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읽어야 쓸 수 있다

by 배대웅

오늘날 책 읽기는 마치 오타쿠 같은 일이 되었다. 이미지가 텍스트보다 빨라진 세상에서 글을 따라가는 일은 피로하게 느껴진다. 스마트폰만 켜면 쇼츠 영상이 끝없이 밀려오고, SNS의 짧은 글에 ‘공감’이 빠르게 쌓인다. 이런 환경에서 몇 시간을 들여 종이책을 읽는 사람은 희귀하다.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 조사에 의하면 2023년 성인 10명 중 6명이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누군가 책을 읽고 있으면, 오히려 눈에 띌 지경이다. 이상한 쪽으로.


하지만 쓰려는 사람에게만큼은 독서가 여전히 필수다. 글쓰기 세계에서는 “읽지 않고서는 쓸 수 없다”라는 명제가 절대적으로 옳다. 왜 그런가?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축적된 사유의 데이터베이스를 끄집어내어 표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발한 영감이 떠올라도 그것 자체로는 글이 되지 못한다. 그 생각을 담아낼 문장의 재료는 결국 축적된 언어의 체계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이 내적 데이터베이스를 풍부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독서다.


이 문제를 좀 더 이론적으로 살펴보자. 철학자 폴 리쾨르는 독서를 시간, 서사, 해석을 따라가며 사유 능력을 확장하는 기술로 보았다. 글을 읽는 행위는 문장 너머의 구조를 포착하며, 더 긴 호흡으로 생각하도록 훈련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다. 이것은 인지언어학의 관점에서도 다르지 않다. 인간은 언어를 ‘모방 - 패턴 인식 – 전이’를 통해 습득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문장을 쓴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읽기 경험에서 체득한 문장 구조와 논리 전개의 방식을 변형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글쓰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미 익힌 패턴들을 새로운 질서로 재조직하는 능력에 가깝다.


쓰기의 기본 전제


결국 “독서를 많이 해야 글도 잘 쓴다.”라는 말은 단순한 조언을 넘어선다. 이는 인간의 사고가 어떻게 언어를 통해 작동하는지에 대한 과학적 진술에 더 가깝다. 글쓰기는 단순히 머릿속 생각을 글자로 옮기는 과정이 아니다. 언어가 먼저 틀을 만들고, 그 틀 안에서 생각이 자라난다. 마치 물이 그릇 모양대로 형태를 갖추는 것과 같다. 읽기는 바로 그 그릇의 모양을 바꾸고 확장하는 행위다. 그래서 많이 읽을수록 생각의 형태도, 글의 수준도 달라진다.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 읽기는 언어 패턴을 축적하고 재조합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언어학에서는 이를 용례 기반(usage-based) 접근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문장을 직접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접한 문장 구조들 사이의 규칙성을 추출해 문장을 재조립한다. 즉 읽기는 곧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적 가능성’을 확장하는 일이다. 훌륭한 글을 읽으면, 그 리듬·구성·논리의 흐름이 내부의 언어체계에 자리 잡는다. 이후 글을 쓸 때 자연스럽게 그 패턴들이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는 의식적으로 흉내 내는 것과는 다른, 더 깊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둘째, 읽기는 사유의 시간적 범위를 확장한다. 영상을 소비할 때 우리는 대개 몇 초 단위의 자극에 반응한다. 하지만 텍스트를 읽을 때는 문장 → 단락 → 전체 구조를 따라가며 긴 시간 축 위에서 의미를 유지해야 한다. 인지심리학자 매리언 울프가 “읽기는 인간에게 비자연적이지만, 바로 그 비자연성이 사고의 폭을 넓힌다”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서는 즉각적 이해를 넘어, 장기적 구조를 따라가는 훈련이다. 즉 ‘사고의 지적 지구력’을 길러준다. 이 지구력 없이는 장문의 논리 구성이나 서사의 복잡한 배열을 감당하기 어렵다.


