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관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by 배대웅

흔히 글쓰기의 어려움은 쓸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남이 한 얘기를 피해 써야 해서 생긴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 수없이 반복된 논점, 익숙한 결론들. 그런 말들로 가득 찬 글은 독자의 시선을 오래 붙들기 어렵다. 그래서 글쓰기는 곧잘 '진부함과의 투쟁'이 된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이 투쟁의 초입에서 길을 잃는다는 데 있다. 막상 글을 쓰려고 앉으면, 내가 하려는 말은 이미 누군가 다 해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염두에 둔 키워드를 검색창에 넣는 순간, 비슷한 제목과 유사한 결론의 글들이 끝도 없이 쏟아진다. 새롭게 써보려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표현을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고친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 여전히 어딘가에서 본 듯한 느낌만 남는다. 말은 그럴듯한데, 누구의 글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 글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렇게 결론짓는다. “나는 독창적인 나만의 관점이 없어.”


하지만 진짜 문제는 관점의 유무가 아니다. 더 정확한 진단은 이것이다. “우리는 관점을 만드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오랫동안 정답이 있는 글, 평가받기 좋은 글, 틀리지 않는 안전한 글을 쓰는 훈련을 받아온 탓이다. 사실을 요약하고, 핵심을 정리하고, 무난한 결론으로 마무리하는 글쓰기. 물론 이 훈련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가지 능력은 충분히 길러지지 않았다. 같은 사실을 다르게 바라보는 능력, 다시 말해 관점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마다 딜레마와 마주한다.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압박과, 그렇다고 너무 튀면 안 된다는 두려움. 그 사이에서 머뭇거리다 결국 안전한 길로 돌아온다. 이미 익숙한 표현과 검증된 결론으로. 그러니 글은 점점 비슷해지고, 독자는 점점 빨리 페이지를 덮는다.


자기 글을 쓰는 작가가 되려면 이 문제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그러니 정면으로 한번 다뤄보자. 남들과 다른 글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그리고 그 차이가 재능이 아니라 훈련의 결과라면, 우리는 무엇을 연습해야 하는가?


진부함은 표현이 아니라 질문에서 생긴다


보통 글이 진부하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표현부터 고치려 한다. 단어를 바꾸고, 문장을 더 멋있게 다듬고, 비유를 하나 더 얹어본다. 하지만 그렇게 손을 봐도 글의 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부함의 뿌리는 표현이 아니라 사고에 있기 때문이다. 남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면 글도 똑같아질 수밖에 없다. 문장이 아무리 매끄러워도, 그 문장이 답하고 있는 질문이 이미 수없이 소비된 것이라면, 독자에게는 새로울 게 없다.


윌리엄 진서는 여행기를 예로 들며 이 점을 지적한다. 해변을 묘사하면서 “모래가 희고, 갈매기가 난다”라는 식의 문장은 의심해 보라고 말한다. 그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해변의 모래는 대개 희고, 갈매기는 날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문장이 틀렸다는 데 있지 않다. 그 문장이 아무 생각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 장면에서 글쓴이는 그저 ‘보이는 것’을 나열했을 뿐, 왜 그것을 말하는지, 그 풍경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래서 독자는 속으로 이렇게 반응한다. “그건 나도 알아.”


김영하가 고전의 가치를 강조하는 대목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는 오래 살아남은 고전이란, “처음부터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웠던 책들”이라고 말한다. 고전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작품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시대의 진부함과 싸우며 등장했다. 다시 말해 고전의 핵심은 문체의 화려함이 아니라, 당대인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관념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균열을 일으켰다는 점에 있다.


두 작가의 말이 가리키는 지점은 분명하다. 진부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표현을 갈아엎는 데 있지 않다. 사고의 출발점, 다시 말해 어디서부터 생각을 시작하느냐를 바꾸는 데 있다. 같은 사실을 두고도 전혀 다른 글이 나오는 이유는, 결론이 달라서가 아니라 처음 던진 질문이 달랐기 때문이다.


요컨대 관점이란 같은 사실을 어디로 밀어붙일지 결정하는 질문의 선택이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보다, 어디에서부터 묻기 시작할 것인가가 글의 방향과 밀도를 좌우한다. 진부함을 피한 글은 언제나 정보의 양이 아니라 질문의 각도에서 갈라진다.


관점을 기르는 기본 연습


그렇다면 남들과 다른 관점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분명한 조건은 있다. 관점은 우연한 영감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꾸준한 연습의 결과로 생긴다. 그 연습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재료를 쌓는 일, 그 재료를 재배열하는 일, 그리고 끝까지 말하려는 태도.


