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서 다룬 간지는 요란하고 폭발적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칼각으로 무대를 썰어 버렸고, 건즈 앤 로지스는 록스타의 과잉된 자의식을 존멋으로 승화했으며, 메탈리카는 난닝구 차림으로 역사의 전환점을 뒤흔들었다. 불꽃이 튀고, 볼륨이 터지고, 관객이 집단으로 출렁이는 무대들. 그야말로 풀악셀 밟은 머슬카 같은 간지였다.
하지만 꼭 이렇게 때려부숴야만 간지가 사는 건 아니다. 1편이 엔진 소리부터 심장을 폭행하는 간지였다면, 이번 편은 소리도 없이 스윽 지나간 뒤에야 “방금 뭐였지?” 하고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간지다. 엔진음은 안 들리는데 존재감은 뚜렷한 롤스로이스 같은 무대들. 즉, 이번 편의 주제는 절제와 여백의 미학이다.
원래 고수들은 무대에서 윽박지르지 않는 법이다. "나 멋있지? 아 멋있다고 좀 해줘!"라고 구걸하는 순간, 그건 이미 간지가 아니라 열정 페이다. 진짜 고수는 의자에 걸터앉아, 괜히 먼 산 한 번 바라보고, 슬쩍 기타 줄을 튕길 뿐이다. 그러면 관객들은 박수칠 타이밍조차 못 잡고 입꾹닫 모드로 강제 진입하고 만다. 다음의 무대들에서 그 생생한 현장을 확인할 수 있다.
1971년의 <Layla>는 질주하는 전기 기타와 집요한 리프, 격정적인 감정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21년이 지난 뒤 에릭 클랩튼은 뜬금없이 통기타를 들고 나타났다. 그것도 무슨 동네 기원에서 바둑 두다 오신 것 같은 비주얼로. 지천명을 바라보는 클랩튼이 돋보기 쓰고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았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고 이 형님도 이제 기력이 다하셨구나…”
근데 첫 리프를 어쿠스틱으로 스윽 긁자 <Layla>는 전혀 새로운 무드의 곡으로 재탄생한다. 클랩튼은 그 치열했던 사랑과 고통의 서사를 인생 다 산 철학자의 선문답으로 바꿔버렸다. 그저 발로 박자를 맞추며 손끝으로 기타 줄을 튕길 뿐인데, 그 소리가 가슴 깊숙한 곳까지 퍼져 나간다. 연주 내내 손놀림은 빠르지 않고, 솔로는 화려하게 튀지 않는다. 대신 코드와 코드 사이의 여백이 유난히 길다. 손가락이 안 보이는 속주? 그런 건 뉴비들이나 하는 거라는 듯, 음 하나하나에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담아 툭툭 던진다. 보고 있으면 “저 선생님은 밥 먹고 기타만 치셨나?” 싶은데, 진짜 평생 기타만 쳤다는 게 팩트다.
결국 이 무대는 잘해서 멋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이상 증명할 것이 없는 경지라서 폼난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굳이 잘할 필요가 없다는 거장의 태도 자체가 간지다.
1981년 9월 뉴욕 센트럴파크. 사이먼 앤 가펑클의 재결합 공연에 무려 50만 명이 모였다. 그러니까 그날 밤 센트럴파크는 공원이 아니라, 인구 50만 명짜리 도시 하나 - 안양시 정도 되는 - 가 잔디밭에 그대로 압축된 공간이었다.
