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사상사의 한 풍경
19세기 중반, 런던 일대에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두 거장이 살고 있었다. 바로 카를 마르크스(1818~1883)와 찰스 다윈(1809~1882)이다. 마르크스는 런던 도심에, 다윈은 런던 남동쪽 켄트의 다운하우스에 거주했다. 이들은 불과 30㎞ 남짓 떨어져 있었다. 다만 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서로의 존재는 알고 있었고, 직‧간접적 영향도 주고받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두 사람이 분야는 달랐지만 의외의 공통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경쟁을 통한 발전’이라는 개념이 그렇다. 다윈은 자연선택이라는 생존 경쟁 속에서 생물학적 진화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투쟁을 통해 역사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즉 두 사람은 진화 또는 진보가 갈등과 투쟁의 동적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특히 1859년은 중요한 해였다. 두 사람 모두 주저를 출간하며 학문적 전환점을 맞았기 때문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한 때가 바로 이해다. 인류사에서 수천 년 이어진 종교적 세계관에 근본적 질문을 제기한 이 책은 당일 1,250부를 완판하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발표했다. 비록 이 책은 『종의 기원』만큼 주목받지 못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8년 뒤 나오는 대표작 『자본』의 이론적 단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전 세계의 절반은 마르크스가 제창한 사회주의 혁명의 깃발 아래 모이게 된다. 『자본』은 그 혁명의 교리를 담은, 노동자 계급의 성서와 같은 책이 되었다. 같은 해 나온 이 책들은 이렇게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인류의 세계관을 뒤흔들게 되었다.
이처럼 마르크스와 다윈은 동시대에 활동하면서 문제의식에서도 접점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두 사람을 엮어보려는 시도가 꽤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일화가 “마르크스가 『자본』을 다윈에게 헌정하려 했다”라는 설이다. 한때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으나, 지금은 근거 없는 도시전설로 판명되었다. 그럼 어쩌다 이러한 이야기가 퍼지게 된 것일까?
우선 분명한 사실은 1873년 마르크스가 다윈에게 『자본』 제2판 한 권을 보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책의 첫 장에 “당신의 진정한 경애자로부터”라고 자필 서명을 남겼다. 이에 다윈은 약 석 달 후 감사 편지를 보내면서 “이처럼 위대한 저서를 보내주신 영예를 받을 만한 자격이 내게 있으면 좋겠으나, 정치경제학을 더 잘 이해하지 못해서 한스럽다”라고 겸손하게 답했다. 그리고 “비록 연구 영역은 매우 다르지만, 우리는 둘 다 지식의 확장을 진심으로 열망하며, 그것의 증대가 결국 인류의 행복을 증진할 것을 믿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것이 공식적인 의미의 ‘헌정(dedication)’은 아니었다. 여기서 헌정이란 책의 서문 등에 “○○에게 바친다”라고 표기하는 것을 뜻하는데, 『자본』 1권의 헌정 대상은 이미 마르크스의 동지 빌헬름 볼프로 정해져 있었다. 다윈 역시 마르크스에게 예의 바르게 답했지만, 『자본』에 대한 이해는 별로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읽지도 않았다. 실제로 다윈이 받은 『자본』은 대부분 페이지 윗부분이 잘려있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는 책장을 한 번도 떼지 않았음을 – 즉, 읽지 않았음을 - 의미한다. 무엇보다 다윈은 독일어에 익숙하지 않았고, 과학자인 자신이 정치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극히 경계했다.