1) 독서는 관점의 재료를 늘린다


우선 독서는 관점의 재료를 마련해 준다. 다양한 분야의 책과 글을 접하다 보면 머릿속에 정보와 지식, 어휘와 표현들이 쌓인다. 이는 일종의 재료 창고다. 재료가 풍부하면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더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컨대 슬픈 감정을 표현한다고 해보자. 읽은 것이 많지 않다면 “마음이 아프다”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 작품에서 인상 깊게 읽은 문장이나, 철학서에서 접한 비유가 있다면 선택지는 늘어난다.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거나, 상황으로 풀어내거나, 관계 속에서 설명할 수도 있다. 이처럼 폭넓은 독서는 글쓰기의 원재료를 다양화해 주고, 상투적인 표현의 반복을 막아준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 버리면 관점은 생기지 않는다. 그저 재료만 많아졌을 뿐이다.


2) 사유는 재료를 재배열하는 힘이다


재료를 요리하는 건 글쓴이의 몫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사유, 즉 곱씹어 생각하는 연습이다. 읽은 것을 곧장 글로 옮기면, 남의 문장을 정리하는 데서 끝난다. 관점은 한 번 더 생각할 때 생긴다.


이때 유용한 방식이 질문이다. 사실이나 정보를 접했을 때 곧바로 받아 적지 말고, 스스로에게 한 번 더 묻는 것이다. “그래서 이게 왜 중요한가?”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데, 다른 해석은 없을까?” “이 정보와 저 정보를 같이 놓으면 어떤 그림이 보일까?”


이 질문들은 대단한 철학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을 한 단계 더 밀어붙인다. 그렇게 하면 같은 자료도 전혀 다른 맥락으로 연결되고, 내 경험과 만나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독서가 재료를 제공한다면, 사유는 그 재료의 배치를 바꾸는 작업이다. 관점은 바로 이 재배열의 순간에 형성된다.


3) 관점은 문장을 끝까지 써야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다. 끝까지 말하려는 태도다. 많은 글이 “이런 일이 있었다”, “이런 변화가 나타났다”까지는 쓴다. 하지만 그다음 문장이 빠진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이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을 쓰는 순간 글은 중립적인 사실에서 벗어난다. 반박의 대상이 되고, 논쟁의 가능성이 생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문장 앞에서 멈춘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책임을 지기 싫어서다. 하지만 관점은 바로 그 책임의 지점에서만 생긴다.


왜 이 사실을 굳이 여기서 꺼냈는지,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한지까지 말해야 비로소 글은 한 사람의 말이 된다. 마지막 한 문장이 붙으면 글은 설명을 넘어 사유가 된다. 관점을 가진 글쓰기는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문장의 끝까지 밀고 나가는 습관에서 시작된다.


진부함을 깨는 작가들의 비법


그렇다면 실제 작가들은 어떻게 진부함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관점을 만들어낼까? 세 명의 작가를 예시로 살펴보자.


1) 무라카미 하루키: 감정을 말하지 않고 장면으로 보여주기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젊은 시절부터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등 영미 문학을 폭넓게 섭렵했다. 그 영향으로 일본 문단의 전통적 문체와는 다른, 간결하고 리듬감 있는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러나 하루키 글의 힘은 문장이 그저 세련되었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의 핵심은 감정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전혀 다른 장면으로 치환하는 시선에 있다.


“인생이란 비스킷 깡통이라 생각하면 돼. …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 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삶에는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 그중 먼저 좋은 것만 골라 쓰면 나중엔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만 남는다는 통찰은 새롭지 않다. 하지만 하루키는 이 평범한 인식을 ‘비스킷 깡통’이라는 일상적 사물로 옮겨놓는다. 추상적인 삶의 원리를 구체적인 촉감과 이미지로 바꾸는 순간, 독자는 설명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네가 정말로 좋아, 미도리."
"얼마나 좋아?"
"봄날의 곰만큼 좋아."
"봄날의 곰?" 미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뭔데, 봄날의 곰이?"
"네가 봄날 들판을 혼자서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벨벳 같은 털을 가진 눈이 부리부리한 귀여운 새끼 곰이 다가와. 그리고 네게 이렇게 말해.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너랑 새끼 곰은 서로를 끌어안고 토끼풀이 무성한 언덕 비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 종일 놀아. 그런 거, 멋지잖아?"
"정말로 멋져."
"그 정도로 네가 좋아."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해”라는 문장은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감정을 환기하지 못한다. 하루키는 대신 ‘봄날의 곰’ 이야기를 꺼낸다. 봄날의 풍경, 새끼 곰의 촉감, 언덕을 구르는 움직임. 독자들은 마치 한 편의 짧은 동화를 읽는 듯한 생생한 이미지를 얻는다. 이렇게 감정은 말이 아닌 이미지와 경험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된다.


