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책 『최소한의 과학 공부』를 준비할 때의 일이다.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가기 전에 출판사에서 샘플 원고를 요구했다. 아마도 책의 전체적인 방향과 기조를 미리 가늠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시 생애 첫 출간을 앞둔 나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독자들에게 내가 가진 지식을 최대한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학술논문, 정책자료 같은 전문적인 글들을 여기저기서 찾아 읽고, 그걸 주르륵 이어 붙여가며 원고를 썼다. 과학사와 철학사라는 거대한 두 줄기를 교차시키며, 흥미로운 사례는 물론 설명을 도울 비유까지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완성된 원고를 보니 뿌듯했다. “음, 이건 내가 봐도 괜찮네.”
그런데 편집자의 피드백은 기대와 전혀 달랐다. “인터넷 검색만 해도 나오는 지식만 있고, 작가님의 이야기가 보이지 않네요. 독자들이 돈 주고 책을 사는 이유는 결국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예요. 이런 글은 책이 될 수 없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솔직히 억울했다. “아니, 이게 얼마나 공들인 건데… 아무나 이 정도로 쓰는 줄 아나.” 그래서 나름 디펜스를 해보려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읽을수록 반박할 말이 줄어들었다. 편집자의 지적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보도 풍부하고 설명도 친절했으나, 정말로 그 글에는 ‘내 생각’이 없었다.
이는 나만의 경험이 아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비슷한 하소연이 반복된다. “자료는 다 넣었는데, 뭔가 밋밋하대요.” “틀린 데는 없다고 하는데, 인상은 약하다고 하네요.” “정리는 잘 됐는데,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는 잘 안 보인다고요.” 이런 말을 들은 원고들을 보면, 대개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빠진 정보는 없다. 구조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읽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설명은 충실한데, 어디에도 글쓴이가 서 있는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런 피드백을 받으면 우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같은 행동을 한다. 문장을 고치고, 자료를 보충하고, 설명을 늘린다. 하지만 그렇게 몇 번을 손봐도 글의 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건 내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생각을 글의 전면에 올려본 적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다.
그럼 우리는 왜 이렇게 ‘내 생각이 빠진 글’에 익숙해졌을까? 이걸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어떤 글쓰기를 배워왔는지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처음 배우는 글쓰기는 시험 답안, 수행평가, 리포트 등이다. 이 글들에는 대개 정답이 있고, 평가자(선생님)가 기대하는 논지와 형식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그러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내 생각’을 밀어붙이기보다, 정답에 가장 가까운 말을 고르는 법을 먼저 배운다. 결론은 교과서적인 문장으로 마무리되고, 논쟁을 부를 수 있는 해석은 피한다. 위험한 주장은 애초에 쓰지 않는다. 그렇게 쓰는 게 점수를 잘 받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직장 글쓰기는 더하다. 보고서, 기획안, 검토의견 등에서 ‘내 생각’을 선명하게 쓰는 일은 종종 리스크가 된다. 문장이 튀면 책임도 함께 튄다. 그래서 조직에서는 안전한 문장들만 살아남는다.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 “관련 부서 협의가 요구된다.”,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 의미도 없는 문장들이다. 이렇듯 학교와 직장은 우리에게 반복해서 같은 메시지를 주입한다. “입장이 드러나지 않는 글이 가장 안전하다.”
결국 우리는 하나의 능력만 집중적으로 훈련받게 된다. 사실을 정리하고 요약하는 일. 반대로, 그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훈련은 충분히 받지 못한다. 그래서 막상 논픽션을 쓰려하면,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는 말할 수 있지만, 그 사실에 대해 내가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문이 막힌다.
여기서 흔히 하는 오해가 있다. “내 생각이 없다”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곧바로 자기 능력을 의심한다. 아는 게 부족해서, 사고력이 떨어져서, 전문성이 약해서 글이 안 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능력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의 글쓰기에 너무 익숙해졌다는 점이 더 문제다.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글에 쓰지 않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쓰는 순간, 글은 ‘객관적 사실’의 영역에서 ‘나의 해석’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글은 반박의 대상이 되고, 논쟁의 대상도 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 상황을 피하는 쪽으로 훈련받아 왔다.
