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픽션(finction), 다른 하나는 논픽션(nonfiction). 픽션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과 사건을 창조하고, 상상력으로 세계를 구축한다. 이러한 허구의 매력을 앞세워 독자에게 재미와 감동을 준다. 소설, 희곡, 판타지 등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논픽션은 사실과 정보에 기초한 현실 세계의 글이다.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논(non-)과 픽션(fiction)의 결합에서 알 수 있듯, 픽션이 아닌 글들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논픽션의 범위는 매우 넓다. 인물 서사(전기, 회고록, 자서전), 정치‧사회현상 분석(칼럼, 사설), 예술 작품의 감상과 비평(평론), 학문적 지식의 전달(교양서), 개인적 경험과 생각의 공유(에세이) 등이 포함된다. 이뿐만 아니다. 보고서, 매뉴얼, 백과사전 등의 실용적인 글, 학술논문과 탐사보도처럼 전문적인 글도 논픽션이다. 이것도 대략적인 분류일 뿐, 세부적으로 더 나누면 논픽션의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이 연재에서 다루려는 글은 논픽션이다. 픽션은 허구적 세계를 창조하는 만큼, 오랜 훈련으로 쌓은 치밀한 기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서 전문 작가가 되려는 사람에게 적합하다. 반면 논픽션은 실제 경험, 지식, 사유를 바탕으로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글의 대부분 - 일기, 독후감, 보고서, 레포트, 블로그와 SNS 포스팅 등 - 이 모두 논픽션이다. 현실에서의 쓸모도 크다. 물론 학술논문 같은 글은 엄격한 기준과 전문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전기, 에세이, 평론, 교양서 같은 글은 연습만으로 누구나 쓸 수 있다. 실제로 취미로 이런 글쓰기를 시작했다가 작가의 길로 들어선 사례도 적지 않다. 논픽션은 특별한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매일 쓰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글쓰기다. 따라서 논픽션을 깊이 이해하는 일은 글쓰기를 배우는 확실한 출발점이 된다.
그럼 논픽션의 정의부터 따져보자. 케임브리지 사전은 “실제 사건이나 사실에 관한 글”로 규정한다. 다만 사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논픽션이 성립하지 않는다. 논픽션 이론의 개척자인 리 굿카인드는 창의적 논픽션을 “진짜 이야기지만 문학적으로 잘 쓰인 글”이라고 했다. 즉,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서사적 완성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다. 바바라 란즈베리는 『사실의 예술』에서 논픽션의 네 가지 조건을 꼽았다. “주제는 현실 세계의 문서화가 가능한 것이어야 하고, 철저한 조사를 거쳐야 하며, 장면을 중심으로 구성하고, 문체의 세련미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처럼 논픽션은 사실을 토대로 하지만,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조사, 해석, 문체가 결합된 서사적 글쓰기다. 즉 사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어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과 경험을 제공하는 장르라 할 수 있다.
잘 쓰인 논픽션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사회를 움직인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문제를 직설적인 문장으로 옮긴 글이라서 파급력이 크다. 예컨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농약의 위험을 고발함으로써 전 세계 환경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미국의 화학 정책까지 바꿔놓았다. 마틴 루터 킹의 연설문, 조지 오웰의 정치 에세이 역시 함축적이면서 강렬한 글쓰기로 대중의 의식을 뒤흔든 경우다. 우리나라에서도 황우석 사태를 추적한 과학 저널리즘 글은 연구 윤리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고려대 학생의 대자보 “안녕들하십니까?”는 청년 세대의 불안을 날카롭게 드러내며 사회운동으로 퍼졌다. 비단 어른들의 글뿐만 아니다. 안네 프랑크가 쓴 『안네의 일기』는 한 소녀의 내밀한 기록이 전쟁의 비극을 전 세계에 일깨울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렇듯 논픽션은 일상의 언어로 쓰였음에도 독자의 공감과 행동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변화를 만들어낸다.
