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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려면

by 배대웅

겸업 작가가 마주하는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다. 도무지 글을 쓸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지만, 겸업 작가의 그것은 이미 예약된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회사에서 업무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와 육아가 기다리고, 때로는 인간관계와 사회적 의무까지 수행해야 한다. 여기에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이면 남는 시간은 그저 잘게 부서진 틈들뿐이다. 글쓰기란 물리적인 시간만 있으면 되는 활동이 아니다. 정신적 에너지, 감정의 안정, 몰입 가능한 환경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 이것들이 동시에 충족되는 순간은 하루에 몇 번 오지도 않는다.


결국 겸업 작가는 시간, 체력, 감정까지 소진된 상태에서 글을 시작해야 하는 존재다. 그렇다고 바빠서 못 쓴다고 쉽게 물러날 수는 없다. 글을 쓰고 싶다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겸업 작가는 글을 포기하지 않는 대신, 시간과 싸워서 이기는 법을 익혀야만 한다. 그러자면 싸움의 구조부터 이해해야 한다. 즉 “시간이 없어”라는 자조에서 벗어나, “왜 시간이 없는가”를 정확히 아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많은 겸업 작가가 글을 쓰지 못하는 자신의 의지 부족을 탓한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현실이다. 물리적 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정신적 피로가 누적되어 있으며, 환경적 방해 요소가 많고, 감정적 여유가 없다. 따라서 “시간이 없다”라는 말은 변명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이런 조건에서도 글을 써내는 사람이 존재하는가?”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많다. 그중에서 출간도 하고 수상도 하는 작가들이 나온다. 그들이라고 시간을 더 많이 가졌을 리 없다. 그들은 시간을 다르게 바라보고, 다르게 다루는 사람들이다.


199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의 말이다. “아이들이 깨기 전 새벽에 글을 썼다. 그것만이 내가 가진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일하면서 아이 둘을 키우던 그녀도 없는 시간을 만들어내서 글을 써야 했다. 세계적인 작가도 그러한데 우리야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래서 겸업 작가는 글을 잘 쓰는 기술만 익혀서는 안 된다. 시간을 어떻게 내 편으로 만들지도 깨달아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떤 아이디어와 의지도 허공에서 사라지고 만다.


모든 시간을 쓰려고 하지 말자


겸업 작가의 시간 전략은 ‘모든 시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없는 시간을 과감히 버리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어떤 시간은 애초에 글쓰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의 업무 시간처럼 책임과 집중이 필요한 시간, 아이를 돌보는 시간처럼 타인을 우선해야 하는 시간, 인간관계나 외부 일정으로 고정된 약속 시간, 혹은 하루를 마치고 몸이 소진된 시간이 그렇다. 이것들은 글쓰기와 양립할 수 없다. 이런 시간에까지 억지로 글을 끼워 넣으려 하면 계획은 매번 무너진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건 실제로 쓰기에 적합한 시간이다. 단순히 비어 있는 시간이어서는 안 된다. 사유를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시간, 최소한의 집중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은 시간이어야 한다. 즉,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이 작가의 생산성을 결정한다. 두 시간이 있어도 머리가 텅 비어 있으면 실제로는 0분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30분밖에 없어도 이미 생각이 정리되어 있다면, 전부 생산적인 시간이 된다.


따라서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한다. “어떻게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하면 언제든 바로 글쓰기에 돌입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 것인가?”로. 글쓰기는 단순노동이 아니라 사고와 감정이 함께 작동해야 하는 행위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앉아 있어 봐야 한 줄도 안 써진다. 하지만 머릿속이 이미 예열되어 있다면 짧은 시간에도 빠르게 몰입할 수 있다. 요컨대 ‘상태 관리’가 곧 ‘시간 관리’다. 글을 쓸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조건을 미리 만들어두는 사람이 진짜로 오래 쓸 수 있다.


하루는 늘 24시간이지 26시간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루 속에서 ‘쓸 수 있는 상태의 시간’을 발견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재구성할 수는 있다. 불가능한 시간을 버리고, 가능한 시간의 질을 높이고, 언제든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상태를 준비해 두자. 그러면 시간은 비로소 내가 선택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된다.


쓸 수 있는 시간의 발견


관건은 이미 존재하는 시간 속에서 ‘글쓰기로 전환할 수 있는 순간’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능력은 의지나 재능이 아니라, 시간을 인식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시간이 없다고 단정하는 순간 모든 가능성은 닫힌다. 하지만 시간을 어떻게든 찾으려는 사람은 같은 하루 속에서도 글로 연결되는 문들을 끊임없이 발견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생기는 시간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출퇴근길, 이동 중, 쉬는 시간,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 다음 회의까지 남은 10분, 잠들기 직전 등. 그 또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머릿속으로 주제의식을 구체화하고, 글의 구조를 정리하고, 논거들을 찾고, 문장들을 재배열하고, 더 적확한 개념들을 떠올려야 한다. 이 작은 선택의 반복이 글쓰기 속도와 결과를 갈라놓는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나”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글에 접속했나”다.


