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기준선을 먼저 세우자
이제 본격적인 글쓰기 실전에 들어간다. 이전까지는 글쓰기에 필요한 사전 준비 - 글을 쓰려는 의지와 태도, 다루려는 주제의 발견, 독서와 사유의 방법 - 를 살펴보았다. 그 준비 단계를 통과했으니, 이제부터는 글쓰기 기술의 영역으로 넘어갈 차례다. 글을 어떻게 구성하고, 문장을 어떻게 만들며, 완성된 글을 어떻게 다듬을 것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글쓰기 방법론의 한 세트이며, 앞서 쌓은 토대를 바탕으로 실제 글을 쓰고 다듬는 과정에 해당한다.
그 첫걸음으로 던져야 할 질문은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다. 글쓰기 방법을 익히기 전에, 무엇이 좋은 글이고 나쁜 글인지 기준부터 세우자는 것이다. 이는 건축에서 설계를 시작하기 전에 기준선과 구조 원칙을 먼저 정하는 일과 같다.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기둥을 세우면, 공사가 진행될수록 수정 비용만 늘어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좋은 글의 기준이 정해지지 않은 채 기술부터 익히면, 고칠수록 글 전체가 흔들린다.
이는 글쓰기의 철학을 세우는 일과도 같다. 정치인에게 정치철학이 있고, 기업인에게 경영철학이 있듯, 작가에게도 글쓰기 철학이 필요하다. 글의 종류나 형식, 주제나 스타일과 무관하게 적용되는 단단한 원칙 말이다. 이것이 없으면 그럴듯한 문장을 흉내 내는 데서 글쓰기를 시작하고, 기교만 늘릴 뿐 무엇이 문제인지 끝내 짚지 못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글쓰기를 고민하지만, 그것들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수렴하는 경우가 많다. 좋은 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다는 것. 이 장은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한 출발점이다.
물론 좋은 글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는 “그걸 어떻게 한마디로 말해?” 하거나 “사람마다 다 다른 법 아니냐?”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분명 글의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 주관적인 면이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나쁜 글이란 무엇인가? 누가 봐도 “이건 아니다”라고 할 만한, 글에 공통되는 최악의 요소는 무엇일까?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글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글”이다. 문법에 맞게 쓰였고 의미가 적합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읽고 나면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잡히지 않는 글이야말로 최악이다. A를 말하려는 건지 B를 말하려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글. 현학과 과시의 표현이 첩첩산중 쌓여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는 글. 논지가 미로 속을 뱅뱅 돌다가 결국 지리멸렬해 버리는 글. 이런 글이 바로 ‘망글’이다. 그리고 이런 글을 양산하는 망글러들도 생각보다 많다. 당장 글쓰기 플랫폼의 인기 글 목록을 둘러보라. 번지르르해 보이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글은 바로 이와 정반대에 있는 글일 것이다. “누구나 읽으면 뜻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글” 다시 말해 "100명이 읽으면 100명 모두가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글"이 좋은 글이다. 글은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의 수단이자 도구이다. 따라서 글은 파격적이고 난해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편리한 가전제품처럼 사용자 친화적이어야 한다. 작가 역시 예술가라기보다 기술자에 가깝다. 최첨단 전자제품일수록 조작 방법이 직관적이고 쉬운 법이다. 사용자들이 제품 사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 기술은 훌륭한데 사용자들 수준이 낮다”라고 탓해서는 기술자의 자격이 없다. 마찬가지로, 독자가 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잘못은 온전히 글쓴이에게 있다.
