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와 프로젝트에 이름을 붙이는 기준
런던의 중심인 킹스크로스역. 대륙과 영국을 연결하는 유로스타가 도착하고, 여행객과 출퇴근 인파가 늘 뒤엉키는 혼잡한 공간이다. 역 주위에는 호텔, 상점, 사무실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붉은 벽돌과 유리로 된 거대한 건물이 유독 눈에 띈다. 얼핏 보면 국립미술관이나 대기업 본사 같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면 간판에 이렇게 적혀 있다.
프랜시스크릭연구소(The Francis Crick Institute)
연구소다.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의 생명과학 연구소. 위치가 뭔가 낯설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연구소 풍경은 대개 이렇다. 도시의 외곽, 숲과 들판, 한적한 캠퍼스. 연구자는 이러한 고요함을 배경으로 사색하고 실험한다. 그런데 이곳은 정반대다. 런던에서 가장 시끄럽고,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 한복판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랜시스크릭연구소는 애초에 “기존 연구소와 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하겠다”라는 선언으로 출발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영국을 대표하는 대학, 정부 부처, 연구소, 재단 등 6개 기관이 함께 운영한다. 연구 주제도 특정 분야로 고정되지 않는다. 유전체, 암, 감염병, 신경과학이 한 건물 안에서 뒤섞인다. 그러니까 프랜시스크릭연구소는 국가 차원의 생명과학 허브를 만들려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런던에서 가장 사람이 모이기 편한 중심가에 건물을 지은 것 역시 실험의 일환이었다.
이 초대형 프로젝트의 간판으로 선택된 이름이 프랜시스 크릭이다. 크릭은 현대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연 거인이다.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규명했다. 이 발견은 생명현상을 화학과 물리학의 언어로 설명하는 기점이 된다. 그 결과로 분자세포생물학이라는 거대한 학문 분야가 탄생할 수 있었다. 현대생명과학은 이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렇다면 프랜시스크릭연구소는 위대한 과학자를 기념하려고 세운 곳일까? 그렇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영국이 이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기념에만 있지 않다. 이 연구소는 현대생명과학이 무엇을 기준으로 작동해야 하는지를 상징한다. 정보로서의 생명, 구조로서의 유전, 실험과 이론의 결합. 크릭이라는 과학자 이름은 이 기준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다.
이쯤에서 질문이 생긴다. “과학자의 이름을 연구소나 프로젝트에 붙이는 관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질까?”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다양한 문화권에서 펼쳐진 과학의 전통을 살펴봐야 한다.
근대과학에서 과학자 이름을 연구소에 붙인 최초 사례로는 영국의 캐번디시연구소가 꼽힌다. 이곳은 대학 내부의 연구소로서 우리가 흔히 아는 국가 연구소와는 형태가 달랐다. 1874년 케임브리지대학의 실험물리학 교실로서 출범했다.
캐번디시연구소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 “헨리 캐번디시라는 위대한 과학자를 기리려고 붙였겠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 이름에는 헨리 캐번디시뿐 아니라, 케임브리지대학 총장이자 연구소 건립 자금을 낸 데번셔 공작의 ‘캐번디시’도 함께 들어 있다. 즉, 이 연구소는 처음부터 과학자와 후원자의 이름이 결합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헨리 캐번디시가 어떤 과학자였느냐”다. 그는 스타 과학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화려한 이론을 발표하지도 않았고, 학계를 떠들썩하게 한 인물도 아니었다. 대신 실험의 정밀성과 측정의 정확성에 집착했다. 지구의 밀도를 재고, 기체의 성질을 끝없이 확인하던 학자다.
케임브리지대학이 이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캐번디시는 위대한 발견이 아니라, 과학을 수행하는 방법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집요한 관찰과 정확한 실험을 통한 새로운 지식의 발견으로 요약된다. 즉 캐번디시연구소라는 간판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과학을 연구한다.”
