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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스와 오펜하이머의 엇갈림

과학과 정치의 기묘한 함수 관계

by 배대웅

1942년 가을, 미 육군 공병대의 레슬리 그로브스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바꿀 원자폭탄 개발 계획 - 훗날 ‘맨해튼 계획’으로 알려질 - 의 과학 분야 책임자를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 과학자들이 총동원될 이 계획의 리더로 두 명의 후보가 거론되었다. 바로 어니스트 로런스와 로버트 오펜하이머. 둘 다 UC 버클리의 물리학 교수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로런스는 193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실험물리학의 거장이었다. 최초의 입자가속기인 사이클로트론이 그의 작품이었다. 또한 방사선연구소를 설립하고 운영한 행정 경험도 풍부했다. 반면 오펜하이머는 이론물리학의 천재로 통했지만,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다. 게다가 이론가라서 실험이나 공학 지식도 부족했고, 조직 운영 경험은 전무했다. 무엇보다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던 경력이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맨해튼 계획은 최고 수준의 보안이 요구되는 군사 기밀이었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의 아내, 연인, 동생은 공산주의자였고, 자신도 보안 당국으로부터 상당한 의심을 받고 있었다.

군 최고위층에서는 노벨상 수상자이자 조직 장악력이 검증된 로런스를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그로브스는 예상 밖의 결정을 내렸다.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를 낙점한 것이다. 그와의 대면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이 결정적이었다. 1942년 10월 버클리에서 만난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에 수반될 문제들을 폭넓게 숙고하고 있었다. 플루토늄과 우라늄 분리, 폭축렌즈 설계 등의 이론적 난점을 명확히 파악했고, 외딴 지역에 과학자들을 모아 연구를 시킨다는 구상까지 제시했다.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의 통찰력과 카리스마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결국 그를 임명하면서 모든 약점을 자신이 책임지고 커버해 주겠다고 장담했다. 실제로 그로브스는 보안 당국이 오펜하이머의 인가를 꺼리자, 개인 권한으로 통과시켜 버렸다.

트리니티 핵실험 현장을 둘러보는 그로브스와 오펜하이머(가운데). 그로브스는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오펜하이머를 기용했지만, 그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했다.


전쟁 승리의 두 주역


오펜하이머에 대한 의구심은 얼마 안 가 말끔히 사라졌다. 맨해튼 계획의 본부였던 로스앨러모스연구소에 부임한 오펜하이머는 예상 밖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동료들은 오펜하이머가 폭탄 제작은 물론 조직 운영까지 능수능란하게 해내자 깜짝 놀랐다. 한 과학자는 “오펜하이머가 그토록 뛰어난 조정자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야말로 과학자들과 군인들이 하나의 목표로 움직이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회고했다. 한스 베테, 에드워드 텔러, 리처드 파인먼 등 개성 강한 천재들이 충돌할 때마다 그는 무리 없이 갈등을 해결했다. 또한 군인과 과학자라는 전혀 다른 생리의 두 집단을 절묘하게 융화시켰다.

로런스도 자신의 장기를 살려 버클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의 방사선연구소는 우라늄-235를 분리하는 전자기적 방법(칼루트론 공정)을 개발하여 폭탄의 재료 확보에 기여했다. 우라늄-235 동위원소는 자연계의 천연 우라늄에서 불과 0.7%만 존재한다. 나머지 99.3%인 우라늄-238과는 화학적 성질이 거의 같아서, 1.26%에 불과한 미세한 질량 차이를 이용해 물리적으로만 분리해야 했다. 따라서 우라늄-235의 대량 추출은 당대 과학이 직면한 가장 까다로운 공정이었다. 맨해튼 계획 3년 내내 생산된 총량이 60kg 남짓에 불과했다. 이렇게 어렵게 모은 우라늄-235는 ‘리틀보이’ 한 발의 제작에 몽땅 쓰였다. 그러니 로런스가 개발한 장치 없이는 원자폭탄을 완성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마침내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맨해튼 계획은 완벽하게 목표를 달성했고, 그것으로 전쟁도 끝났다. 이 순간 오펜하이머와 로런스는 과학으로 승리를 이끈 주역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영웅 서사를 넘어서는 깊은 유대가 있었다. 버클리에서부터 쌓아온 우정은 전쟁 중에도 돈독했고, 그것은 같은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동지적 연대로도 발전했다. 로런스가 둘째 아들에게 ‘로버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사실은 그 친밀감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다. 우정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로런스와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얻자마자 엇갈린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꼭 개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과학자와 정부 사이에는 새로운 관계 설정이 요구되었다. 로런스와 오펜하이머는 과학계 대표로서 이 문제에 대한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상반된 신념이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동지적 관계와 학자로서의 위상에도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맨해튼 계획의 거점들(위쪽)과 사이클로트론을 살펴보는 로런스와 오펜하이머(아래쪽). 두 사람은 버클리와 로스앨러모스에서 각자 프로젝트를 총괄하며 맨해튼 계획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로런스, 국가 안보를 우선한 공화당의 과학자