이 정도 인원이 한자리에 모이면 보통 소음부터 문제가 된다. 그런데 사이먼 앤 가펑클은 통기타 한 대만 들고 홀연히 무대에 올랐다. 마치 단기필마로 장판파에 나선 장비 같다. 이윽고 폴 사이먼의 기타 연주에 아트 가펑클의 미성이 얹어지는 순간, 50만 명이 내뿜던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이 무대의 간지는 크기를 키우지 않는 선택에서 나온다.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은 서로를 앞서지 않고, 상대의 소리를 덮지도 않는다. 대신 각자의 몫을 정확히 지킨다. 덕분에 “Hello darkness, my old friend”라는 첫 가사가 울려 퍼질 때, 그 문장은 더 이상 노랫말이 아니라 이 공연의 주제의식처럼 들린다. 거대한 군중 앞에서 굳이 소리를 키우지 않아도 되는 거장들. 사이먼 앤 가펑클은 그렇게 조용한 상태 자체를 무대 위에 올려놓았다.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거장도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스팅의 이 길거리 공연도 그걸 정확히 보여준다. 관객석도, 조명도, 사운드 체크도 없다. 뒤로는 차들이 지나다니고, 사람들은 힐끗힐끗 쳐다본다. 하지만 스팅이 특유의 쇳소리 섞인 고음을 내뱉자, 이 무대는 우연한 버스킹이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연출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도대체 저곳이 어디일까 궁금해서 뒤에 나오는 상점의 글자들로 검색까지 해봤다. A La Vieille Russie, 뉴욕 센트럴파크 근처의 유명한 앤티크 숍이란다. 노래에 5번가를 걸어가는 나를 보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이 가게도 실제로 5번가에 있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현실 고증까지 지리는 갓벽한 무대였다.
이 무대의 간지 포인트는 한둘이 아니지만, 역시 재즈의 리듬과 찰지게 엮이는 가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워옭~ 암언 엘리연, 암어 리글 엘리연, 암언 잉글리시만 인 누이~옼” 이렇게 무심한 듯 시크하게 내뱉어야 한다. 단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잉글리시맨 인 뉴욕”이 아니다. “잉글리시만 인 누욕” 이렇게 영국 스타일로 발음해줘야 한다. 그래야 이 곡의 간지가 산다.
흔히 팝 남성 가수 계보에서 ‘섹시’의 아이콘으로는 조지 마이클이 꼽힌다. 하지만 내 생각에 스팅이야말로 진정한 섹시 가수다. 다만 종류는 좀 다르긴 하다. 조지 마이클이 퇴폐적인 섹시함이라면, 스팅은 지적인 섹시함에 가깝다. 딱 맞는 핏의 새하얀 셔츠를 입고, 흔들흔들 리듬을 타면서 영국인의 부심을 내뿜는, 중년의 저 섹시 간지를 보라. 이제는 스팅과 함께 늙어가고 있는 나도 이렇게 외치게 된다. “형 나 죽어”
오아시스 시절의 노엘 갤러거는 시도 때도 없이 독설을 내뱉는 상돌I였다. 인터뷰만 하면 누군가 하나쯤은 패고 나왔고, 공연에서는 관객이 아니라 세상을 상대로 싸우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하이플라잉버즈를 할 때의 노엘은 통달한 도인처럼 느껴진다. 싸울 필요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고, 굳이 목에 핏대 세울 이유도 없다. 기타 하나 들고 서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감동한다.
그래서 O2 아레나를 꽉 채운 관객들 앞에서 노엘은 퍼포먼스 같은 건 안 한다. 무대 위를 뛰어다니지도 않고, “Hands up!”, “Sing it!” 같은 클리셰 구호도 안 외친다. 그냥 무심하게 기타를 뚱땅거리며 노래를 시작할 뿐이다. 너무도 유명한 이 곡의 제목을 말해줄 성의조차 없는 표정으로. 바로 세기의 히트곡 <Don’t Look Back in Anger>다.
백미는 역시 후렴구다. 노엘은 아예 노래를 멈추고 마이크를 관객에게 돌린다. 수만 명이 "쏘오오오 샐리 캔 웨잇~"을 떼창할 때, 그는 미묘한 표정 - 흐뭇해 보이기도 하고, 시건방져 보이기도 하는 - 으로 기타만 친다. 그 모습을 보자니 이런 바이브가 느껴진다. 본인이 만든 노래가 전 인류의 송가가 되었음을 감상하는 아티스트의 여유. 굳이 내 목청 안 높여도 세상이 내 노래를 대신 불러준다는 자신감. 왠지 이 양반 성격상 끝나고 스태프들에게 한마디 했을 것 같다. "봤나? 이기 마 클라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