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종일 일하고 퇴근 후 글을 쓴다면, 나는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라고 하면 대부분 글로 생계를 잇는 전업 작가를 떠올린다. 밤낮으로 책상에서 원고와 씨름하는 특별한 사람들만 작가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오직 글쓰기에만 전력투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직업이 따로 있으면서 틈틈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출판계 현실에서 글로만 먹고살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2020년 조사에 따르면, 문학 작가의 약 77%가 다른 직업으로 수입을 벌어야 한다고 답했다. 인세나 원고료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작가도 요즘 유행하는 ‘N잡러’ 중 하나인 셈이다.
‘작가’라는 말의 원뜻을 생각하면 더 이해가 쉽다. 作家, 한자 그대로 무언가를 짓는 사람일 뿐이다. 의사나 변호사처럼 자격증이나 국가의 공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기, 칼럼, 에세이, 감상문, 기행문 등 – 어떤 주제와 형식으로든 자신의 사유와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사람들이 곧 작가다. 직장에 다니면서, 가사를 돌보면서, 학업을 하면서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작가가 되는 거창한 시작이란 없다. 아침에 떠오른 생각을 핸드폰 메모장에 적고, 점심시간에 그 문장을 다듬고, 집에 돌아와 몇 문장 덧붙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하루에 10분씩만 쌓아도 한 달이면 짧은 글 하나가 만들어진다. 1년이 모이면 자신만의 관점을 가진 사람이 된다. 많은 작가가 이런 방식으로 첫 책을 완성했다. 결국 “언제 시간이 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일상에서 글을 위한 공간을 조금이라도 확보하는가”다. 실제로 직장인이 틈틈이 쓴 글들이 인정을 받아 출간, 수상 등으로 이어지는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이렇게 조금씩 경력을 쌓으며 안전하게 작가의 꿈을 이뤄나가는 편이, 더 현실적이기도 하다.
전업 작가는 글쓰기가 곧 직업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책상 앞에 앉고, 하루 대부분을 집필에만 쏟아붓는다. 직장인이 출근해서 일과 시간 내내 업무를 보듯 글을 쓰는 셈이다. 따라서 몰입의 측면에서 큰 강점이 있다. 장편 프로젝트를 추진하거나, 하나의 주제를 아주 깊게 파고들 수 있다. 다만 글의 성패가 곧바로 생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언제나 시장성과 수익성의 압박을 받는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선택하기보다 ‘팔릴 수 있는 글’로 기울 가능성이 커진다.
반면 겸업 작가는 직장에서 안정적 수입을 확보하고, 남은 시간에 창작을 병행한다. 당연히 전업 작가보다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나 글이 생존 문제로 이어지지 않아서 심리적으로는 더 자유롭다. 요컨대 전업은 ‘시간의 자유’를 갖지만 ‘생계의 제약’을 받고, 겸업은 ‘시간의 제약’이 있지만 ‘정신적 자유’를 얻는다.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각기 다른 형태의 리스크와 가능성을 지닌, 두 개의 전략일 뿐이다.
전업 작가만이 가질 수 있는 몰입력은 작품의 질을 끌어올리는 핵심 자원이 된다. 그러나 그 몰입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과 맞닿아 있다. 한 번의 실패는 곧바로 생활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불안은 창작의 방향을 보수적으로 만든다. 반대로 겸업 작가는 생계가 이미 확보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수익을 내지 않아도 된다. 이 안정감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과감히 밀어붙일 수 있는 용기로 이어진다. 시장성보다 자신의 문제의식을 우선하는 글, 다양한 실험과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글이 가능해진다. 현실과 창작이 병행되므로, 직장생활에서 얻는 경험과 지식이 글의 재료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겸업 작가는 현실과 창작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최적화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속 위대한 작가의 상당수는 전업이 아니었다. 바뤼흐 스피노자는 안경 렌즈를 깎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후원자나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았기에 자신의 철학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의 역량을 높이 산 하이델베르크대학은 교수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하지 않겠다”라며 거절했다. 경제적 독립이 사유의 독립을 가능케 한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도 보험회사에서 일하면서 밤에 글을 썼다. 그는 직장을 글쓰기의 방해물로 여기지 않았다. 안정적인 일상과 현실 경험은 그의 작품을 더 인간적이고 생생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많은 문학 연구자들이 그의 삶을 이렇게 평한다. “낮에는 타인의 질서를 배우고, 밤에는 문학으로 그것을 해체한다.”
아서 코난 도일도 의사로 일하면서 셜록 홈즈 시리즈를 썼다. 도일에게 소설 쓰기가 단순히 심심풀이만은 아니었다. 그는 의사로서 체득한 ‘관찰과 진단의 논리’를 그대로 추리소설에 적용했다. 증상에서 병의 원인을 추적하듯, 작은 단서로 범죄의 진상을 밝히는 방식인 셈이다. 실제로 도일은 “홈즈의 사고방식은 의대 시절 스승 조지프 벨에게 배운 진단 기법에서 나왔다.”라고 했다.