물론 모든 글에 이 기준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글의 목적에 따라 일부러 어렵게 쓰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문학이나 난해한 시가 그렇다. 이런 글들은 애초에 의미를 하나로 고정해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해석의 여지를 남기거나, 언어의 의미보다는 리듬과 이미지, 감각적 충돌 같은 예술적 체험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이 경우 독자마다 다른 이해와 반응이 생기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작품이 의도한 성취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그런 종류의 글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글쓰기는 지식, 생각, 설명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글, 다시 말해 논픽션과 비문학 글을 전제로 한다. 전기, 칼럼, 에세이, 보고서, 해설서, 교양서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 범위의 글에서 핵심 목표는 분명하다. 독자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가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라는 말이 미덕이 되기 어렵다. 독자가 제각기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글은 제 기능을 못한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좋은 글의 정의는 모든 글에 대한 보편적 선언이 아니다. 이 책이 다루는 글의 세부 영역에 대한 작업 규정에 가깝다. 이 영역에서 글은 예술작품이기보다는 도구이며, 작가는 감상을 유도하는 예술가라기보다 이해를 설계하는 엔지니어에 가깝다. 그 목적이 뚜렷한 만큼 기준도 명확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좋은 글이란, 독자에게 의미가 흔들림 없이 전달되는 글이다.
이 당연해 보이는 기준을 글쓰기의 최우선 순위에 놓으면, 글을 다루는 태도부터 근본적으로 바뀐다. 만약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 글은 실패한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글은 종이 낭비, 또는 데이터 낭비일 뿐이다. 작가로서 아무리 고매한 의도와 독창적인 생각을 가졌더라도,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면 세상에 내놓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글이 “읽는 사람이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글”일까? 첫 번째 사례로, 한 문장에 너무 많은 정보를 욱여넣어 복잡하고 길기만 한 문장을 보자. 마치 학술 논문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하는 아래 예시는, 일단 문법적으로 틀린 곳은 없다. 그러나 한 번에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예시 1 - 학술 서적 스타일 원문
본 연구의 목적은 복잡다단한 서사 구조 분석을 통하여 텍스트의 내러티브적 효과를 고찰하고, 이를 기반으로 독자의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 생산의 양상을 다각도로 규명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문학 작품의 이해 및 해석에 관한 보다 보편적인 이론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에 있다.
아마 처음 한 번에 이 문장의 뜻을 완벽히 짚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겉보기에 그럴듯한 전문 용어를 동원했지만, 핵심 주장이 무엇인지 문장의 후반부까지 가봐야 알 수 있고, 그마저도 흐릿하다. 한 문장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다 보니 독자는 주어와 서술어, 핵심 주장과 부가 설명의 관계를 놓치기 쉽다. 소위 ‘통으로 삼켜야 하는 문장’이다. 이런 문장은 종종 학술논문이나 이론서에서 볼 수 있다.
그럼 이 문장을 쉽게 고쳐 보자. 긴 문장을 몇 개의 짧은 문장으로 쪼개고, 어렵고 추상적인 표현은 풀어서 써본다. 핵심 주장은 최대한 앞부분에서 드러내도록 조정한다.
예시 1 –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다듬은 글
이 연구의 목적은 문학 작품의 의미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작품의 복잡한 서사 구조를 분석할 것이다. 그 결과를 토대로, 독자가 작품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작품 해석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원래 한 문장으로 길게 늘어놨던 내용을 네 문장으로 분리했다. 우선 첫 문장에서 연구의 핵심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했다. 독자는 이것만 읽어도 “아, 이 글은 문학 작품의 의미 생성 과정을 밝히려는 거구나” 하고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이어지는 문장들은 각각 하나의 단계나 근거를 담아서 논지를 전개한다. 원문에서는 주절과 종속절이 겹겹이 쌓여 있어서 독자가 “뭘 어떻게 한단 거지?” 하며 되짚어야 했다. 그러나 고쳐 쓴 글은 논지를 순차적으로 배열했다. 앞 문장을 이해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또한 어려운 개념어 투성이들도 가능한 풀어쓰거나 일상적인 말로 바꾸었다. 예컨대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 생산의 양상을 규명한다”라는 부분을 “독자가 작품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지 살펴본다”로 바꾸니 훨씬 직관적으로 와닿는다. 이렇게 문장이 짧아지고 표현이 쉬워지면, 전문적인 내용이라 할지라도 독자가 이해하기 쉬워진다. 말 그대로 “100명이 읽으면 100명이 같은 취지로 이해”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물론 어떤 글은 다루는 주제 자체가 난해해서 어휘나 개념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설명은 더욱 쉬워져야 한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 수학적 내용을 평이하게 풀어쓴 입문서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모든 물리 이론은 어린아이에게조차 이해될 만큼 단순한 설명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자 피터 싱어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분명하게 말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분명하게 생각되지 않은 것이다.”
