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과 중력 사이의 비밀 통로
1942년은 아이작 뉴턴 탄생 300주년이었다. 이에 런던 왕립학회는 대대적인 기념 강연을 준비했는데, 초청 연사가 의외였다. 바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그는 20세기 경제학을 대표하는 천재였으나 물리학 전공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배경을 알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케인스는 뉴턴의 케임브리지대학 후배이자 광적인 뉴턴 덕후였기 때문이다. 이미 20대 시절부터 『프린키피아』를 찾아 고서점가를 뒤졌던 전력이 있었다. 1936년에는 소더비 경매에 나온 뉴턴의 미발표 저술, 편지 등을 사 모으기도 했다. 이렇듯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는 뉴턴 연구를 인정받아 케인스는 연사로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행사는 연기되고 말았다. 1946년 7월이 되어서야 다시 열렸지만, 안타깝게도 케인스는 3개월 전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래서 동생인 제프리 케인스가 형이 남긴 원고를 대독했다. 강연 원고 제목은 <인간 뉴턴(Newton, the Man)>. 거기에는 케인스가 오랜 기간 수집한 뉴턴 자료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이 원고를 통해 놀라운 사실이 알려졌다. 뉴턴이 물리학과 수학뿐만 아니라 연금술과 신학에도 심취했다는 것이다. 물론 뉴턴이 신학과 화학 - 당시에는 연금술로 불렸다 - 에 관심이 많았음은 알려져 있었다. 다만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또 그게 그의 과학 연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오랜 수수께끼였다. 케인스는 자신이 모은 방대한 문헌들을 분석한 끝에, 그가 평생 수학·물리학보다 연금술과 신학 연구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뉴턴의 미완성 원고는 무려 100만 단어가 넘었는데, 대부분이 신비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강연의 핵심 주제는 “뉴턴의 두 얼굴”이었다. 본래 뉴턴은 근대과학의 개척자이자 가장 위대한 이성의 상징으로 추앙받아 왔다. 영국의 대문호 알렉산더 포프가 남긴 그의 묘비명이 이를 잘 보여준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밤의 어둠 속에 감춰져 있었다. 신께서 말씀하시길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어둠이 모든 빛이 되었다” 그러나 케인스는 이런 통념과는 전혀 다르게 뉴턴을 정의했다. 뉴턴은 그런 계몽 시대의 첫 번째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마법사(the last of the magicians)라는 것이다. 고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된 마법의 전통이 뉴턴에 이르러 끝났다는 설명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그를 왜 마법사라 부르는가? 그가 우주 만물을 하나의 수수께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신이 곳곳에 숨겨 둔 어떤 신비한 단서들을 순수한 사유로 해독하면 비밀을 읽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케인스는 뉴턴이 우주의 비밀을 푸는 마법적 탐구에 평생 몰두했다고 했다. 뉴턴에게 자연 현상은 신이 남긴 암호였고, 연금술 서적이나 고대의 전승에 담긴 힌트들이 그 암호를 풀 열쇠라고 믿었다. 그래서 고대 연금술사들의 기록과 성서의 암호를 동시에 해독하려 했다. 그걸 기록한 연구 노트들은 체계적이고 엄정하며 이성적이었지만, 그 목적과 내용만큼은 마법적이었다.
요컨대 뉴턴은 우주를 수학으로 설명한 과학자이자, 점성술사나 연금술사로서 영적 믿음에 몰두한 독특한 천재였다는 결론이다. 다만 케인스는 “그렇다고 뉴턴이 덜 위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특별했을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뉴턴의 괴짜 같은 일면이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이러한 케인스의 주장은 당연히 파격적이었다.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뉴턴 연구자들은 그를 순수한 이성의 화신으로 묘사하곤 했다. 그래서 연금술 관련 원고는 학술적 가치가 없는 쩌리 취급을 받았다. 뉴턴의 방대한 연금술 메모가 1936년 경매에 나왔을 때도,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은 보관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입찰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서 애호가들이 값싸게 사들였고, 그 틈을 파고든 케인스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뉴턴의 비밀”이라며 열광했다. 학계가 외면한 자료에서 경제학자가 보석을 찾아낸 셈이다. 그러자 후대의 과학사학자들도 케인스의 통찰 속에 담긴 진실을 하나둘 밝혀내기 시작했다. 뉴턴의 연금술 연구와 중력 법칙이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 영역 사이에 은밀한 연결 고리가 존재함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뉴턴은 중세와 근대가 겹치는 시대를 살았다. 과학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었지만, 연금술과 점성술로 대표되는 신비주의 사상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뉴턴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실제로 그가 청년기에 탐독한 책 중에는 연금술과 신비철학 관련된 것들이 즐비했다. 