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너무 많은 책이 있다. 반면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좋은 책만 고르고 골라 읽어도 평생 다 못 읽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꾸준히 책을 산다. 제목에 끌려서, 누가 좋다고 해서, 언젠가 써먹을 것 같아서. 그리고는 책장에 쌓아두기만 한다. 다들 그런 적 있지 않나? 책을 읽는다기보다, 책을 살 만큼 지적인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는 습관. 일본에선 이걸 ‘츠운도쿠(積ん読)’라고 부른다. 읽지도 않은 책이 점점 쌓이는 현상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읽지 않은 책이 눈에 밟힐 때마다 이상하게 죄책감이 든다. “언젠간 꼭 읽어야지” 그런데 그 ‘언젠가’는 도통 오지 않는다. 보통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야 한다.” 만약 한 페이지라도 건너뛰면, 왠지 부정행위 같다. 하지만 이제는 이 오래된 신화를 의심해 봐야 한다. 모든 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완독주의는 특히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 비효율적이다. 글쓰기의 재료를 얻으려고 모든 참고서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할까? 그러면 정작 글 쓸 시간은 부족해지고, 쓰고자 했던 열정마저 식어버린다. 글쓰기를 위한 독서는 이해보다 활용이 중요하다. 필요한 한 문장 또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건졌다면, 그 책은 제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하버드대학 학생들은 연평균 98권, 옥스퍼드대학 학생들은 103권의 책을 읽는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수치가 가능할까? 이 학생들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 않아도 ‘읽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400쪽짜리 책이라도 자신에게 필요한 50쪽만 읽었다면, 그 한 권을 읽었다고 계산에 넣는다. 완독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로운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필요한 지식을 효율적으로 습득하며 훨씬 많은 책을 접할 수 있게 된다. 문학평론가 피에르 바야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안 읽는 것도 능동적인 독서 행위의 하나다.” 그러니까 읽어야 할 책의 홍수 속에서 익사하지 않으려면, 선택적으로 읽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완독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독서의 초점도 달라진다. ‘이해’가 아닌 ‘채집’, ‘전체’가 아닌 ‘핵심’이 중심이 된다. 즉 중요한 건 “다 읽었느냐”가 아니라, “쓸 만한 문장 한두 줄이라도 건졌느냐”다. 그것이 내 글에 살아 있는 문장이 된다면, 그 책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이렇게 책에서 필요한 부분만 뽑아 읽는 독서 방법이 발췌독이다.
발췌독은 학자들도 그 효용을 인정한다. 철학자 모티머 애들러가 대표적이다. 그는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원제 : How to Read a Book)』에서 독서를 네 단계로 나눈다. 그중 두 번째인 조사 독서(Inspectional Reading)를 "책 전체를 훑고 핵심만 파악하는 독서"로 정의했다. 애들러는 이 단계를 책에 들어가는 입구를 여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머리말과 목차를 훑고, 일부 구절을 대강 읽어 책의 구조와 의도를 파악하라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책의 80~90%를 얻을 수 있다.
애들러는 마지막 단계인 통합 독서(Syntopical Reading)에서 이 접근을 더 확장한다. 어떤 주제를 탐구할 때, 책들을 비교해 읽으며 여러 관점을 취사선택하라는 것이다. 이때 핵심은 “책을 완전히 이해하려 하지 말라”는 데 있다. 그보다는 내가 쓰고자 하는 주제에 맞게 여러 저자의 논점을 추출하고, 서로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쓰는 것이 독서의 중심이 된다.
17세기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도 이 원칙을 강조했다. “어떤 책은 맛만 보고, 어떤 책은 삼키고, 소수의 책만 씹어서 소화하라.” 그러니까 책의 종류와 읽는 목적에 따라 다르게 접근하라는 말이다. 모든 책을 똑같이 정독해야 한다는 관념은 비효율적이다. 특히 실용서나 논픽션의 대부분은 “핵심만 맛보고” 넘어가도 충분하다. 지금 쓸 글에 필요한 영양소가 어느 부분에 들어 있는지만 재빠르게 채취하면 되는 것이다.