결국 내가 완벽히 이해했다면 남에게도 쉽게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남에게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써놓았다면, 그것은 글쓴이가 개념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쓰는 건 작가의 역량이다.
두 번째 사례는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으나 글쓴이가 애써 현학적으로 꾸며 놓은 글이다. 마치 깊은 통찰을 담은 양 포장하고 있지만, 읽어보면 거창한 수사 뒤에 상투적인 이야기일 때가 많다. 이런 유형의 글은 문장이 굳이 어려울 필요가 없음에도, ‘있어 보이는 표현’을 남발해서 독자가 피로감을 느끼게 한다. 지식인의 허세나 포스트모던적 문풍을 흉내 내다가 오히려 뜻이 모호해지는 경우다. 아래 예문을 보자.
예시 2 – 현학적‧과시적 스타일 원문
현대 사회의 모순 구조는 거시적 차원에서 자본 권력이 구축한 헤게모니적 담론과 미시적 일상에 내재된 규율 권력이 길항하는 과정에서 발현된다. 이 억압 장치의 탈주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주체적 각성인데, 이는 구조적 모순을 탈구축하고 새로운 존재론적 좌표를 설정하려는 의지로써 표출된다. 이러한 실천은 기존의 지배 담론을 근본에서부터 해체하여 래디컬한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겉보기에 어려운 용어(헤게모니, 길항, 탈주, 탈구축…)가 가득하고 영어까지 섞여 있으니, 뭔가 대단한 내용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잘 뜯어보면 하고 싶은 주장은 뻔할 가능성이 크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일수록 글을 어렵게 꾸미고 싶은 유혹이 생기기 마련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도 이를 이렇게 지적했다. “자신이 심오하다고 아는 사람들은 명료함을 추구한다. 심오해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모호함을 추구한다. 대중은 무언가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으면 심오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짜로 내실 있는 사상가일수록 생각을 최대한 쉽게 전달하려 하고, 실속 없는 이들은 불필요하게 어려운 말로 자신을 포장한다는 의미다. 전문 용어나 추상어를 쓴다고 글이 저절로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위 예시 2의 글도 쉽게 고쳐 보자. 어려운 단어를 일상적 어휘로 대체하고, 추상적인 개념은 구체적인 상황이나 의미로 풀어쓴다. 군더더기 수식어도 쳐낸다. 문장 구조도 가능한 한 평이하게 바꾸어 보았다.
예시 2 –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다듬은 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순은 보이지 않는 힘이 개인을 억압함으로써 발생한다. 이러한 억압에서 벗어나려면 개인 각자가 깨어나야 한다. 즉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생각들을 부수고 새로운 기준을 세우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작은 실천이라도 모두가 이렇게 깨어날 때, 비로소 기존 질서를 바꾸는 급진적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이렇게 바꾸니 훨씬 읽기 수월해졌다. 화려함은 줄었을지 몰라도 내용은 명확해졌다. 원문에서는 한 문장 안에 여러 한자어와 추상어를 겹쳐 써서 의미가 흐렸지만, 고쳐 쓴 글은 한 문장에 한 가지 핵심 생각만 담도록 정돈했다. 예컨대 “구조적 모순을 탈구축하고 새로운 존재론적 좌표를 설정하려는 의지”는 “당연하게 여겨온 생각들을 부수고 새로운 기준을 세우려는 의지”로 풀어쓰니 곧바로 이해된다. 래디컬도 굳이 영어로 안 써도 되고, 한국어로 급진적이라고 쓰는 편이 독자가 이해하기에 낫다. 이렇듯 불필요한 외국어나 전문용어는 가급적 쓰지 않는 편이 좋다. 꼭 필요한 경우라면 뜻을 병기해서 독자를 배려해야 한다.