또 만년에 이르러서도 성경의 암호 해석이나 연금술 실험 기록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이 중력이라는 독창적 개념을 떠올리는 토양이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중력이 작용한다”라는 발상은 당시에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럽 과학계를 주도하던 르네 데카르트의 지지자들은 물체가 서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직접적인 접촉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접촉 없이 작용하는 힘이란 설명 불가능한 주술에 불과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려냈다. 이른바 소용돌이 이론이다. 우선 그는 우주가 빈 공간이 아닌 에테르라는 미세한 물질로 가득 차 있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이것이 소용돌이치며 회전하는 흐름 속에서 행성들이 떠받쳐져 있다고 설명했다. 행성이 태양 둘레를 도는 이유도 그 소용돌이에 휩쓸려 밀려나는 결과일 뿐, 빈 공간을 가로질러 작용하는 힘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런 관점은 “실체 없는 곳에 작용하는 힘은 존재할 수 없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을 계승한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뉴턴이 중력을 주장했을 때, 데카르트 지지자들은 이 개념이 중세의 주술이나 마법을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실제로 뉴턴도 이러한 비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중력 이론을 주창할 때는 신중한 표현을 골라서 썼다. 이는 원격 작용이라는 개념이, 중세적 세계관에 반기를 든 당시 시대정신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 뉴턴은 어떻게 “작용하는 주체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힘이 존재한다”라는 중력의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역사학자들은 데카르트의 기계론과 별개로 존재하던 다른 사유의 전통이 뉴턴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한다. 대표적인 것이 자력(磁力) 현상이다. 1600년 윌리엄 길버트가 『자석에 관하여』에서 지구 자기장을 설명한 이래, “보이지 않게 거리를 넘어 영향을 주는 힘”으로서의 자력은 과학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요하네스 케플러도 중력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그것을 행성과 태양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자력 작용으로 파악했다. 즉 케플러는 중력과 자력을 엄격히 구별하지 않고 쓴 것이다.
일본의 과학사학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여기에 착안하여 “자력에 대한 이해가 중력 발견의 토대가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케플러나 뉴턴에게 있어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는 원격 작용은 신비롭지만 실재하는 자연 현상이었다. 이를 확대하면 천체 사이에도 그런 힘이 있다고 연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야마모토의 설명이다. 바로 이런 경로를 따라 “모든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라는 중력의 결론에 이를 수 있게 된다. 결국 뉴턴이 기존의 기계론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연금술과 마법에 열려 있던 지적 환경이 한몫한 셈이다.
물론 뉴턴이 단순하게 중력을 떠올린 것은 결코 아니다. 중력이라는 혁신적 아이디어는 갈릴레이의 운동법칙, 케플러의 행성궤도 법칙, 그리고 선배 과학자들의 여러 통찰 위에 세워진 복합적 성과였다. 다만 여기에 더해, 연금술사들의 세계관도 뉴턴의 사유 속에서 조용히 역할을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뉴턴은 만년에 이르러서도 “물질에 스며 있는 어떤 영적 작용이 중력의 원인일지 모른다”라는 식으로 생각했다. 또한 『광학』 등에서 중력의 원인으로 에테르 또는 미세 입자들의 작용 가능성을 토론하면서도, 완전한 기계적 원인을 밝히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즉 뉴턴 자신도 “중력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끝내 가설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중력이 기존 인과율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개념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뉴턴은 결국 그것을 완벽히 해명하지는 못한 채 역학 법칙의 언어로만 정식화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렇듯 뉴턴 시대의 과학혁명은 신비와 이성이라는 양쪽 발판을 딛고 도약한 결과였다.
케인스의 강연 이후 뉴턴의 연금술 연구와 중력 이론의 연관성을 본격적으로 조명한 학자들이 나타났다. 앞서 언급한 야마모토 요시타카와 미국의 과학사학자 베티 조 티터 돕스가 대표적이다. 두 사람은 서로 독립적으로 연구했으나 결론은 비슷했다. “연금술로 대표되는 신비주의적 세계관이 뉴턴의 중력 발견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라는 도발적인 가설이었다.