이 사례들은 겸업이 ‘시간이 부족한 상태에서 겨우 글을 쓰는 방식’이 아님을 보여준다. 겸업은 여러 측면에서 창작의 구조 자체를 변화시킨다. 첫째, 직업이라는 경제적 기반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생계를 글에 의존하지 않으면 시장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인기와 수익보다 진정성과 실험성을 우선할 수 있다. 둘째, 현실의 경험은 글을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든다. 직장과 사회에서 마주하는 관계와 갈등들은 추상적 상상보다 설득력 있는 글감이 된다. 셋째, 창작을 장기 지속할 수 있다. 전업은 한 번 실패하면 삶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겸업은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꾸준히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쓰는 루틴을 가능하게 한다. 넷째, 겸업은 전업으로 가는 가장 현실적인 경로이기도 하다. 셜록 홈즈로 성공한 도일처럼 글쓰기가 본업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비중을 옮기면 된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전업이냐, 겸업이냐?”가 아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가장 오래, 자유롭게, 나답게 글을 쓸 수 있는가?”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전업이 더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겸업은 더 깊고 더 지속적인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길이다. 낮에는 현실을 살아내고, 밤에는 그 현실을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삶. 하나의 인생 안에서 두 개의 시야를 갖는다는 것, 그것이 겸업 작가의 진짜 매력이다. 따라서 겸업 작가는 현실과 창작 사이의 어중간한 타협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작가의 삶을 이행하고, 현실과 창작을 균형 있게 연결하는 가장 전략적인 글쓰기 방식이다.
겸업 작가의 길은 보기보다 훨씬 더 내면적인 싸움이다. 단지 시간이 부족해서 힘든 것이 아니다. 남들이 쉬는 시간에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나는 왜 이걸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계속 마주한다는 뜻이다. 글은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아무 반응 없이 사라지는 글도 많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 조용함을 끝까지 버티게 하는 것은 타인의 인정이 아니다. “그래도 나는 이 이야기를 써야만 한다”라는 내면의 확신이다. 겸업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그 확신을 스스로 지켜내는 일이다.
그래서 겸업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표가 아니라 태도다. 글쓰기를 취미나 부업으로만 여긴다면 피곤할 때 미루기 쉽다. 하지만 글쓰기를 “나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 즉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그러면 글은 ‘해야 할 일’에서 ‘하지 않으면 어딘가 불편한 일’이 된다. 글쓰기가 일이 아니라 정체성이 되는 셈이다. 이 정체성이 단단해야 삶과 글이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강화한다. 삶은 글의 재료를 주고, 글은 삶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낮에 경험한 세계가 밤에 사유로 바뀌고, 그 사유가 내일의 삶을 다르게 만든다. “살면서 쓰고, 쓰면서 산다.”라는 말은 이러한 순환 구조를 의미한다.
게다가 글쓰기는 누구에게나 고독한 작업이다. 다만 겸업 작가가 겪는 고독은 성격이 다르다. 전업 작가는 적어도 작가라는 사회적 신분을 인정받은 상태에서 고독을 견딘다. 반면 겸업 작가는 본업에서는 ‘직장인’으로만 보이고, 글쓰기 세계에서는 아직 ‘작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써야 한다. 낮에는 사무실에 앉아 현실을 따라가고, 밤에는 책상 앞에 앉아 전혀 다른 세계를 붙잡는다. 그러나 누구도 “너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걸 왜 해?”, “힘들게 왜 굳이?”라고 묻기도 한다. 즉, 겸업 작가는 글을 쓰기 전부터 이미 이중의 고립을 감내해야 한다.
따라서 겸업 작가는 정체성에 대한 ‘자기 선언’이 필요하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외부가 아니라 자신에게 먼저 증명해야 한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직업보다 정체성을, 성과보다 방향을 앞세워야 한다. 문제는 이 과정이 매우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뚜렷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인내의 시기가 겸업 작가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타인의 인정이 없어도 쓰는 사람은 ‘현실을 살아내는 힘’과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을 함께 기를 수 있다. 이 두 힘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나온다. 하나는 직장, 가족, 사회 같은 현실의 세계다. 다른 하나는 질문하고, 탐구하고, 의미를 찾는 사유의 세계다. 대부분 사람은 한쪽 세계에만 머문다.
하지만 겸업 작가는 두 세계를 오가며 둘 다 이해하게 된다. 낮에는 현실을 몸으로 겪고, 밤에는 그것을 언어로 해석한다. 경험에서 나온 감각과 사유에서 벼려낸 문장이 만나면, 전업 작가도 쉽게 얻기 어려운 통찰이 생긴다. 현실과 이상, 책상과 현장, 직업과 정체성 사이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글을 구축하는 것. 바로 그 복합적이고도 치열한 고독이 겸업 작가만의 고유한 힘이다.
글쓰기는 어떤 결과물을 만드는 행위만은 아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삶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현실 속에서 남들은 보지 못하는 의미를 발견하겠다는 의지다. 우리는 직장에서 부딪히고, 관계 속에서 흔들리고, 일상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경험들이 글이라는 과정을 거치면 소모가 아니라 자산이 된다. 현실과 사유를 오가며 하루를 기록하는 사람은 ‘살아내는 사람’에서 ‘해석하는 사람’으로 변한다. 똑같은 하루라도 글을 쓰는 사람의 삶은 더 느리게, 더 깊게, 더 입체적으로 흐른다.
그래서 글쓰기는 고단한 삶에 덧붙이는 짐이 아니다. 오히려 삶을 지탱해 주는 또 하나의 축이 된다. 잘 쓰기 위해 거창한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을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라는 마음을 놓지 않는 일이다. 하루 한 문장이라도 세상을 붙잡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문장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이루게 된다.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단 한 번뿐인, 야생적이고도 소중한 삶을 무엇에 사용할 것인가?” 글쓰기란 이 질문에 매일 답을 써 내려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겸업 작가의 삶은 직업과 사유를 모두 끌어안은 채 더 밀도 있게 살아가겠다는 선택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이미 값지고 풍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