셋째, 읽기는 사고 단위 자체를 재편성한다. 읽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생각을 단편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다. 반면 다양한 글을 읽은 사람은 머릿속에서 생각이 문장 혹은 구조의 단위로 형성된다. 즉 읽기는 사고를 문장화가 가능한 형태로 다듬고, 이 단위들이 연결되면서 글의 논리가 갖춰진다. 이렇게 볼 때 글을 쓰면서 경험하는 ‘막힘’의 상당수는 재능이나 감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문장을 만들어낼 사고 단위가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결론은 명확하다. “많이 읽는 사람이 쓰기도 잘한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인지 메커니즘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일견 글쓰기는 외부로 향하는 능력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읽기를 통해 내부에 구축된 언어 네트워크의 조합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선 읽지 않으면 쓸 수 없다. 또한 많이 읽지 않으면 오래 쓸 수 없으며, 깊이 읽지 않으면 논리적으로 쓸 수 없다. 이 간단한 진리는 글쓰기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창의와 논리가 자라는 토양


읽기의 효과는 글의 창의성과 논리성과도 직결된다. 둘 다 작가가 어떤 언어를 경험해왔는가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읽기는 취미를 넘어서 글쓰기를 둘러싼 환경이 된다. 어떤 언어에 자주 노출되느냐가 생각의 폭과 표현의 가능성을 좌우한다.


이 차이는 실제 글쓰기에서 금방 드러난다. 한두 권만 읽어본 사람에게는 멋져 보이는 문장이, 수백 권을 읽은 사람에게는 클리셰에 불과할 때가 많다. 다독가들은 “이 표현, 어디서 많이 봤는데?”, “이 전개 방식은 너무 뻔한데?” 하고 즉시 감지한다. 이미 노출된 언어 패턴이 많으니, 새로움과 식상함의 경계가 또렷하게 보인다. 읽기가 창의적 감식안을 길러주는 셈이다.


언어학자 스티븐 크라센도 이러한 맥락에서 “문체는 쓰기에서가 아니라 읽기에서 나온다”라고 말한다. 글을 쓰는 능력은 작가적 기교나 훈련보다, 오랜 시간 입력된 언어 패턴이 무의식적으로 전이되며 결정된다는 뜻이다. 소설가 스티븐 킹도 같은 이유로 1년에 70~80권의 책을 읽는다. 그의 말이다. “형편없는 책을 통해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한다는 걸 배우고, 좋은 소설 한 권을 통해 대학의 문예창작과에서 한 학기를 공부하는 것과 맞먹는 가치를 배운다.”


읽기는 논리 구성에서도 마찬가지 효과를 낸다. 책 읽기는 타인의 사고가 움직이는 방식을 한 걸음 뒤에서 관찰하는 일이다. 주장과 근거의 배치, 예시를 넣는 타이밍, 긴장을 조율하는 방식, 주제를 환기하는 기법 등이 반복 경험을 통해 인식의 구조로 저장된다. 그래서 많이 읽은 사람은 글을 쓸 때 “여기서 한 번 정리해야겠다”, “이 얘기를 먼저 해야 이해가 쉽겠다” 같은 판단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논리력도 재능이 아니라 축적된 관찰 경험의 결과다.


이렇게 많이 읽어야만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찾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역설적으로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본 사람만이 자신만의 목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이 방식이 좋다”, “이건 내 언어가 아니다”라는 선호가 선명해진다. 이 기준이 쌓일 때 글은 남의 말투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호흡을 갖는다. 반대로 읽지 않으면, 본인도 모르게 좁은 세계의 문장만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기반 공사다. 창의성, 논리, 개성은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모두 충분한 노출과 관찰, 비교와 선택의 과정에서 함께 자란다. 글쓰기를 잘하고 싶다면 문장을 쓰기 전에 먼저 세계를 넓혀야 한다. 그 세계는 읽기를 통해 만들어진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는 언제나 ‘읽기’다.


