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성의로 버티는 중년의 외모 관리
나는 생각보다 외모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이 문장을 쓰고 나니 일단 변명부터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명품으로 온몸을 두르고 다니거나, 패션 잡지에 나올 법한 전위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최대한 무난하고 깔끔하게, 그리고 남들이 봤을 때 편안하게 느낄 만한 인상. 딱 그 정도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글 제목도 이렇게 붙였다. “외모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나는 외모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는지 어느 정도는 보여준다고는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외모’는 잘생김이나 예쁨 같은 타고난 조건이 아니다. 자기 관리와 생활 태도처럼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겉으로 드러난 결과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난다. 협업하거나, 토론하거나,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경험칙 하나가 생겼다. 외적으로 깔끔하고 정돈된 사람들은 대체로 일도 비슷하게 한다는 것. 자료가 정리되어 있고, 기한을 잘 지키고, 디테일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물론 과학적 근거 따위는 없다. 그냥 내 뇌피셜이다. 하지만 나름 십여 년 쌓인 데이터베이스에서 도출한, 꽤 그럴듯한 가설이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는 나도 모르게 상대의 차림새를 유심히 보게 된다. 평가하려는 게 아니라, 참고 자료 하나 더 확보하는 느낌이다.
내가 외모 관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단연 머리, 즉 헤어스타일이다. 솔직히 남자는 여자에 비해 스타일링이 비교도 안 되게 편하다. 남자 이미지의 80%는 머리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헤어스타일만 잘 관리해도 좋은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축복받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 머리숱이 정말 많다. 아주 그냥 새까맣다. 이건 100% 엄마에게서 물려받았다. 아마도 내가 타고난 재능 중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는 항목일 것이다. 이거 빼고 다른 재능은 거의 없다. 처음 가는 미용실에서는 예외 없이 “고객님 머리숱이 정말 많네요”라는 진심 어린 감탄을 듣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내게는 전국미용실협회에서 공인받은 머리숱부심이 있다.
현재 내 헤어스타일은 소위 말하는 가르마펌이다. 이 스타일을 유지한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특별히 예뻐서 하는 건 아니다. 일단 무난하고 어떻게 스타일링해도 실패 확률이 낮다. 20대에는 머리에 염색도 하고 브릿지도 넣곤 했었다. 30대에 직장인이 된 이후에는 앞머리를 내리는 단정한 스타일로 정착했다. 그러다 어느 날, 다니던 미용실의 실장님이 진지하게 권했다. “앞머리 내리니까 답답해 보여요. 가르마 타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때는 솔직히 좀 망설였다. 남자가 펌을 한다는 데 대한 괜한 거부감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이마가 만천하에 내놓을 만큼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네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서 옆동네까지 명성을 날리던 S뷰티 실장님의 컨설팅을 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 아내, 친구, 회사 동료들까지 입을 모아 잘 어울린다고 했다. 내가 봐도 인상이 훨씬 깔끔해 보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마 <도깨비>가 대히트했고, 주인공 공유가 딱 그 머리를 하고 나왔다. 그때부터 나는 “너 공유 머리 따라 했지?”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나도 나름 홍대병 환자인데, 졸지에 줏대 없이 연예인 따라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놔 이건 공유가 나를 따라 한 거라고!!" …라고 강변해 봐야 아무도 안 믿겠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잘 어울리고 대안도 없어서 아직도 유지 중이다. 그나마 요즘 공유는 그 머리를 안 해서 다행이다.
안경도 나에게는 중요한 아이템이다. 초등학교 이후 30년 넘게 안경을 쓰고 있다. 라식 수술이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할 생각이 없다. 내가 안경을 벗으면 사람들이 죄다 이상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게 느낀다. 안경은 이제 내 얼굴의 일부다. 라식보다 안경 이식 수술을 하고 싶다.
안경을 좋아하다 보니 이거 저거 다 써봤다. 폴스미스, 무게클래식, 키오야마토, 레이밴, 젠틀몬스터 등 국내외 여러 브랜드를 거쳤다. 그 과정에서 뼈아픈 진실 하나를 깨달았다. 나는 대두라는 사실이다. 좌우 얼굴 폭이 넓어서 웬만한 안경은 착용감이 빡빡하다. 대부분 패션 아이템이 그렇듯 안경도 슬림하고 얄상해야 멋있다. 그러나 내 몸뚱아리의 타고난 조건이 허락하지 않는다. 머리숱은 축복인데, 머리 크기는 저주다.
그래도 기를 쓰고 멋진 안경테를 시도해 봤다. 하지만 아침에는 괜찮다가도 오후만 되면 얼굴이 조여 오는 느낌이 들면서 안경을 벗고 싶어졌다. 결국 예쁘다고 환장하며 샀던 많은 안경을 처분해야 했다. 지금은 4개 정도만 갖고 있다. 그중 최애가 일본 후쿠이현의 하우스 브랜드인 무게클래식이다. 이건 정말 디자인, 내구성, 착용감에서 모두 완벽하다. 10여 년 전 산 모델을 아직도 쓰고 있고, 마음에 들어서 다른 디자인으로 하나 더 샀다. 또 하나 애용하는 안경은 올리버피플스의 '그레고리 펙' 모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옛날 배우 그레고리 펙이 즐겨 쓰던 둥근 뿔테 안경이다. 사실 이건 무게클래식보다 무겁고 오래 쓰면 피곤하다. 그래도 그 클래식한 멋 때문에 계속 쓰게 된다. 고딩 때 에릭 클랩튼의 <Layla> 언플러그드 라이브를 보고 뿔테 안경의 간지에 매료되어서, 늘 뿔테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나한테 어울리는 뿔테를 좀처럼 구하기가 어려웠다. 올리버피플스의 그레고리 펙은 나의 오랜 뿔테 안경 실패기에 종지부를 찍은, 최종템이라 할 수 있다.