쉽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다. 작가의 의식적인 노력과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다. 쓸 때는 편하게 생각나는 대로 썼으나 결국 독자가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그 불편함은 본래 작가가 사전에 감당하는 것이어야 했다는 뜻이다.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의 말을 꼭 기억하자. “읽기 쉬운 글은 쓰기 어렵다.” 대충 쓰고 독자더러 알아들으라고 떠넘기는 태도는 진정한 작가의 자세가 아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쓴 글일수록 독자에게 술술 읽히는 법이다. 쉽게 읽히는 글을 얻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려운 작업이 반복된다. 작가라면 이 역설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내 글이 “100명이 읽으면 100명이 똑같이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했는지 점검해 보자. 글쓰기 강좌 등에서 쓰이는 ‘할머니 테스트’라는 것이 있다. “만약 당신이 아는 것을 할머니에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예를 들면 당신의 할머니)에게도 이해시킬 수 있을 정도로 풀어낼 수 있어야 정말 그 내용을 숙지한 것이고, 그래야 좋은 글이 된다는 의미다.
글을 다 쓴 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 던져 보자. 과연 할머니라도 이해할 수 있을지, ‘할머니 테스트’를 적용해 독자 입장에서 글을 점검하는 것이다.
·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무엇인가? - 내 글의 주제나 주장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 본다. 만약 요약이 불가능하다면 글의 초점이 흐려진 것일 수 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스스로 명확히 모른다면, 읽는 이도 당연히 혼란을 느낄 것이다.
· 첫 단락을 읽으면 누가 무엇을 왜 말하는지 드러나는가? - 글의 도입부에서 주제와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독자가 글의 방향을 잡고 따라갈 수 있다. 첫 단락을 읽고도 “이 글에서 무엇을 다루려는 거지?”가 불분명하다면 서론을 고쳐야 한다.
· 글의 중간에 독자가 길을 잃을 만한 부분은 없는가? – 글을 천천히 읽으며 독자의 시선으로 따라가 보라. 어떤 문장이나 단락에서 앞부분과 연결이 어색하거나 논리가 비약해서, 독자가 “이게 갑자기 무슨 얘기지?” 하고 멈출 만한 지점은 없는지 점검한다. 그런 부분이 있다면 친절한 이행 문장을 넣어 주거나 내용을 재배열해서 흐름을 매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위 사항들을 점검하며 글을 다듬으면, 최소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는 평은 듣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전하려는 의미를 빠짐없이, 정확하게 독자에게 심어주는 글, 그것이야말로 좋은 글의 기준선이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만 더. 사실 위에서 인용한 글쓰기 격언 - “만약 당신이 아는 것을 할머니에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 은 아인슈타인이 직접 한 말은 아니다. 원문은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물리 법칙은 술집 여종업원에게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이다. 아마도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말로 변형되어 후대에 전해진 것 같다. 그러나 아인슈타인도 평소에 어려운 지식을 쉽고 단순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러 차례 같은 취지의 말을 남겼고, 논문 외에도 다양한 대중적 글쓰기를 통해 이를 실천했다.
명료한 글쓰기는 명확한 사고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렇게 명료하게 쓰인 글만이 독자의 마음에 온전히 닿을 수 있다. 앞으로 다룰 구성, 문장, 퇴고의 모든 과정에서도 이 기준선을 계속 붙들고 갈 것이다. 이러한 ‘좋은 글의 정의’를 나침반 삼아, 본격적으로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글쓰기의 여정으로 들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