은 방식으로 지은 대저택일 뿐이다.


글쓰기로 성공한 대가들의 삶은 종종 낭만적으로 포장된다. 직장인은 꿈도 못 꿀 풍족한 인세 수입을 누리며, 여행과 유흥을 즐기면서 여유롭게 글을 쓴다는 식이다. 하지만 하루키와 킹은 전혀 다른 삶을 산다. 아침 일찍 일어나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정해진 분량을 채우는 데 매달린다. 그들이 인류 문명에 길이 남긴 문장들은 이렇게 탄생할 수 있었다. 통상 영업 행위(하루키)와 목수의 작업(킹)이 만든 위대한 성취인 셈이다. 둘의 표현은 다르나 의미는 같다. 글쓰기는 삶에 뿌리내린 노동이자 숙련의 결과라는 것. 글쓰기를 고민하는 우리도 이 사실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세계적 작가도 매일 출근해서 정해진 업무를 해야 하는 직장인과 다르지 않음을. 글쓰기란 천재의 번뜩임이 아니라, 묵묵히 쌓아 올린 노동의 기념비다.


글쓰기와 공학 기술


어쩌면 예술가들에게는 선천적 재능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오디션 무대에서 심사위원들이 타고난 음색을 강조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소프라노 조수미의 목소리를 "신이 내린 선물"이라며,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류의 자산"이라고 치켜세웠다. 이건 과장된 미담이 아니다. 벨칸토 같은 고도의 발성 체계에서는 신체적 조건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대 길이, 후두 구조 등이 성악 파트와 음색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도 많이 있다. 대중가요라고 예외는 아니다. <슈퍼스타 K>의 심사위원을 오래 했던 가수 이승철은 참가자들에게 이렇게 강조하곤 했다. “가수는 선천적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의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가 곧잘 독설 심사평을 날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빨리 꿈에서 깨어나 다른 일을 찾으라는 취지다.


하지만 글쓰기는 다르다. 그것의 본질은 예술보다는 기술에 가깝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대 대신, 정밀하고 반복적인 절차를 거치며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다. 실제로 세상의 모든 일 중에 글쓰기에 대한 가장 정확한 비유는 공학이다. 글쓰기라는 문과적 행위가 공학이라는 이과 학문과 통한다니,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할 게 없다. 글쓰기와 소프트웨어 개발, 시스템 공학, 품질 관리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방식을 떠올려 보자. 보통 다음의 단계들을 거친다. 요구사항 분석 → 설계 → 구현 → 테스트 → 배포. 글쓰기도 비슷하다. 아이디어 도출 → 개요 작성 → 초고 집필 → 수정‧퇴고 → 발행. 겉으로 보이는 단계만 비슷한 게 아니다. 전체 작업을 운용하는 방법 역시 유사하다. 개발자가 요구사항을 잘못 정의하면 프로젝트 전체가 실패한다. 글쓰기도 주제와 메시지 디자인이 불분명하면 글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또한 개발자에게 디버깅은 필수 작업이다. 오류를 찾아내고 고치는 과정 없이 프로그램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초고에는 반드시 ‘버그’가 있다. 논리의 비약, 문장의 중복, 모호한 개념 등등. 이를 수정하고 새로 쓰는 퇴고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시스템 공학의 피드백 루프도 글쓰기와 닮았다. 산출물을 점검하고 개선하듯, 글쓰기도 편집자 조언, 독자 반응, 자체 점검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 나간다. 이는 특히 애자일 방법과도 닮아있다. 애자일은 거대한 설계를 처음부터 완벽히 세우는 대신, 작은 단위의 실행과 검증을 반복하여 발전시킨다. 글쓰기도 초고를 단 한 번에 완성하려고 하기보다, 단락 단위로 쓰고 조율하며 전체를 완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제조업의 품질 관리도 글쓰기와 연관성이 있다. 카이젠(지속적 개선)이 좋은 성과를 보장하듯, 글쓰기에서도 수정과 보완은 핵심 과정이다. 한 문장을 열 번 고친다고 해서 낭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품질을 끌어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공장에서는 완제품을 내놓기 전에 결함률을 집요하게 측정한다. 작은 흠집이나 오차가 제품 전체의 신뢰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글도 똑같다. 만약 글에 읽는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결함이다. 그래서 퇴고는 결함률을 줄이는 품질 관리 과정이다.


결국 작가란 재능을 타고나는 아티스트가 아니다. 그보다는 제품의 설계, 구현, 검증을 반복하면서 점차 숙련되는 엔지니어에 가깝다. 그가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좋은 글이란 결함률을 0에 가깝게 줄여낸 공학적 결과물과도 같다.


노력으로 완성되는 무기


글쓰기 능력은 삶을 단단하게 해 주는 무기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서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힘으로 날마다 벼려내야만 비로소 손에 쥘 수 있다. 좋은 문장도 번쩍이는 영감에서 튀어나오지 않는다. 수없이 쓰고, 지우고, 다시 쓰는 단조로운 반복 속에서 조금씩 정제될 뿐이다. 마치 연철을 여러 번 두드려야 강철이 되듯, 글도 수정을 거듭해야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글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장식품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전선에서 실제로 쓰이는 유용한 도구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며, 타인과 연결되는 힘을 가진다. 그렇기에 글쓰기를 바라는 사람은 재능을 탓해서는 안 된다. 지루한 훈련의 반복도 견디겠다는 굳은 심지를 가져야 한다. 글은 재능이 아니라 오직 노력으로 완성되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사실을 기억하자. “재능은 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력만이 끝까지 데려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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