로런스는 반공과 국가 안보를 중시한 공화당 성향의 과학자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과학이 미국의 세계 패권에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특히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누구보다 앞서서 수소폭탄 개발을 촉구했다. 이때 원자력위원회의 자문위원장이었던 오펜하이머는 불필요한 군비경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로런스는 군부와 의회를 상대로 직접 로비를 벌였다. “지금 당장 슈퍼폭탄을 만들지 않으면 미국은 패권을 잃는다” 결국 1950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수소폭탄 개발을 승인했다. 여기에는 로런스와 텔러 같은 강경파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결정적이었다. 오펜하이머가 동료 제임스 코넌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숙련된 홍보인 두 명(로런스와 텔러)이 여론의 풍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정치 활동도 주저하지 않았다. 로런스는 1952년 대선에서 연합군 총사령관 출신이자 공화당 후보였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지지하고 선거운동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과학자가 특정 정당 후보를 지지하는 사례는 드물었다. 이를 계기로 로런스는 ‘공화당의 과학자’ 이미지를 확고히 굳혔다. 한때 뉴딜 정책을 추진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투표한 적도 있었으나, 그는 기본적으로 보수 성향이었다. UC 버클리에서는 좌파 성향 학생들과 노조 결성을 시도한 교수들 - 오펜하이머도 포함해서 - 을 못마땅해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에피소드는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도 다뤄진다.

이처럼 국가 안보 최우선 노선을 걸었던 로런스는 공화당 정부의 총아로 자리매김했다. 1952년에는 그의 제안으로 캘리포니아 리버모어에 두 번째 핵무기 연구소를 설립하는 안이 승인되었다. 기존의 로스앨러모스연구소가 감당하지 못하는 무기 개발 수요를 분담하자는 취지였다. 로런스는 이 새로운 연구소 설립에 군과 의회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이로써 버클리의 방사선연구소와 더불어 두 개의 국립연구소가 그의 손에서 태어났고, 자신도 두 연구소의 설립자이자 소장이 되었다. 로런스는 이 연구소들이 추진한 국방과학 연구에 큰 애정을 쏟았고, 정부도 아낌없는 재정 지원으로 화답했다.

1958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로런스는 미국 과학계의 거인으로 남았다. 그는 생전의 업적으로 이미 명성을 떨쳤지만, 사후에 더 큰 영예를 얻게 된다. 캘리포니아의 두 국립연구소가 그를 기려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 로런스리버모어국립연구소로 이름을 바꿨기 때문이다. 또한 1961년 발견된 주기율표 103번 원소도 로렌슘으로 명명되었다. 오늘날 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어떻게든 그의 이름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듯 로런스는 과학자가 정치와 협력하여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보여주었다.

로런스는 과학을 정치의 협력 파트너로 만들었다. 그 대가로 두 개나 되는 국립연구소(로런스버클리, 로런스리버모어)의 설립자가 될 수 있었다.