하지만 논픽션은 바로 그걸 정면으로 다루는 글이다. 전기, 칼럼, 비평, 교양서 등이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글들은 정보를 전달만 하지 않는다. 독자가 알고 싶은 것은 정보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작가는 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다. 편집자가 내 원고에서 “작가님의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자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기 위해 책을 사지 않는다. 독자는 그 사실을 작가의 눈을 통해 다시 만나고 싶어서 책을 산다. 설명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은 작가만 할 수 있다.
설명하는 글은 대개 이런 구조를 갖는다. “A는 무엇이고, B는 왜 중요하며, C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다.” 깔끔하고 정리도 잘 된다. 실제로 인터넷에는 이런 글이 셀 수 없이 많다. “○○란 무엇인가?”, “왜 ○○이 중요한가?”, “○○의 전망 총정리” 같은 제목의 글들이다. 검색해 보면 비슷한 구조의 글이 수십 개씩 쏟아진다. 정의를 정리하고, 특징을 나열하고, 마지막에 “앞으로 더 주목해야 한다”로 끝나는 글들이다. 틀린 말은 거의 없다. 다만 읽고 나면 남는 것도 많지 않다. 어디선가 이미 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는 이렇게 묻게 된다. “그럼 굳이 당신 글을 왜 읽어야 하죠?”
사유하는 글은 여기서 갈라진다. 사유하는 글은 사실을 나열하지 않고, 사실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낸다. 같은 재료를 쓰더라도 초점을 달리하고, 질문을 바꾸고, 결론을 비튼다. 독자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생각을 되돌아보게 된다. “아, 나는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사유하는 글이 주는 가치는 새로운 정보보다, 이런 재인식에 있다.
유명한 글쓰기 고전을 쓴 저자들도 비슷한 말을 한다. 『글쓰기 생각쓰기』의 윌리엄 진서는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란 종이 위에서 생각하는 것” 이 말의 요지는 글쓰기가 생각의 결과물이 아니라, 생각이 실제로 일어나는 장소라는 데 있다. 즉 글은 완성된 판단을 옮겨 적는 도구가 아니라, 판단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다.
이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설명하는 글과 사유하는 글은 기술이 아니라 작동 방식에서 차이가 생긴다. 설명하는 글은 이미 정리가 끝난 생각을 전제로 한다. 반면 사유하는 글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전자는 안정적이고, 후자는 불안정하다. 전자는 매끄럽고, 후자는 더디다. 그러나 그 불안정함과 더딤이야말로 사유의 조건이 된다.
조앤 디디온도 이를 작가적 경험에서 조명한다. “나는 쓰기 전까지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리’가 아니라 ‘발견’이다. 써보기 전까지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많은 글이 왜 설명에 머무는지도 분명해진다. 생각을 쓰지 않으니, 새로 생겨날 생각도 없다. 글은 시작부터 이미 안전한 결론을 향해 달려가고, 그 과정에서 글쓴이에게도 아무런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쓰인 글은 독자에게도 같은 경험을 준다. 정보는 전달되지만, 사고는 촉발되지 않는다. 그저 “응 그렇구나”로 끝나는 글이다. 반면 사유하는 글은 독자에게도 동일한 사고 과정을 요구한다. 글쓴이가 생각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그대로 통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는 사람도 중간에 여러 번 멈춰 서게 된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고개를 갸웃하거나, 반박하고 싶어지거나. 바로 그 지점에서 글은 읽히기 시작한다.
조지 오웰이 강조한 좋은 산문의 기준도 마찬가지다. 그는 좋은 문장이 “창문 유리처럼 투명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는 문장을 솔직하고 단순하게 쓰라는 조언이 아니다. 사고의 흐름을 가리지 말라는 요구에 더 가깝다. 생각이 분명하면 문장은 투명해진다. 반대로 생각이 모호하면, 문장은 불필요한 설명과 장황한 배경으로 두꺼워진다. 설명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더 보이지 않게 된다.
진서, 디디온, 오웰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도 결국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사유는 글의 바깥에서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글이 진행되는 방식 그 자체라는 점이다. 생각은 정리된 뒤에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쓰는 과정에서 비로소 형태를 갖는다.