우선 야마모토는 『과학의 탄생(일본어 원제 : 磁力と重力の発見)』에서 케플러가 중력과 자력을 혼용했던 사실에 주목했다. 그에 의하면, “근대 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자력(磁力)에 대한 이해가 중력 개념의 이해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었다”. 그러니까 연금술이나 점성술처럼 비과학적이라 여겨진 사상들이 오히려 과학 발전을 추동한 면이 있다는 대담한 주장이다. 실제로 뉴턴은 연금술 실험에서 물질 사이의 끌림과 반발, 즉 친화성이나 반감 같은 개념을 익혔다. 이러한 비가시적 상호작용에 대한 열린 관점이 물리학까지 확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한편 돕스는 1975년 『뉴턴 연금술의 기초(The Foundations of Newton’s Alchemy)』와 1991년 『천재의 두 얼굴 : 뉴턴 사상에서 연금술의 역할(The Janus Faces of Genius: The Role of Alchemy in Newton’s Thought)』 등의 저술에서 뉴턴의 연금술을 심층 분석했다. 그녀는 방대한 연금술 노트를 검토한 뒤, 뉴턴이 연금술을 단순한 화학 실험이 아닌 종교적·철학적 구원의 탐색으로 여겼다고 해석했다. 특히 뉴턴이 물질의 미묘한 작용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비물질적 힘”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졌고, 이것이 중력과 같은 “물질 사이의 비가시적 인력”을 수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보았다. 뉴턴의 말년에 등장하는 활성 원리(active principle) - 물질 안에 어떤 능동적인 힘 또는 영적 작용이 깃들어서 운동과 인력을 일으키는 원리 - 개념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돕스는 뉴턴이 이러한 연금술적 활성 원리를 우주론에 적용하여 중력 개념을 정립했다고 보았다.
뉴턴 연구의 대가인 리처드 웨스트폴 역시 비슷한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웨스트폴은 “뉴턴의 원거리 작용 개념은 지상에서 관측되는 화학 작용, 특히 물질의 화학적 인력에서 처음 유래했다”라고 하며, 뉴턴이 “화학적 인력 개념을 우주에 적용한 후에야 비로소 중력 개념이 탄생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야마모토와 돕스의 논지도 웨스트폴을 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뉴턴의 물리학과 연금술은 불연속적인 두 세계가 아니라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영역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뉴턴이 마법적 공감으로 여겨지던 개념을 중력이라는 보편 과학의 법칙으로 재해석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과학사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케인스의 통찰 – 뉴턴은 마지막 마법사이기도 하다 – 에 힘을 실어주었다. 뉴턴의 위대한 발견의 이면에 연금술적 사유의 비밀 통로가 있었다는 이 해석은, 과학혁명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성과로 평가받는다. 물론 윌리엄 뉴먼 등과 같은 학자들은 연금술과 중력 이론의 직접적 연결 고리에 대해 좀 더 신중한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사에서 연금술과 근대과학은 단절되어 있지 않고 연속성을 가진다는 큰 그림은 이제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연금술은 실패한 미신이었고 근대과학은 전적으로 새로운 기획이라는 옛 도식에서 벗어나, 연금술도 과학혁명의 한 토양이었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뉴턴이 발견한 중력 법칙은 인류 지성사에 혁명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흔히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발견했다”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이야기되지만, 실제 역사는 훨씬 풍부하고 복잡하다. 위대한 발견 뒤에는 거인들의 어깨뿐 아니라, 과거 시대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기 마련이다. 뉴턴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업적 뒤에는 케플러와 갈릴레이 같은 선배들뿐만 아니라, 연금술사와 신비주의자들의 유산 또한 은밀히 숨어 있었다. 뉴턴의 저 유명한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다”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그 거인에는 아마도 케플러 같은 과학자뿐 아니라 수많은 무명의 연금술사들도 포함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연금술에서 중력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마치 비밀 통로 같은 느낌을 준다. 뉴턴은 생전에 연금술 연구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그의 사후에도 가족과 지인들이 관련 기록을 감추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한동안 그 통로는 폐쇄된 채로 잊혀 있었다. 그러다 케인스라는 뜻밖의 인물, 경제학자이자 광적인 덕후였던 이의 끈질긴 노력으로 그 통로를 발굴해 낸 것이다. 케인스가 낡은 트렁크 속 문헌들을 펼쳐보지 않았다면 뉴턴의 또 다른 얼굴은 훨씬 늦게까지 어둠 속에 남아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지금 마법사 뉴턴과 과학자 뉴턴을 함께 기억하게 된 것은, 결국 한 덕후의 집념 어린 탐사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중력은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뉴턴의 중력을 대체했지만, 블랙홀과 암흑물질 등의 존재는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신비한 힘을 법칙으로 정식화한 사람은 연금술에 깊이 매혹되었던 뉴턴이었고, 그의 숨겨진 내면세계를 세상에 드러낸 이는 경제학자 케인스였다. 이렇듯 근대과학의 경전 『프린키피아』의 이면에는 연금술이라는 마법서의 흔적이 숨어 있었다. 뉴턴이라는 거인은 과학과 비과학, 이성과 신비의 경계 위에서 두 세계를 잇는 다리를 놓았다. 그 다리 너머의 비밀 통로를 탐험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지적 모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