오펜하이머, 민주당과 공명한 좌파 자유주의자


반면 오펜하이머의 행보는 로런스와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그는 과학이 인류에 미칠 영향과 책임에 대해 사색을 거듭했고, 전후 미국의 핵정책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사실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계획 이전부터 좌파 성향이 뚜렷했다. 대학 시절부터 좌파 지식인들의 모임에 나갔고, 스페인 내전에 반파시즘 성금을 내기도 했다. 1930년대 미국의 정치 지형에서 이는 민주당의 뉴딜 자유주의 진영과 공명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루스벨트 정부의 뉴딜 정책을 설계한 헌법학자 펠릭스 프랭크퍼터와 가까웠다. 그리고 그와 함께한 자유주의 지식인 네트워크의 일원으로서 국제주의, 합리적 규제, 민주적 통제의 가치를 공유했다. 요컨대 오펜하이머는 과학자이면서 시대의 정치적 개혁에 동참한 지식인이었다. 그가 공화당이 주도한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하고, 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의 국제적 핵 관리와 군비 규제 구상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전쟁 동안 좌파적 소신은 제쳐둔 채 국가에 헌신했다. 그의 말이다. “파시즘에 맞선다는 대의는 어떠한 정치적 이견보다 우선한다” 그는 맨해튼 계획을 성공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종전 후 미국 과학계를 대표하는 스타로 떠올랐다. 신문과 잡지 표지에 그의 사진이 실렸고, “과학과 지성의 영웅”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정부도 그를 여러 요직에 기용했다. 우선 1946년 신설된 원자력위원회 - 맨해튼 계획의 성과를 민간으로 이전하기 위한 - 의 초대 자문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밖에도 국방, 외교 등 원자력 관련 40여 개 정부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대학의 평범한 교수에서 거물 과학 관료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과학자에 대한 사회의 존경과 신뢰가 커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광의 시기는 길지 않았다. 핵무기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양심과 소신이 점차 권력자들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1945년 10월, 백악관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면담한 일화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자리에서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위력을 목격한 소회와 함께 “제 두 손에 피가 묻은 것만 같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트루먼은 몹시 불쾌해하며 측근에게 “피는 내 손에 묻은 거지, 저 사람 손엔 반도 안 묻었어. 앞으로 저 인간은 다시 내 눈앞에 들이지 마”라고 지시했다. 트루먼은 오펜하이머가 구상한 ‘핵무기에 대한 국제적 통제’ 방안을 애초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통령과의 관계가 삐걱거리면서, 오펜하이머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드리웠다.

1950년대가 되자 미국은 매카시즘으로 상징되는 극단적 반공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는 오펜하이머에게 결정적인 시련으로 다가왔다. 수소폭탄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회의적 태도는 이미 보수 진영에게 단단히 찍힌 상태였다. 여기에 그의 오랜 좌파 이력까지 부각되었다. 마침내 1954년, 그의 국가 최고 기밀 등급 취급 여부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다. 매카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분위기에서 이 청문회는 처음부터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실제로 과거 동료였던 이들까지 속속 등을 돌렸다. 수소폭탄 개발의 주역 텔러는 “오펜하이머를 높이 평가하지만, 그가 국가 안보 정책에 지속 관여하는 것은 불안하다”라고 증언했다. 로런스는 중병으로 출석하지는 않았지만, 검사와 인터뷰한 내용이 제출되었다. “오펜하이머가 다시는 정책 결정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막역한 친구이자 동지였던 로런스마저 국가 안보라는 미명으로 그를 등진 셈이다.

결국 오펜하이머의 보안 인가는 완전히 박탈되었다. 그리고 모든 정부 직책에서 사실상 쫓겨났다. 이는 그가 쌓아온 과학 관료로서의 화려한 경력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이후에는 민간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를 이끌며 기초연구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한때 국민의 존경을 받던 스타 과학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언론에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은둔의 학자로 변모했다. 다만 정부는 오펜하이머를 완전히 내치지는 못했다.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발의로 오펜하이머는 에너지부가 수여하는 엔리코페르미상을 받았다. 수상 이유는 “핵무기 개발에 기여한 과학적·행정적 지도력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개척에 대한 공헌”. 이는 1954년의 가혹한 결정 이후 정부가 명예 회복을 시도한 제스처로 해석되었다.

TIME 표지 인물이 된 오펜하이머. 왼쪽은 보안 인가 청문회가 있었던 1954년, 오른쪽은 원자력위원회 자문위원장이었던 1948년. 그의 영광과 시련의 시대들을 상징한다.

불명예는 한참 뒤에야 회복되었다. 2022년, 그의 보안 인가 박탈이 위법과 편견에 따른 잘못이었다며, 이를 철회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정부 발표문은 “오펜하이머가 조국에 충성을 바쳤고 그에 대한 사랑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평했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국가와의 화해가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국립연구소나 연구 프로그램에 붙여지는 일은 끝내 없었다. 그렇게 그는 로런스처럼 추앙받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비극적 인물로 남았다. 오펜하이머의 전기 제목이기도 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이를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불을 훔친 대가로 고통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는 과학으로 인류를 진보시킨 대가를 온몸으로 치러야 했다.