그럼에도 훗날 마르크스가 『자본』을 다윈에게 헌정하려 했다는 오해가 생긴 이유가 있다. 다윈이 보낸 한 통의 편지가 잘못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마르크스의 문서철 속에서 1880년 10월 13일 자 다윈의 편지 한 통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직접적인 기독교 비판에는 공감하지 않으며, (당신의 책을) 내게 헌정하려는 의도는 사양하겠다”라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 학자가 이 편지를 소개하면서 “다윈이 마르크스의 책 헌정을 거절한 답신”이라고 단정했고, 이 이야기가 사실처럼 인용되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류였다. 문제의 편지는 다윈이 마르크스가 아닌 에드워드 에이블링에게 보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에이블링은 마르크스의 막내 사위로서 사회주의자이면서 다윈주의자였다. 그가 1880년 10월 12일 다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저서 『학생의 다윈』을 헌정해도 될지 허락을 구했고, 다윈은 하루 만에 이를 거절하는 답장을 보낸 것이었다. 에이블링은 1890년대에 장인 마르크스의 유고 문서를 정리하면서 이 편지도 끼워 넣었고, 훗날 연구자들이 발견하면서 ‘마르크스-다윈 서신’으로 착각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오랫동안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1939년 저서 『카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며 헌정설을 공식화했다. 그러자 이후 출간된 마르크스 전기와 해설서들도 이를 그대로 따라 했다. 심지어 다윈의 답신을 ‘마르크스의 헌정을 거절한 증거’로 제시하는 논문들도 등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미국의 마거릿 페이와 루이스 퓨어 등의 노력으로 진상을 밝힐 수 있었다. 다윈에게 책을 헌정하려 했던 주인공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그의 사위 에이블링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이른바 ‘헌정설’은 해프닝으로 끝나게 되었다. 결국 마르크스와 다윈의 직접적 교류는 『자본』 증정과 그에 대한 감사 편지가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관계가 아니어도, 헌정설은 논리적으로도 성립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다윈 이론의 사회적 적용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종의 기원』의 과학적 성취는 높이 평가했지만, 다윈이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을 자연법칙에 적용한 점은 강력히 비판했다. 예컨대 그는 “다윈이 맬서스 이론을 식물과 동물에도 적용한다며 자랑스러워하는 대목은 나를 즐겁게 한다”라고 비웃은 바 있다. 인간 사회에서 도출된 경쟁 논리를 자연에 투영한 후, 다시 그것을 자연법칙이라며 인간 사회에 역수입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의미다.
마르크스의 동지이자 후원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1875년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회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토머스 홉스의 용어)’ 상태로 만드는 사상가들을 비판했다. 그는 “이른바 부르주아 다윈주의자들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경쟁론, 맬서스의 인구론 따위를 자연계에 투영해 놓고 다시 그것을 사회에 끌어와 영구불변의 법칙이라고 강변한다”라며, “이 유치한 작태는 더 논할 가치도 없다”라고 일축했다. 여기서 거론된 ‘부르주아 다윈주의자들’이란 다윈의 이름을 빌려 적자생존의 논리를 인간 사회에 적용하려던 사회진화론자들을 가리킨다. 대표적으로 허버트 스펜서를 꼽을 수 있다. 스펜서는 다윈보다도 일찍 ‘사회유기체’ 개념을 제창하고, “자연에는 적자생존 법칙이 존재하니, 사회의 운영도 약육강식에 맡겨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적자생존이 다윈의 용어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스펜서가 먼저 쓰기 시작했고, 다윈이 뒤에 이를 승인한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의 약육강식 논리 역시 자연법칙이라서 어쩔 수 없다”라는 주장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이것은 다윈 이론을 사회에 적용할 때 발생하는 필연적 문제였다. 왜냐하면 다윈의 저작이 “당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자연과학에 반영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1861년 동료인 페르디난트 라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다윈의 책은 목적론에 최초로 결정타를 가한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만 전개 방식이 거칠고 영국적이라서 견디기 어렵다” 여기서 영국적 방법이란, 다윈이 당시 영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던 무한경쟁의 논리를 자연도태의 원리로 삼은 것을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다윈은 진화론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이 책은 빈민 구제를 불필요한 간섭으로 치부하고, 가난한 자들이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 도태되도록 방치하는 것이 사회의 안정에 이롭다는 냉혹한 부르주아적 함의를 담고 있었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다윈을 빙자해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적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들에게 비판적이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시도가 다윈 이론에 내재한 ‘부르주아적 함의’ 때문이라고 통찰했다. 