논픽션의 가장 오래된 형식은 전기와 회고록이다. 한 사람의 삶을 기록하는 동시에, 그가 속한 시대 배경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는 성공한 기업가의 일대기만이 아니다. 잡스라는 인물을 따라가 보면, 1960년대의 반문화와 실리콘밸리의 태동, 그리고 디지털 혁명의 역동적 서사가 함께 펼쳐진다. 한국에서는 정주영의 『이 땅에 태어나서』가 이와 비슷하다. 한 기업가의 성공담과 함께 전후 성장과 산업화의 드라마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정치인의 전기와 회고록도 빠질 수 없다. 특히 말과 글을 정치적 수단으로 능숙하게 활용한 버락 오바마는 전기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가 쓴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과 『담대한 희망』은 자전적 기록을 넘어 미국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며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 대통령 임기 동안 선보인 연설문들도 시대정신을 담지한 텍스트로서 전 세계에 회자되었다. 퇴임 후 펴낸 회고록 『약속의 땅』 역시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입증했다. 잡스와 정주영이 기업가로서 시대의 성공을 대변했다면, 오바마는 정치인의 언어를 통해 시대의 전환을 이끌어낸 셈이다.
전기 집필은 그 사람의 일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놓는 작업이 아니다. 어떤 사건을 선택하고, 어떤 장면을 부각하느냐가 글의 힘을 좌우한다. 뛰어난 전기 작가는 한 사람의 선택과 갈등을 통해 독자에게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전기와 회고록은 자료 수집과 구성 능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편지, 인터뷰, 기록 등을 모으는 것은 기본이다. 그것을 어떻게 엮어 드라마로 만들 것인가는 전적으로 글쓴이의 역량에 달려 있다.
전기가 ‘한 사람의 큰 이야기’를 다룬다면, 에세이는 ‘내 소소한 이야기’를 곧장 꺼내놓는다. 사소해 보이는 경험이라도, 어떤 언어로 빚느냐에 따라 독자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실제로 이 분야의 영원한 고전인 미셸 드 몽테뉴의 『수상록』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인류 보편의 사유법을 확립했다. 조앤 디디온은 『슬픈 낯익음』에서 시대의 복합적 불안을, 『마법의 생각』에서는 사회 속 개인의 상실을 감각적인 문장으로 드러냈다. 국내에서도 많은 작가가 비슷한 결의 에세이를 선보였다.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 경험을 통해 “떠남이 곧 삶의 본질적 의미”라는 통찰을 전했다.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자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삶의 궤적과 연결해, 독자들에게 성찰의 거울을 제공했다.
최근에는 개인사를 넘어 세대론에 입각한 에세이들도 주목받는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집단으로 꼽히는 청년 세대를 주제로 한 글들이 그렇다. 임홍택의 『90년생이 온다』는 90년대생의 가치관과 조직문화 속 갈등을 흥미롭게 짚었다. 그리고 이는 청년 세대의 특성을 이해해 보려는 사회적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은 취업과 경쟁의 구조 속에서 청년들이 겪는 불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렇듯 청년 세대가 겪는 삶의 문제를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탐구하는 글들이 꾸준히 각광받고 있다.
에세이를 쓰는 방법은 기술보다는 관찰과 성찰에 있다. 일상 속에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감정을 붙잡아두고, 그것을 폭넓은 보편의 언어로 재조립해야 한다. 짧지만 깊이 있는 문장, 예기치 못한 연결이 에세이의 미덕이다. 그래서 에세이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면서, 가장 쓰기 어려운 글이기도 하다.
에세이가 내면의 고백이라면, 칼럼과 사회비평은 세상에 내지르는 외침이다. 전체 논픽션 중에서도 형식적 제약이 많은 장르이기도 하다. 짧은 분량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논거들을 압축해 제시해야 한다. 핵심은 명확한 주제와 설득력이다. 조지 오웰의 <정치와 영어>는 단 몇 장에 불과하나, 언어를 왜곡해 국민을 통제하는 권력을 비판한 명문으로 꼽힌다. 제임스 볼드윈의 칼럼도 흑인 차별과 미국 사회의 위선을 고발하면서도, 시적 울림을 갖춰서 여전히 자주 인용된다. 이처럼 칼럼은 냉철한 현실 감각과 설득력 있는 논리를 통해 독자의 의식을 흔들어 놓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칼럼은 사회 변화를 촉발하는 장르였다. 특히 고(故) 리영희의 글은 반공·안보라는 군사독재의 금기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지식인의 글쓰기가 어떻게 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지 하나의 모델을 제시했고, 이후 세대 논객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강준만, 고종석, 홍세화, 유시민, 진중권 등이 그를 계승하는 작가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글은 특히 온라인 토론 문화가 자리 잡은 2000년대 이후, 인터넷 공론장을 활성화하는 핵심 자원이 되었다. 최근에는 블로그와 소셜미디어의 짧은 글들이 사회적 의제를 던지는 새로운 칼럼의 무대가 되고 있다.