과학과 정치, 협력 또는 충돌


이렇게 로런스와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상반된 길을 걸었다. 이를 단순히 개인의 선택에 따른 우연한 결과로 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전쟁으로 긴밀해진 과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모델을 상징한다.

로런스는 과학자의 정치 참여가 얼마나 막강한 성과를 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과 경영 능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국책 연구시설들을 일구어냈다. 또 냉전 기간 미국의 핵무장 및 군사기술 개발에 앞장섰다. 정부의 필요에 과학이 부응하는 성공적인 파트너십이었다. 정부는 아낌없이 지원했고, 과학자는 원하는 연구를 추진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과학자는 명예와 권위를 얻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러한 모델은 미국 과학기술정책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58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설립된 항공우주국(NASA),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 등은 국가적 목표를 위해 과학연구를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상징이 되었다. 대학도 이 흐름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MIT, 칼텍, 스탠퍼드 같은 대학들은 정부의 국방·우주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세계적 연구 거점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과학과 정부가 긴밀히 맞물리는 체계야말로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한 비결이었다. 1940~50년대 로런스가 보여준 ‘과학-정치 협력’의 전형이 제도화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오펜하이머는 그와 반대의 교훈을 준다.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국가에 충성을 다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하자, 과학자는 다시 인류 보편의 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핵무기를 국제적으로 통제하고 군비경쟁을 억제하려 했으며, 과학이 인류를 위해 쓰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냉전이라는 현실 앞에서 이런 태도는 “국익에 반하는 위험한 이상주의”로 오인되었고, 급기야 국가로부터 배척당하는 아이러니를 맞았다.

사실 이러한 딜레마는 오펜하이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시대 과학자들 대부분이 같은 갈림길에 서 있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대표적이다. 그는 나치의 위협을 막기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 정확히 말하면 레오 실라르드의 초안에 서명만 했지만 - 이것이 맨해튼 계획의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원자폭탄의 위력을 확인하고는 “내 생애 최대의 실수”였다고 후회했다. 아인슈타인은 평생 어떠한 정부 관련 업무도 맡지 않았고, 민간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남아 이론연구에만 몰두했다. 엔리코 페르미의 태도도 비슷했다. 시카고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로를 만든 주역이었지만, 전쟁 후 “우리는 악마와 협상한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씁쓸한 농담을 남겼다. 닐스 보어는 아예 한발 더 나아갔다. 핵무기는 특정 국가의 독점물이 아닌 국제적인 관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맨해튼 계획의 막내 그룹에 속했던 리처드 파인먼조차 로스앨러모스의 경험을 회고하며, 전후에는 군사 연구와 거리를 두려 했다.

이렇듯 과학자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양심과 국가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오펜하이머 역시 나치에 맞서야 한다는 믿음으로 계획을 이끌었지만, 전후에는 아인슈타인이나 보어에 가까운 회의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변화는 그저 개인적 성찰에만 그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공적 발언과 자문 활동을 통해 핵무기 국제관리나 군비 규제 같은 의제를 꾸준히 제기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냉전의 공포가 최고조였던 시기에, 이런 목소리는 국가 전략과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오펜하이머는 로런스와는 정반대의 운명을 마주하게 되었다.

1931년 뉴멕시코 목장에서의 두 사람. 친구이자 동지였으나, 정치적으로 상이한 신념을 택함으로써 전혀 다른 결말을 맞았다.

역사는 때로 잔인한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로런스와 오펜하이머의 사례도 그렇다. 절친이자 동지였던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두 사람이 역사에 기록되는 방식을 전혀 다르게 만들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행보는 과학과 정치의 관계를 다층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과학자는 국가와 협력하여 거대한 성취를 이루기도 하고, 반대로 국가에 맞서 양심을 지키다 희생되기도 한다. 오늘날의 과학도 여전히 군사, 보안, 산업 등의 국익과 깊이 맞물려 있다. 또 한편으로는 기후위기나 생명윤리처럼 인류 공동의 문제에 목소리를 내야 하는 상황에도 놓여 있다. 그래서 로런스와 오펜하이머의 엇갈림은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오래전 그들의 선택과 갈등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과학과 정치의 기묘한 함수 관계는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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