따라서 적어도 사회연구에 있어서만큼은 다윈주의, 즉 사회진화론을 단 1%도 지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다윈의 관계는 좀 더 복잡하다. 마르크스가 다윈의 일부 측면을 비판했다고 해서, 다윈 전체를 깎아내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연에 내재한 발전 법칙을 과학적으로 정식화한 다윈의 업적에 대해 마르크스는 깊은 존중을 보였다. 다윈이 『자본』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과 달리, 마르크스는 『종의 기원』을 다 읽고 호평까지 했다. 그러면서 이를 자신이 주창한 사적 유물론의 자연과학적 토대로 받아들였다. 1860년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감상이 드러난다. “비록 조야한 영국적 방식으로 전개되어 있지만, 우리의 견해에 대한 자연사적 기반을 포함하고 있는 책이다”
심지어 『자본』 1권에는 다윈을 직접 언급한 각주도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획기적인 저작이라며, 이 책에서 제시된 생물학적 분업을 인용하여 사회 분업과 노동도구의 전문화에 대한 분석을 뒷받침했다. 물론 이 각주는 『자본』의 전체 구조에서 그리 중요한 위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종의 기원』을 획기적인 저작이라 칭하며 권위를 부여한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마르크스는 다윈이 자연과학에서 이룬 업적을 높이 샀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다윈에게 『자본』을 증정 - 헌정이 아닌 - 한 것도 이러한 존중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1873년 다윈에게 친필 서명을 한 『자본』 한 권을 보냈고, “당신의 진정한 경애자로부터”라는 문구까지 덧붙였다. 이는 마르크스가 다윈을 흠모하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낸 대목이다. 다윈의 답신 역시 마르크스의 지적 노력에 대한 연대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다만 다윈은 자신의 이론이 사회과학이나 정치 논쟁에 이용되는 일에는 일관되게 거리를 두었다. 헌정설의 발단이 된, 1880년 에이블링에게 보낸 편지가 그 예다. 에이블링이 헌정을 요청한 『학생의 다윈』은 무신론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에 다윈은 “나는 자유사상의 옹호자이지만, 기독교와 신학에 대한 직접적 공격은 대중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며, 과학의 진보에 따라 서서히 이루어지는 계몽이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라면서 헌정을 완곡히 거절했다. 그러면서 “종교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며, 나는 자신을 과학에만 한정시켜 왔다”라고 덧붙였다. 여기서 드러나듯 다윈은 과학 외적인 논쟁에 자신의 이름이 이용되는 것을 늘 꺼렸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보낸 『자본』에 대해서도 비슷한 스탠스를 취했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주변 인물들 가운데는 엥겔스나 에이블링처럼 다윈의 열렬한 지지자가 여럿 있었다. 엥겔스는 평소 다윈을 높이 평가했을 뿐 아니라, 1883년 3월 마르크스의 장례식 추도 연설에서도 언급했다. “다윈이 자연의 발전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역사 발전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야말로 엥겔스는 두 사람의 업적을 대등하게 놓고 찬양한 셈이다. 이 선언은 훗날 꾸준히 반복 인용되며 다윈과 마르크스를 지성사적으로 엮는 한 근거가 되었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자연계의 변증법을 밝힌 다윈을 자기와 같은 시대정신의 대변자로 여긴 측면이 있다. 요컨대 사회진화론에는 비판적이었지만, 진화론 그 자체는 과학적 진리로 받아들여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지금껏 살펴본 마르크스와 다윈의 관계는 개인들의 일화를 넘어, 19세기 사상사의 흐름 속에서 조망할 때 더 깊은 의미를 띤다. 19세기 중엽은 근대 과학의 지식 체계가 분화하고 전문화된 시기였다. 우선 자연과학은 아이작 뉴턴 이래 축적된 실증적 성과를 바탕으로 높은 사회적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원래 과학(science)은 라틴어 scientia에서 온 용어로, 넓은 의미의 앎이나 지식 전반을 뜻했다. 그래서 근대 이전에는 철학, 신학, 수사학 등 모든 학문적 탐구가 과학의 범주에 속했다. 하지만 19세기를 거치면서 이 용어는 점차 의미가 좁혀져, 주로 자연현상을 다루는 정밀과학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분야에서 실험, 수량화, 수학적 법칙 발견에 힘입어 과학은 곧 신뢰할 만한 지식의 대명사가 되었다.