칼럼과 사회비평의 힘은 즉시성에 있다. 발표 순간 곧바로 반향이 생기고, 논쟁이 이어지며 글은 사건이 된다. 작은 칼럼이 여론을 모아 정책을 바꾸거나 기업의 행태를 고발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처럼 칼럼은 사회적 개입의 도구이면서 논픽션 글쓰기의 실전 훈련장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글을 쓰려는 사람이라면 칼럼처럼 짧고 날카롭게 자신의 주장을 정리해 보는 훈련을 해볼 만하다. 주장을 제시하고, 근거를 대고, 반론을 예상해 미리 응수하는 구조는 논픽션 전반에 두루 응용될 수 있다.
평론 역시 중요한 논픽션의 장르다. 책, 영화, 드라마 같은 작품을 단순히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 속에 놓고 해석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좋은 평론의 가치는 평론가가 어떤 관점과 언어로 작품을 열어 보이는가에 달려 있다.
영화평론가 로저 이버트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 영화는 좋다, 나쁘다”를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특정 장면과 구도의 의미를 세심히 짚으며 관객에게 영화 보는 방법 자체를 알려준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독자는 스스로 영화 속 카메라와 편집을 의식하며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보게 된다. 수전 손택은 한발 더 나아갔다. 그녀는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예술을 의미로 환원하려는 습관을 경계했다. 그녀는 작품을 억지로 ‘메시지’로 좁혀서 이해하려 하지 말고, 감각과 형식이 전달하는 힘을 존중하라고 주장하며 비평의 새로운 태도를 제시했다.
우리나라의 평론도 많은 이의 감각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정성일은 영화를 당대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읽어내며, 감독의 사유와 윤리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 영화는 오락의 수단이 아닌 시대의 기록으로 다가온다. 황현산은 문학평론에서 언어의 미세한 뉘앙스와 문체의 리듬을 세밀하게 포착했다. 그는 한 편의 시를 획일적 의미로 환원하지 않고, 단어의 배치와 어휘의 울림이 어떻게 정서와 사유를 불러일으키는지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의 평론을 읽은 독자는 작품 속 문장의 결을 새삼스럽게 체험하며, 언어가 그 자체로 예술임을 깨닫게 된다. 가장 널리 읽힌 평론가인 이동진은 영화평론이 대중과 가까워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래서 SNS, 책, 강연을 통해 전문적 분석과 대중적 공감을 동시에 아울렀다. 평론이 소수 지식인의 담론이 아니라, 대중이 참여하는 해석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평론의 본질은 작품에 해석의 언어를 부여하는 일이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어떤 평론가의 시선을 거치면 전혀 다른 의미망이 드러나는 이유다. 이로써 평론은 독자를 위한 안내서 역할도 한다. 결국 평론은 “내가 본 것을 다른 이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작품과 독자 사이에 대화의 장을 여는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오늘날 가장 널리 읽히는 논픽션 장르는 단연 교양서다. 교양 논픽션은 전문적인 학문 지식을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낸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천문학을 장구한 인류 문명 속에 녹여 과학을 하나의 서사로 만들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복잡한 진화 이론을 생생한 은유로 설명해 독자들의 사고방식을 바꾸었다.
교양 논픽션의 꾸준한 인기는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는 뇌과학, 물리학, 사회현상을 흥미로운 실험과 사례로 연결하며 과학 대중화의 대표작이 되었다. 김상욱의 『떨림과 울림』은 물리학의 원리를 감각적인 언어로 서술하여 과학이 어떻게 삶 속에 스며 있는지 보여주었다.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경제를 수학이 아닌 역사적 스토리텔링으로 설명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도왔다.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은 철학, 역사, 경제, 과학이라는 아득히 떨어진 학문들을 한 권에 집약했다. 요컨대 교양 논픽션은 특정 학문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의 삶 전반을 탐구하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교양 논픽션의 중요한 갈래가 역사다. 역사 논픽션은 과거의 기록을 넘어 오늘의 문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문명 격차를 인종적 우월성이 아닌 환경적 조건에서 설명하며 세계사의 통념을 뒤흔들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인류학, 경제학, 역사학을 종합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토론을 촉발했다. 국내에서도 주경철의 『대항해시대』가 유럽과 아시아의 해상 네트워크를 복원하며 세계화의 기원을 보여주었다. 또한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과 『미국사 산책』은 방대한 자료와 간결한 문체를 결합해 현대사의 복잡한 흐름을 대중적으로 재구성해냈다.