발췌독은 글쓰기에 직접 기여하는 효과도 있다. 유시민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논리적인 글쓰기를 위한 세 가지 훈련법을 제시했다. 텍스트 독해 → 요약 → 사유와 토론이다. 그는 강조한다. “많이 읽고 요약해 보는 과정이 글쓰기 실력을 키운다.” 여기서 말하는 요약은 발췌와 다르지 않다. 요약하려면 우선 전체 구조와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판단력과 핵심을 모으는 응축력이 필요하다. 즉, 발췌독을 제대로 해보는 것만으로도 글의 논리 구성력, 문장 압축력, 표현 재가공 능력을 함께 기를 수 있다.
무엇보다 발췌독은 독서의 부담을 줄여준다. 완독의 압박에서 벗어나면, 더 많은 책을 읽을 시간적·심리적 여유가 생긴다. 이렇게 쓸 거리를 찾는 일에 집중하면 독서가 훨씬 가볍고 명확해진다. 내가 먼저 목적을 정하고, 책은 그것을 위한 자원으로 다룰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독서와 글쓰기는 단절되지 않고 비로소 맞물린다. 발췌독은 그 연결을 가장 강력하게 만들어준다.
발췌독의 기본은 책을 감상하지 않고 탐색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목적에 맞는 조각만 골라 수집하고 재배열한다. 이 방식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까?
1) 책 한 권당 문장 세 개면 충분하다
책을 펼칠 때 이렇게 시작하자. “이 책에서 쓸 만한 문장 세 개만 건진다.” 이 목표는 단순하고, 명확하며, 강력하다. 처음부터 모든 걸 흡수하겠다는 생각은 필요 없다. 뇌는 수십 페이지를 이해하지 못해도, 한 문장은 기억한다. 그리고 잘 뽑힌 한 문장은 전체 글을 이끌 수 있다. 완독은 대부분 착한 소비자의 도덕 감정에서 비롯된다. “사놨으니 끝까지 읽어야지.” 하지만 작가에게는 딱히 친절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은 독후감을 쓰려고 산 게 아니다. 이 문장을 딱 내 글에 쓸 수 있겠다 싶으면, 그걸로 끝이다.
열 권에서 세 문장씩만 뽑아도 글 한 편은 완성된다. 요리는 손놀림보다 재료를 고르는 눈이 먼저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세 문장이면 충분하다. 단, 그 세 문장은 내 글의 뼈대에 직접 기여해야 한다.
2) 목차부터 분석하고 읽자
책의 목차는 저자가 짜놓은 지도와 같다. 발췌독의 첫걸음은 이 지도를 펼쳐보는 것이다. 목차를 쭉 읽어보면 책의 구조와 흐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어떤 부분에 내가 찾는 정보가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예컨대 전기나 회고록이라면, 굳이 주인공의 어릴 때나 학창 시절까지 읽을 필요가 없다. 내 글에 필요한 이벤트가 있었던 시기, 혹은 그 시대적 배경만 골라서 읽어도 된다. 역사 논픽션도 마찬가지다. 시대순으로 서술되어 있다면 필요한 시대만 읽으면 되고, 주제별로 구조화되어 있다면 연관이 있는 챕터만 읽으면 된다.
물론 정교한 논리가 축적되는 학술논문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유기적인 서사가 이어지는 소설은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순서를 뛰어넘는 독해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책장을 과감히 넘기며 이런 점들을 판단하며 읽자. “이 부분은 내가 쓸 글과 무관하니까 넘어가자”, “이 대목은 내 글의 도입부와 직결되겠네” 처음에는 이렇게 건너뛰며 읽는 것이 불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목차라는 지도를 참고해 길을 잃지 않으면 괜찮다. 발췌독은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하려고 고속도로를 타는 것과 같다.
3) 내 글의 어디에 써먹을지 메모하자
발췌독의 목적은 뽑아낸 내용을 내 글에 활용하는 데 있다. 읽다 보면 곳곳에서 이거다 싶은 문장이나 정보가 눈에 띌 것이다. 그럴 때는 밑줄만 긋지 말고, 책 여백이나 노트에 메모를 남겨두자. “이 문장은 내 역사 논픽션에 반례로 인용하면 좋겠다”, “이 격언은 결론부에 주제를 강조할 때 써야지” 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활용 방안을 적어놓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읽은 내용을 내 글의 재료로 직접 전환하는 훈련이 된다.