글쓰기의 최대 장점은 복잡한 장비가 필요 없다는 사실이다. 두뇌, 손, 필기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바로 작업할 수 있다. 노트북이 있다면 가장 좋지만,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더 작은 태블릿, 휴대폰, 정 안 되면 수첩이어도 충분하다. 고수는 장비를 탓하지 않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글쓰기의 완벽한 조건이 갖춰지기를 기다린다. 조용한 공간, 충분한 여유 시간, 완벽한 집중 상태. 그러나 그런 순간은 일주일에 한 번 생길까 말까다. 반면 글쓰기가 일상화된 사람은 10분만 있어도 바로 글에 닿는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장비는 노트북이 아니라 “즉시 시작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상태”다.


따라서 겸업 작가는 지금의 시간과 장소를 글쓰기에 맞춰 변형할 줄 알아야 한다. 출근길이면 메모로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대기 시간에는 개요를 구성하거나 문장을 다듬고, 잠들기 전에는 다음 전개를 시뮬레이션한다. 이렇게 하면 짧은 시간도 더 이상 버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시간의 파편들이 모여서 글 한 편을 만들어낸다.


보이지 않는 작업 시간


물론 “밤 10시부터 12시까지는 무조건 글만 쓴다”와 같은 원칙을 갖는 것은 훌륭하다. 그 또한 작가가 되는 필수 조건이다. 다만 이를 “글은 그 시간에만 쓰면 된다”라는 의미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시간에는 자신을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 취급하게 된다. 글에 대한 감각은 하루 종일 방치된다. 이러면 글쓰기를 시작할 때마다 매번 시동을 걸어야 한다. 바로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글을 쓰는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글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겉으로는 글을 쓰지 않고 있어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글을 굴릴 수 있다. 지금 다루는 주제를 어떻게 변주할지, 다음 문단을 어떤 흐름으로 펼칠지, 예상되는 반론은 무엇일지, 결론에 어떤 격언을 인용할지 끊임없이 떠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사고를 멈추지 않는 한, 글쓰기는 이미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행위는 최종 단계일 뿐이다. 진짜 글쓰기는 그 이전에 시작된다.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긴다. 어떤 사람은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아서 생각을 시작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미 생각을 끝낸 상태로 앉는다. 전자는 30분을 앉아도 한 줄을 쓰기가 어렵다. 후자는 10분만 앉아도 단락 하나를 완성한다. 이 차이는 얼마나 빨리 ‘작가 모드’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즉, 글을 쓰는 순간과 아닌 순간을 완전히 분리하지 않고, 언제든 쓸 수 있는 상태로 넘어가도록 자신을 유지해야 한다. 전자제품의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글쓰기가 몸에 밴 사람은 모든 일상을 글 중심으로 살아간다. 타인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마음속에서는 표현을 다듬고, 뉴스를 보면서도 담론의 구조를 분석한다. 독서할 때는 내용을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글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연구한다. 음악을 들을 때는 가사의 문학적 효과에 주목하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한 장면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리듬의 설계를 관찰한다.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흔들릴 때는 “왜 저 말이 나를 건드렸지?”를 고민하고, 길에서 스치는 풍경 속에서도 비유와 묘사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이렇게 사고가 끊어지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는 순간에도 글은 계속 자라난다. 이것이야말로 작가만의 ‘보이지 않는 작업 시간’이다. 이 감각을 가진 사람은 자리에 앉는 순간 이미 절반은 써낸 것이나 다름없다. 준비된 생각이 손끝으로 흘러나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글을 써야만 하는 관성


물리학에 관성이라는 근본 원리가 있다. 멈춰 있는 것은 계속 멈추려 하고,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이려 한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루 종일 본업에 시달리고 집에 돌아오면, 몸은 쉬는 방향으로 쏠리게 된다. 일 끝나면 쉬는 게 당연하다는 패턴이 반복되어 관성으로 굳어진다. 이 관성이 무서운 이유가 있다. 쉬고 싶다는 감정을 넘어서 “쉬는 게 정상이고, 다른 행동은 비정상”으로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즉, 글을 쓰지 않는 삶에도 이미 강력한 관성이 존재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남들보다 의지가 더 강해서 쓸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다른 관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글쓰기를 특별한 이벤트로 만들지 않고, 일상의 기본값으로 설정해 놓은 사람들. 시간이 되면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없어도 결국 쓰는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한 사람들. 관성은 한 번 붙으면 그대로 유지하는 성질이 있다. 따라서 글쓰기가 관성이 되면 안 쓰는 것이 오히려 불편한 상태가 된다. 이 지점에 도달하면 글쓰기는 더 이상 결심의 문제가 아니다.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된다.


관성은 의지보다 강력하다. 의지는 오늘만 필요하지만, 관성은 매일 작동한다. 의지는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관성은 에너지를 절약한다. 의지는 언제든 흔들리지만, 관성은 방향을 고정시킨다. 그래서 겸업 작가는 글을 쓰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삶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몸이 피곤해도 한 줄, 바빠도 10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 그렇게 미미한 움직임을 반복하면 어느 순간 움직이는 쪽이 더 자연스러워진다. 그때부터 글쓰기는 선택이 아니라 관성이 된다.


관성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다. 삶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가에 대한 증거다. 글쓰기에 관성이 붙은 사람은 쓰려고 억지로 노력하지 않는다. 이미 쓰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기울기 덕분에 잠깐 멈출 수는 있어도 오래 멈춰 있지는 않는다. 다시 움직이고 싶어지고, 결국 글 앞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방향만 맞는다면 관성이 밀어준다. 그래서 작가란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쓰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하는 방향을 가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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