반면 사회과학은 이제 막 탄생한 신생 분야였다. 당시 오귀스트 콩트는 인간 사회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사회학을 창시하며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적용하려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실증주의의 기치 아래 사회현상도 자연현상처럼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보았다. 허버트 스펜서는 아예 ‘종합철학’ 체계를 내세워 물리학부터 사회학까지 모든 학문을 진화의 원리로 통합하려 했다. 이에 과학의 논리를 사회에 접목한 사회유기체설(“사회는 유기체와 같다”), 사회진화론(“자연도태의 법칙이 사회에도 적용된다”)을 제시했다. 요컨대 이 시기 사회과학자들은 자연과학의 권위를 빌려 자신들의 이론을 뒷받침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공상적 이상이나 철학적 사변이 아닌, 과학적 분석을 통해 사회의 발전법칙을 밝히겠다는 포부를 여러 차례 드러냈다. 이에 자신의 이론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하며, 생시몽이나 푸리에 류의 공상적 사회주의와 엄격히 구별 지었다. 엥겔스는 한술 더 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사회발전의 법칙을 밝힌 과학적 이론”으로 정식화했고, 자연과학의 진보 - 다윈의 진화론, 마이어의 에너지 보존법칙 등 - 와 대응하여 사회과학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등장을 설명했다. 실제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 ‘과학’이다. 예컨대 『자본』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확립한 경제법칙들이 “자연과학에서 그렇듯 정확한 법칙적 필연성을 지닌다”라고 했다. 심지어 1865년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저술을 두고 “결함이 없지는 않겠으나, 나의 저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적 전체”라고까지 했다. 이는 자신의 이론 체계에 내적인 치밀함과 조화를 부여하려 했던, 마르크스 특유의 과학자적 자신감을 보여준다.
결국 마르크스가 다윈에게 느낀 친밀감도 이러한 ‘과학 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다윈이 자연계에 존재하는 장구한 역사와 변화를 입증했듯, 마르크스 역시 인간 사회에도 변증법에 의한 역사법칙이 관철되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려 한 셈이다. 이 배경에는 당시 자연과학이 누리던 압도적인 위상에 비해 사회과학은 걸음마 단계였다는 현실이 자리한다. 그러니까 초기 사회과학자들은 자연과학을 흠모의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들의 이론도 그에 못지않은 ‘과학적 정당성’을 지녔음을 입증하려 애썼던 것이다. 마르크스와 다윈의 관계는 바로 이 지점 -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위상 차이와 그 조율 - 을 대변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마르크스와 다윈의 관계는 단순히 둘이 얼마나 교류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역사적 관심사로서 “『자본』 헌정설”이나 “다윈이 마르크스를 읽었을까”와 같은 에피소드도 흥미롭지만, 그것만으로 두 거인의 관계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들의 교류와 상호 인식은 19세기 사상사에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권위의 재편을 모색한 한 단면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앞서 확인했듯 마르크스는 다윈의 이론에 때로 비판적이었으나 동시에 진심 어린 찬사를 보냈다. 다윈 역시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에게 예의를 갖춰 정중히 답했다. 이렇듯 두 사람은 각자의 분야에서 기존 질서를 뒤흔든 혁명적 지식을 창출했다는 점에서 동지적 공감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연과 사회라는 서로 다른 대상을 다루었기에, 그 만남에는 한계와 어긋남도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차이점과 공통점의 복합성이 마르크스와 다윈을 함께 논할 가치가 있는 이유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학이 자연을 넘어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어떠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전개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마르크스와 다윈을 나란히 살펴보는 일은 19세기 과학의 지형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된다. 두 사람의 유산은 이후 수많은 지식인에게 영감과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게다가 오늘날까지도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 명단에서 빠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서로 대면한 적 없으나 지적인 교차점이 있었던 두 거인의 이야기는, 역사 속 아이러니이자 지성사의 한 풍경으로서 우리에게 깊은 사유거리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