사람들이 사유를 피하는 이유는 대개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 사유는 생각보다 훨씬 일상적인 행위다. 문제는 사유가 책임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요하다”라고 쓰는 일은 비교적 안전하다. 이미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해왔고,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러나 “왜 중요한가”, “누구에게 중요한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쪽은 누구인가”, “중요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는가”까지 나아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 순간부터 글은 더 이상 중립적인 설명이 아니라 분명한 입장이 된다. 입장이 생기면, 당연히 반대도 생긴다. 반론이 가능해지고, 질문을 받게 되고, 때로는 불편한 시선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유의 문턱에서 자주 멈춘다. 대신 이런 문장으로 방향을 튼다. “~라는 의견이 있다.”, “~라고 볼 수도 있다.”,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문장들만으로 글이 끝나면, 독자는 끝내 한 가지를 묻게 된다. “그래서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뭔가요?”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글은 끝까지 읽히기 어렵다. 독자는 정보를 따라가면서도 동시에 글쓴이를 찾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그 흔적이 보이지 않는 글은 아무리 친절해도 ‘누군가의 글’로 기억되지 않는다. 독자는 사실을 확인하는 동안에도, 그 사실이 어떤 판단을 거쳐 선택되었는지를 감지한다. 그 판단의 경로가 보일 때만 글은 하나의 목소리로 읽힌다.
물론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양서는 객관성이 중요한데, 개인적 해석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위험하지 않나?” 맞는 말이다. 근거 없는 주장이나 논리의 비약은 독자를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객관성과 사유는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논픽션 글에서는 사유가 부재하면 객관성도 작동하지 않는다.
사실을 어떤 순서로 제시할지, 어떤 맥락을 붙일지,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덜어낼지. 이 모든 선택에는 이미 작가의 판단이 들어간다. 판단이 개입되면 관점은 피할 수 없다. 관점이 분명하지 않으면, 글은 그 빈자리를 설명으로 채운다. 배경은 길어지고, 문장은 두꺼워지지만, 중심은 오히려 흐려진다.
독자는 그런 글을 왜 끝까지 읽지 않을까?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 정보가 어디로 향하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는 책을 위키피디아처럼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정확한 정보만 필요했다면 검색으로 충분하다. 독자가 책에서 찾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그 정보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작가의 관점이다.
내가 『최소한의 과학 공부』를 쓰며 깨달은 점도 바로 이것이었다. 지식을 최대한 많이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지식을 어떤 맥락으로 배치하고, 어떤 관계로 연결할 것이며, 그것이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밝히는 일이 더 중요했다. 독자는 지식을 그 자체로 소비하지 않는다. 작가의 눈을 통해 다시 이해한다. 그래서 논픽션 글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아느냐보다, 그 앎을 어디에 놓느냐이다.
사유를 말하면 많은 사람이 겁부터 낸다. 뭔가 대단한 철학이나 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글에서 사유가 부족해지는 이유는 그런 데 있지 않다. 대부분 문제는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아서 생긴다.
우리는 흔히 사실을 제시하는 데서 멈춘다. “이런 일이 있었다”, “이런 변화가 나타났다”, “이런 점이 중요하다”까지는 쓴다. 하지만 그다음이 빠진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나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이 사실을 굳이 여기서 꺼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사유는 거기서 시작되는데, 많은 글은 그 문장 앞에서 멈춘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이론이나 독창적인 통찰이 아니다. 이미 써놓은 문장 하나를 붙잡고, “그래서?”를 한 번 더 묻는 것이다. 이 변화가 왜 흥미로운지, 이 사례가 왜 기억할 만한지, 이 정보를 왜 지금 꺼냈는지. 그 질문에 답하는 문장이 하나만 더 붙어도, 글은 설명에서 벗어난다. 독자는 그때 비로소 “아,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이해한다.
요컨대 논픽션에서 사유는 거창한 능력이 아니라 마무리를 피하지 않는 태도다. 사실을 던져놓고 물러서지 않고,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책임지고 말하는 것. 그 문장들이 꼭 필요하다. 그래야만 글이 요약‧정리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말로 남는다. 그리고 독자가 글을 끝까지 읽는 이유는 대부분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