인상적인 문장을 발견했다면, 내 언어로 바꿔 써보는 연습도 필요하다. 완전히 다른 표현이 아니라도 괜찮다. 어순을 조정하거나, 똑같은 의미의 내가 선호하는 단어들로 바꿔보자. 그것만으로도 그 문장은 뇌리에 선명해진다.
4) 여러 책을 동시에, 조각처럼 읽자
발췌독은 여러 책을 동시에 훑는 독서다. 한 권에 몰두하기보다, 세 권에서 각각 한 단락씩 가져오는 게 더 낫다. 목적은 하나의 논지를 세우는 데 필요한 조각들을 모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퇴사 이후의 삶’에 대한 칼럼의 재료들을 모아보자. 어떤 책에서는 “퇴사 후 우울감”에 대한 데이터를 발췌한다. 또 다른 책에서는 “퇴사를 계기로 인생 방향이 바뀐 인터뷰”를 찾는다. 마지막 책에서는 “삶의 전환기에 읽힌 고전 문학 한 구절”을 메모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책에서 끌어온 정보와 문장을 재조합하면, 글이 훨씬 깊어진다. 한 권에서 얻은 것보다, 세 권에서 교차로 얻은 것들이 문장을 입체적으로 살린다.
이러한 요령을 통해 발췌독으로 실제 글을 쓸 수 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주제의 에세이를 쓴다고 가정해 보자. 흔한 자조 담론이나 감상적 교훈으로 흐르지 않도록, 이 주제에 입체적이고 철학적인 골격을 부여하고 싶다. 그러면 어떤 책들을 참고할 수 있을까?
먼저 조앤 K. 롤링의 2008년 하버드대학 졸업식 연설문을 활용할 수 있다. 여기에는 실패와 고통의 의미를 직설적으로 풀어낸 문장이 담겨 있다. “바닥까지 추락하고 나니 비로소 단단한 바닥이 되어 삶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이 문장은 칼럼의 도입부에 적합하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사례이면서, 고통을 인생의 토대로 재해석하는 강한 메시지가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을 인용하며 독자의 공감을 유도한 후, 더 철학적인 차원으로 전개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재료를 얻는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사회의 자기착취적 성과주의가 인간의 내면을 병들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특히 “고통은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해야 할 실존의 경험”이라는 관점을 보여준다. 이로부터 “현대인은 실패를 견디지 못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곧 무능이라는 낙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라는 논지를 세울 수 있다. 이 대목은 롤링의 개인적 서사에서 철학적 프레임으로 넘어가는 중간다리 역할을 한다. 칼럼의 중반부, 구조적 고통 회피에 대한 비판 부분에 이 문장을 배치하면 효과적이다.
마지막에는 철학 이론으로 깊이를 더 한다. 폴 리쾨르의 『타자로서 자기 자신』을 인용할 수 있다. 리쾨르는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서사를 통해 구성되는 존재라고 한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 말함으로써 자신을 해석하며, 그 이야기들이 축적될 때 비로소 '자기 이해'에 도달한다는 논지다. 이 관점을 적용하면, 실패나 고통 또한 자아를 구성하는 중요한 서사의 조각이 된다. 리쾨르의 말이다. “해석은 인간 이해의 조건이다.” 즉, 우리가 겪은 일을 해석하고 말로 풀어내야 그것이 비로소 ‘내 일’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리쾨르의 “자기 자신은 자신이 아닌 것으로부터 자신이 된다”라는 핵심 명제를 뽑아내 글을 매듭지을 수 있다. 실패의 경험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말로 구성할 때 비로소 나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조앤 K. 롤링의 회복 서사, 한병철의 상실 구조, 폴 리쾨르의 서사적 자아 개념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글 전체를 지지해 준다. 이 세 명의 글에서 일부만 뽑아도 도입부, 중간, 결말을 견고하게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이 발췌독의 힘이다. 발췌독은 단순한 재료 수집이 아니라, 새로운 논리와 문장을 창조하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