하루키가 진부함을 벗어나는 방식은 명확하다. 그는 감정을 더 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이나 삶의 판단을 장면과 사물로 번역한다. “인생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하는 대신, 비스킷 깡통을 꺼내 삶의 리듬을 보여준다. “사랑한다”라고 선언하는 대신, 봄날 들판과 새끼 곰의 촉감을 불러와 사랑의 온도를 느끼게 한다. 즉 하루키가 바꾸는 것은 결론이 아니라 표현의 출발점이다. 추상적 진술이 아니라 감각적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이 출발점의 작은 이동이 상투적인 문장을 새롭게 만들고, 독자의 기억에 남는 문장으로 바꾼다.


2) 안토니오 그람시: 복잡한 현실을 구조의 언어로 재배열하기


안토니오 그람시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사상가다. 파시즘에 맞서다 투옥된 그는 감옥 안에서도 방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글에서 인상적인 점은, 당대의 이론가들과 달리 난해한 학술용어 대신 일상의 언어로 복잡한 현실을 새롭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중에서


당시 보편적인 생각으로는 공황이나 전쟁 같은 사건이 위기를 부른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람시는 위기를 하나의 '상태'로 규정했다. 즉 오래된 질서는 사라져 가는데, 그것을 대체할 질서는 아직 자리잡지 못한 사이의 공백 상태, 그 자체가 위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당시의 통념을 해체하고 다른 맥락에서 재조립한 문장이었다. 위기를 외부에서 가해지는 사건이 아니라, 내부에서 형성되는 구조의 문제로 이동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성으로는 비관하더라도, 의지로는 낙관하라.”

-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중에서


이 문장도 같은 계열에 있다. 보통 비관과 낙관은 서로 대립하는 태도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람시는 현실을 판단하는 냉철한 지성은 비관적이어도 좋다고 말한다. 세상일을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것이다. 단,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은 끝까지 낙관적으로 붙들라고 한다. 쉽게 말해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가지라는 뜻이다. 이 문장은 오래된 격언처럼 들리지만, 당대의 혁명가였던 그에게는 치열한 실천의 결과였다. 누구나 할 법한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되 행동은 포기하지 않는 혁명가의 자세를 제시한 것이다.


그람시도 새로운 정보를 덧붙이지 않는다. 대신 익숙한 개념들의 관계를 다시 배치한다. 사건을 개인의 실패나 우연으로 보지 않고, 구조와 상태의 문제로 옮긴다. 진부함에서 벗어나는 그의 방법은, 현실을 설명하는 언어의 배열을 바꾸는 데 있다.


3) 베르톨트 브레히트: 질문의 방향 자체를 뒤집기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독일 표현주의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권력의 폭력을 고발했지만, 차가운 이론 대신 인간의 감정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의 문장 가운데 특히 널리 인용되는 것이 있다.


“영웅이 없는 나라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가 불행하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갈릴레이의 생애』 중에서


이 문장이 강렬한 이유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질문의 방향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묻는다. “왜 우리 사회에는 영웅이 없을까?” “왜 결정적인 순간에 훌륭한 누군가가 나서주지 않을까?” 브레히트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문제는 영웅의 부재가 아니라, 영웅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라는 것이다.


영웅은 초인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영웅이 될 수 없고, 한 사회에서 영웅이 나타날 확률은 매우 낮다. 그래서 영웅을 바라는 마음은 일확천금을 기대하는 도박의 심리와 비슷하다. 훗날 움베르토 에코도 이 문장을 인용해 "영웅이 있다는 믿음은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라고 꼬집었다. 즉 개인보다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위대한 개인의 능력만을 기대하는 사회는 행복할 수 없다. 일상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누가 통치하든 일정 수준 이상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더 좋은 사회다.


이렇게 질문의 초점을 개인에서 구조로 이동시키는 순간, 문제의 성격 자체가 바뀐다. 브레히트의 이 문장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답을 직접 제시하기보다는, 우리가 어떤 질문에 갇혀 있었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방식이다.


작가들로부터 얻는 교훈


무라카미 하루키, 안토니오 그람시,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진부함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재료를 찾지 않았다. 대신 익숙한 세계를 다른 질문으로 다시 드러내 보였다. 하루키는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장면으로 옮겼고, 그람시는 사건을 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로 재배열했으며, 브레히트는 질문의 방향 자체를 뒤집었다.


이 사례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관점이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질문을 선택하는 방식의 차이라는 것. 무엇을 말할 것인가 보다, 어디에서부터 묻기 시작할 것인가가 글의 방향을 바꾼다. 진부함에서 벗어난 글은 언제나 같은 사실을 조금 다른 자리에 놓아본 결과물이다.


따라서 글을 쓸 때 필요한 것은 완전히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앞에서 한 번 더 멈춰 서서 묻는 태도다. “정말 이 질문이 전부일까?”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자. 관점이란 바로 그 순간, 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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