옷은 비즈니스 캐주얼을 기본으로 한다. 직장이 리버럴한 분위기라 정장을 입을 일은 거의 없다. 겨울 기준으로 내 최애 브랜드는 솔리드옴므와 타임옴므 - 흔히 말하는 솔타시 라인 - 이다. 이 브랜드의 코트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얼죽코까지는 아니지만, 코트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기본 덩치가 있다 보니 패딩이나 아웃도어 점퍼를 입으면 몸이 너무 커 보인다. 롱패딩이라도 입으면 무슨 운동부원 같다(ㅠㅠ). 그래서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한 꿋꿋이 코트를 입는다. 특히 솔리드옴므의 오버핏 코트는 나의 체형적 약점을 모두 가려주면서, 훈남 스타일을 도와주는 고마운 아이템이다. 여기에 일본에서 겟한 랑방 머플러를 매주면, 얼굴의 못생김과 무관하게 훈남으로 보일 수 있다. 이 코트와 머플러 조합은 이제껏 산 패션 아이템 중에 가장 마음에 든다.
바지 쪽으로 가면 솔리드옴므 의존도가 최고조에 이른다. 비즈니스 캐주얼의 핵심 요소인 슬랙스의 생명은 핏이다. 그런데 내 하반신이 이상한 건지, 입기만 하면 어정쩡한 핏이 나와 버린다. 그러니까 펑퍼짐한 아재핏도 아닌 스키니한 양아치핏도 아닌, 적당히 딱 떨어지는 핏이어야 하는데, 그간 시도한 브랜드 중에는 이 조건에 맞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러다 코트를 구입하던 솔리드옴므에서 유레카를 외칠 수 있었다. 그곳의 슬랙스가 정말 내게 딱 맞는 핏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슬랙스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불문 솔리드옴므만 입는다.
이렇게 코트와 슬랙스를 솔리드옴므가 받쳐주니, 상의는 뭐 대충 입어도 된다. 메종키츠네, A.P.C., 아미, 폴로랄프로렌, 꼼데가르송, 라코스테 등의 니트, 셔츠, 카디건 등을 돌려 입는다. 이중 품질로 보면 메종키츠네 니트가 최강이다. 그러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메종키츠네는 원래 괜찮았던 브랜드인데, 40대 아재들이 너도나도 입어대면서 이미지가 떡락했다"라는 충격적인 댓글을 보고 요즘은 잘 안 입는다(…).
결국 내 옷은 압도적 1선발이 솔타시 라인이다. 비루한 월급쟁이 주제에 이 브랜드의 옷을 사 입는 건 부담도 된다. 하지만 "어중간한 옷 여러 개 사느니, 좋은 옷 하나 사서 오래 입는 게 낫다"라는 아내의 철학을 따라서 그냥 사서 입고 있다. 그리고 막상 입어보니까, 대부분 경우에서 그렇듯, 아내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느낀다.
신발에서는 비즈니스 캐주얼의 완성인 스니커즈만 신는다. 나는 구두만 신으면 영 불편한데, 정장을 안 입어도 되는 직장이라서 다행이다. 스니커즈로는 이 분야의 영원한 스테디셀러인 알렉산더맥퀸 오버솔, 아디다스 캠퍼스, 나이키 킬샷 등을 기본으로 신는다. 여기에 뉴발란스 575와 U204L도 좋아한다. 그 밖에도 대충 하얗고 깔끔한 스니커즈만 신으면 슬랙스와 매칭해 실패할 일은 없다.
이 정도면 외모에 ‘투자’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최소한의 신경은 쓰는 편이다. 이제 40대 중반이니 어디 가서 외모로 환영받을 나이는 아니다. 그래도 자기 만족도 있고, 무엇보다 딸 때문에 계속 신경 쓰게 된다. 요즘 아이들은 예민해서 부모의 외모가 창피하면 학교에 오지 말라고 한다더라. 다행히 딸이 아직은 “아빠가 제일 멋있어”라고 말해준다. 이 말의 유효기간이 길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신경을 쓴다.
작년에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난생처음 BMI 지수가 '정상'에 진입한 쾌거를 브런치에도 썼었다. 그 글에서 "이제 남친룩에 도전해 보겠다"라고 호기롭게 선언했었다. 하지만 역시나, 살은 조금만 방심해도 칼 같이 되돌아오더라. 1년 만에 원래 체중으로 거의 복귀해서 BMI가 다시 과체중이다(ㅜㅜ). 이렇게 날로 찌고 있는 살과 함께 요즘 고민은 도대체 뭘 어떻게 입어야 할지 헷갈린다는 점이다. 아재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공분의 대상인 영포티 소리도 듣기 싫다. 그 중간에서 균형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포티 세대지만 자기객관화를 못하는 영포티가 되기는 싫다. 그래도 담담댄스 작가님의 영포티 자가진단표에 의하면, 나는 다행히 영포티가 아닌 평범한 40대다. 다만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할지 고민이다. 하여튼 나이가 들수록 고려할 것도 많아진다. 외모지상주의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성의는 지키자는 목표는 여전히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