이곳이 이후에 어떤 곳이 되었는지는 과학사가 대신 말해준다. 전자, 중성자, DNA 구조 등 인류의 운명을 바꾼 발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이 이름은 대중문화에서도 중요하게 조명된다. 영화 <오펜하이머> 초반부에 등장하는, 젊은 대학원생 오펜하이머가 주눅 들어 있는 공간. 이론가였던 그는 캐번디시연구소의 실험물리학 전통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렇듯 오펜하이머도 쉽사리 기를 못 폈던 연구소로서, 캐번디시의 위엄은 스크린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
결국 ‘캐번디시’는 성과가 아니라, 그 성과를 가능하게 한 방법의 이름이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과학자 이름이 연구소에 붙으려면, 그저 유명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이름이 하나의 연구 규범이나 철학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영국이 이 전통을 적극적으로 확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중반 미국이 부상하기 전까지 영국은 과학의 중심이었다. 실제로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어니스트 러더퍼드 등 인류문명의 올스타급 과학자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영국은 연구소 간판에 그 이름들을 남발하지 않았다. 과학을 개인의 업적으로 과도하게 환원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2015년 설립된 프랜시스크릭연구소는 오히려 영국적 전통의 바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과학자의 이름을 쓰지 않았던 영국이 프랜시스 크릭을 소환한 이유는 당시의 제도적 상황과 연관이 깊다. 이 연구소는 단일 대학이나 연구소 체계를 벗어나는 조직이었다. 즉 여러 기관을 묶어 하나의 생명과학 허브를 만들기 위해서는, 평범한 명칭을 뛰어넘는 강력한 상징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프랜시스 크릭이라는 거장의 이름이었다. 이는 19세기말 캐번디시연구소가 그랬듯, 연구소가 따르려는 규범을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는 과학자의 이름을 쓰는 것을 조심스러워한 영국적 전통의 복귀 선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학자의 이름을 쓰는 전통을 가장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에서 과학자 이름은 곧 제도 설계의 핵심 철학이었다. 그 배경에는 뚜렷한 역사적 이유가 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독일은 과학과 권력의 결탁이 어떤 비극을 낳는지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래서 전후 독일 과학은 연구를 재개하는 것을 넘어, 과학의 정당성을 다시 세워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때 독일의 해법은 과학자 이름을 ‘이상형’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 독일 과학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카이저빌헬름협회는 제2차 세계대전 패배와 나치 부역에 대한 책임으로 해산 위기에 처해 있었다. 결국 1948년 이름을 막스플랑크협회로 바꾸며 재출범에 성공했다. 막스 플랑크는 양자역학의 시대를 연 거장일 뿐만 아니라, 정치에 맞서 과학의 자율성을 지키려 한 독일 과학계의 원로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내건 신생 협회는 과학 연구의 순수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연합군도 노벨상 수상자의 이름을 딴 조직이라면 전범 협력의 그림자를 지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과학자의 이름으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연구 문화를 정립하는 독일식 전통이 시작되었다.
이후 독일에는 저명한 과학자의 이름을 내건 과학 공동체들이 잇따라 생기게 된다. 1949년 창립된 프라운호퍼협회는 광학기술의 개척자인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의 이름을 땄다. 그는 19세기 뮌헨 출신의 기술자로서 과학과 공학을 겸비한 실용 정신의 전형으로 불린다. 프라운호퍼협회도 이러한 응용기술 연구에 특화되었다. 1995년 출범한 헬름홀츠협회는 독일 최대의 과학기술 연구소 연합이다. 물리학과 의학 등 다방면에 업적을 남긴 헤르만 폰 헬름홀츠를 조직의 이름에 새겼다. 즉 헬름홀츠라는 조직명에는 과학의 다양성과 이론-실용의 융합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밖에 인문사회부터 자연과학까지 광범위한 연구기관들의 모임인 라이프니츠협회 역시 20세기 후반에 탄생했다. 이름의 기원은 18세기에 보편학자로서 명성을 날린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다. 그는 철학자이자 수학자로서 전 분야에 족적을 남겼으며, 그 이름은 이 협회의 다학제 성격을 함축한다.
이렇듯 독일의 전후 연구기관 명명은 정치색을 배제하고 과학적 가치와 전통을 상징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존경받는 과학자의 이름은 바로 이 지점에서 활용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나치 시대의 유산을 청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과학 연구의 자율성과 공공성을 강조하려는 가치 지향적 선택이기도 했다. 즉 독일에서는 연구기관의 이름이 곧 기관이 따르는 이념을 담고 있다. 막스플랑크협회는 순수기초연구, 프라운호퍼협회는 산업응용연구, 헬름홀츠협회는 대형융합연구, 라이프니츠협회는 학문의 범용성을 지향한다는 식이다.
미국으로 오면 풍경이 또 바뀐다. 미국에는 과학자뿐 아니라 정치인, 관료, 기부자의 이름을 딴 기관들이 있다. 이는 미국의 과학이 국가 지원과 사적 후원 모두에 힘입어 발전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과학자의 이름을 쓴 사례로는 어니스트 로런스와 엔리코 페르미가 있다. 두 사람 모두 20세기 물리학 대격변기를 이끈 석학들이었다. 또한 맨해튼 계획의 주역으로서 미국의 세계패권에 공헌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래서인지 에너지부 산하 3개의 국립연구소 -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 로런스리버모어국립연구소,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 - 가 이들의 이름을 쓴다. 연구소뿐만 아니다. 에드윈 허블(허블우주망원경),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찬드라 X선 천문대)처럼 우주 탐사 시설에 쓰는 사례도 있다.