교양 논픽션을 쓰는 핵심은 번역이다. 고도의 지식을 일상의 언어로 옮기고, 복잡한 개념을 비유와 사례로 설명해 독자가 따라올 수 있게 해야 한다. 독자의 흥미를 끌어당길 스토리텔링도 필수다. 각 문장과 단락이 드라마처럼 전개될 때 독자는 끝까지 책장을 넘기게 된다. 이렇듯 사실성과 서사성이 균형을 이룰 때, 교양 논픽션은 지식 전달을 넘어 사고력과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교양 논픽션은 전문가만의 영역이 아니다. 직장에서 체득한 경험, 일상 속에서 깊이 파고든 취미, 사회를 관찰하며 얻은 깨달음도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다. 글쓰기 초보자라면 먼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에서 개념이나 현상을 뽑아, 친숙한 비유와 사례로 풀어내는 훈련을 해보자. 그것이 바로 독자와 지식을 연결하는 교양 논픽션의 첫걸음이다.
논픽션 글쓰기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정보, 논리, 관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다양한 논픽션 장르들도 이것이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전기는 방대한 정보 수집이 토대가 된다. 칼럼은 정교한 논리적 전개가 중심이 된다. 에세이는 작가 고유의 관점이 두드러져야 한다. 교양 논픽션은 이 세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힘을 발휘한다.
정보는 글의 뼈대다. 논픽션은 허구가 아닌 만큼 신뢰할 만한 자료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저 많은 정보를 모은다고 글이 살아나지 않는다. 독자가 “이런 사실이 있었어?” 하고 고개를 들게 만드는 새로운 정보, 혹은 의외의 사실이 필요하다. 아이작 뉴턴이라고 하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연금술에도 몰두했으며, 그 신비주의적 배경이 ‘중력이라는 원거리에서 작용하는 힘’을 떠올리는 단초가 되었음은 독자에게 신선한 시각을 준다. 전기든 역사 논픽션이든, 이런 의외성이 더해질 때 글은 독자에게 오래 남는다.
논리는 그 뼈대를 움직이게 하는 근육이다. 자료가 아무리 풍부해도 무작위로 나열되면 글은 산만해진다. 독자가 따라올 수 있도록 명확한 논리의 전개가 필요하다. 칼럼이나 사회비평은 특히 이 힘으로 독자를 설득한다. 역사 논픽션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영국의 헨리 8세가 군사용 대포를 강철로 바꾼 결정은 전략적, 기술적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연결해 이를 해석하면, 영국 경제 구조의 고도화를 촉발한 계기로 볼 수도 있다. 논리가 개별 사실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줄 때, 글은 평범한 기록을 넘어 인과관계를 읽어내는 서사가 된다.
마지막으로 관점은 글의 영혼이다. 같은 사실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글이 된다. 에세이가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다. 똑같은 일상적 경험도 작가만의 독특한 해석이 담기면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우리는 별의 먼지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썼을 때, 그는 천문학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시적 의미를 열어 보였다. 이렇게 관점은 사실에 생명을 불어넣고, 독자와의 정서적 연결을 가능케 한다.
결국 논픽션은 삶을 쓰는 기술이다. 논픽션 글은 사실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평범한 경험은 정교한 언어로 조직되면서 새롭게 조명되고, 사소한 사건은 역사의 맥락 속에 놓이며 풍부한 의미를 획득한다. 이 작업은 거창한 재능이 아니라, 정보를 논리로 엮고 관점을 입히는 훈련에서 시작된다. 누구나 이 과정을 거쳐 자신만의 논픽션을 완성할 수 있다. 그렇게 탄생한 글은 삶을 성찰하는 동시에 세상과 연결되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 된다. 여기에 논픽션 글쓰기의 진짜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