얼마나 많이 읽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얼마나 읽어야 글을 쓸 수 있을까? 정해진 답은 없다. 사람마다 습득과 활용의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권 읽으면 충분하다”라는 식의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원칙은 있다. 새로운 통찰이 있는 글은 축적된 지식 위에서만 나온다는 점이다. 요컨대 남들이 쓴 것을 많이 알아야 내 글에 담을 새로운 내용도 떠오른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그전에 남들이 뭐라고 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야 더 먼 풍경을 볼 수 있는 이치다. 글쓰기 세계에서 그 거인의 어깨란 ‘선배 저자들의 책더미’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철학자 강유원은 철학 공부를 시작할 때 철학사를 이 정도는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철학 공부에서 베끼는 것은 철학사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가 너무 두껍다면 얇은 것이라도 골라서 열심히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 … 철학 공부를 베끼기에서 시작하라니 의아해할 수도 있다. 철학사 따위는 무시하고 <내 철학>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베끼기 없이 <내 철학> 해봤자 남는 건 처치할 길 없는 거만과 아무런 맥락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현란한 단어들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조차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지껄이기 마련이고 남들이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자신의 철학이 그만큼 심오하기 때문이라는 도취에 빠지며 급기야는 도사가 된다. 이런 도사들은 기본적인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이 접하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읽은 몇 안 되는 책 속에 나온 말로만 설명할 뿐이며,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학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려 한다. 이런 도사는 철학 공부하는 사람 중에만 있는 건 아니다.

하여튼 철학사를 50번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죽 읽으면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알게 되어 맥락이 잡히는데 이쯤에서 그걸 가지고 뭘 해보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 아직 베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도 막아준다. 독학하는 사람은 어떤 분야의 책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기 마련이다. 역사적인 연관이나 주제의 관련성에 유의하지 않고 읽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 결과 아는 게 많아져서 장광설을 쏟아놓는다. 게다가 그들은 최근의 것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항상 시대에 맞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해 체계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하면, 장광설은 사라지고 말을 더듬게 되며, 그 점을 지적하면 원래 제대로 된 공부는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우격다짐을 하곤 한다. 언뜻 듣기에는 옳아 보이나 <학>이라는 게 <체계적 지식>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많은 사례를 들어가며 대중의 수준에 걸맞게 성교육을 잘한다 해도 그는 성의학자가 아니며, 자장면을 아무리 많이 팔았다 해도 그는 경영학자가 아니다. 어쨌든 베끼기를 거치지 않은 독학은 시간 낭비, 지적인 허영일뿐이다.”

- 강유원(1999), <내가 공부하는 방법> 중에서


여기서 말하는 ‘베끼기’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미 축적된 사유의 흐름을 통과해 보는 과정이다. 철학사를 여러 번 읽어보라는 권고는, 과거 사상가들의 논증, 개념, 문장이 만들어낸 거대한 지도 위에 먼저 올라서 보라는 말이다. 맥락 없는 독창성은 공허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새로운 말을 하고 싶다면, 우선 지금까지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원리는 철학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소설이든 칼럼이든 역사 논픽션이든 마찬가지다. 읽지 않고 쓰는 사람은 세계를 자기 눈앞에 놓인 좁은 경험만으로 해석한다. 반면 충분히 읽은 사람은 더 넓은 비교 집합을 갖는다. 어떤 표현이 상투적인지, 어떤 논리가 위험한지, 어떤 장면이 감동을 낳는지 판단할 토대가 생긴다. 결국 글을 잘 쓰는 능력은 ‘창조성’이 아니라 ‘분별력’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글을 쓰고 싶다”라는 바람은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글을 충분히 거쳐야만 가능하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정보를 쌓는 일이 아니라, 자기 언어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많이 읽을수록 서사와 표현의 선택지가 풍부해지고, 선택지가 많을수록 목소리는 선명해진다. 읽음의 양이 궁극적으로 글의 개성을 결정한다.


결국 얼마나 읽어야 하냐는 질문은 양을 묻는 것이 아니다. “내가 쓰려는 세계를 지탱할 만큼의 토양을 갖추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책 읽기가 지루하게 느껴질지라도, 글쓰기를 오래 이어가고 싶은 사람에게 그것보다 확실한 투자도 없다. 좋은 글은 쓰는 자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훨씬 이전에, 조용히 책을 넘기던 시간 속에서 이미 자라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직업도 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