과학자 못지않게 정치가와 관료의 이름도 눈에 띈다. 항공우주국(NASA)에는 대통령의 이름을 딴 우주센터가 두 개나 있다. 아폴로 11호와 컬럼비아 우주왕복선이 발사된 플로리다의 케네디우주센터, 유인 우주비행을 총지휘하는 휴스턴의 존슨우주센터다. 영화 <아폴로 13>을 상징하는 명대사 “휴스턴, 문제가 생겼다(Houston, we have a problem)”의 휴스턴이 바로 존슨우주센터의 지상관제실을 가리킨다. 덕분에 휴스턴이라는 지명은 미국에서 NASA 그 자체로 인식된다. 오하이오에도 우주비행사 출신으로 상원의원까지 지낸 존 글렌의 이름을 딴 글렌연구소가 있다. 2021년 발사된 차세대 우주망원경에는 NASA 2대 국장인 제임스 웹의 이름이 붙었다. 웹은 과학과는 거리가 먼 국무부 관료 출신으로서 아폴로 계획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은 민간의 후원자다. 미국 과학에 일찍부터 발달한 기부의 전통이 이러한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20세기 초 록펠러의학연구소(존 D. 록펠러), 카네기연구소(앤드루 카네기)는 그 고전적 사례다. 1953년 설립된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는 비행사, 항공기 제작자, 영화감독으로서 ‘가장 미국적인 부자’로 꼽혔던 하워드 휴즈의 막대한 자산이 바탕이 되었다. 휴즈는 거대한 연구소를 세우는 대신 개별 과학자들에게 장기·안정적인 연구비를 지원하는 새로운 모델을 확립했다. 2004년 MIT와 하버드대학이 합작한 생의학연구소는 1억 달러를 낸 일라이 브로드 부부의 이름을 따서 브로드연구소로 명명되었다.
요컨대 미국에서 연구소와 프로젝트의 이름은 정치적 결단과 경제적 후원을 함께 기념한다. 누가 예산을 통과시켰는가, 누가 국가 프로젝트로 만들었는가, 누가 실패의 책임까지 떠안았는가. 연구소와 프로젝트에 붙은 이름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것은 과학을 가볍게 여긴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미국은 과학을 ‘천재 개인의 업적’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감당한 선택’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이름은 영광의 표식이 아니라 책임의 서명에 가깝다. 이렇게 보면 아폴로 11호의 성공에 엄청난 기여를 한 로켓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의 이름이 NASA에 없는 이유도 설명된다. 업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미국에서 이름은 과학적 성과와 함께 도덕적 영예와 정치적 정당성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연구소나 프로젝트 이름에 과학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직 국가적으로 기리거나 그 정신을 본받을 만큼 뛰어난 과학자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름이 ‘세종’이다. 남극 세종과학기지, 세종과학펠로우십 등이 대표적이다. 과거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의 기획 단계에서도 세종국제과학원이라는 연구기관명이 고려된 적이 있었다.
물론 세종대왕이 과학기술을 장려한 위대한 통치자인 것은 맞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현대 인류문명을 성립시킨 근대과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인물은 아니다. 세종 시대의 성과인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은 전근대 왕실 과학의 산물이다. 앞서 살펴본 사례에서 드러나듯, 과학자의 이름은 대체로 근대과학의 맥락에서, 국제과학공동체가 성과를 공유한다는 기준이 있다. 그런데 세종은 두 가지 기준에서 모두 어긋난다. 즉 한국인에게는 위대하지만, 세계 과학사에서 ‘Sejong’의 보편적 기여를 인정할 과학자들은 거의 없다는 의미다.
이러한 세종의 반복적 소환은 한국이 아직 세계 과학사에 내세울 이름을 찾지 못했다는 현실을 에둘러 가리킨다. 서양 과학에 대한 콤플렉스라는 표현이 과하다면, 최소한 과학사의 시간 격차를 상징으로 메우려는 조급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시간을 단축하지 못하고, 상징은 성취를 대신할 수 없다. 한국이 서구보다 훨씬 늦게 근대과학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어떤 명명으로도 바뀌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태도다. 서구 국가들처럼 연구소나 프로젝트에 꼭 인물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는 없다. 영국, 독일, 미국에서도 과학자의 이름은 목표가 아니라 사후적 정리였다. 충분한 성과가 쌓인 뒤에야, 그것을 가장 잘 집약할 수 있는 이름이 따라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누구의 이름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어떤 과학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편이 더 정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