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1987), 「노르웨이의 숲」
흔히 “빠가 까를 만든다”라고 한다. 어떤 대상의 열성팬(빠)이 그 지나친 열정 때문에 되려 안티팬(까)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나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연도 그랬다. 오랫동안 나는 하루키에 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약간의 반감이 있었다. 2009년 그의 신작 『1Q84』가 출간되었을 때가 특히 그랬다. 당시 많은 사람이 카페 등을 배경으로 SNS에 인증샷을 올리며 “하루키 읽는 나”의 모습을 과시했다. 이 광경이 내게는 책을 읽는 척하며 세계적 작가의 브랜드만 소비하는 허세로 보였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물론 하루키라는 작가도 싫어졌다.
하지만 하루키는 워낙 대문호라 무작정 싫어하기가 좀 그랬다. 그래서 “일단 알고 나서 싫어하자”라는 마음에서 언젠가 책 한 권은 읽어봐야지 싶었다. 때마침 회사의 독서 지원 프로그램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별 기대 없이 책을 펼쳤는데, 의외로 단숨에 빨려들었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에는 어느새 하루키의 팬이 되어 있었다. 나는 매사에 호불호가 뚜렷한 성격이라, 한 번 싫어하게 된 것을 좋아하는 일이 좀처럼 없다. 그런 내가 하루키에 대해 까에서 빠로 입장을 바꾼 것은 인생에서 손꼽힐 만한 경험이었다.
사실 나는 소설 읽기를 즐기지 않는다. 감수성과 상상력이 부족해서 비유나 상징의 의미를 곧바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장 곳곳을 수놓은 화려한 메타포들을 만나면 흥미보다는 짜증이 앞서곤 한다. 또한 열린 결말처럼 해석을 독자에게 맡기는 서술에도 강한 거부감이 있다. 이야기를 시작하고 만들어온 사람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요컨대 나는 뚜렷한 주제의식을 선명한 메시지로 전달하는 책을 선호한다. 이러한 성향 탓에 그간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이런 나에게 『노르웨이의 숲』은 의외의 작품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소설은 내 독서 성향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조차 인물과 사건이 하나의 문제의식 아래 정확히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살핀다. 왜 이런 사건이 벌어졌는지, 이 인물의 선택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것들이 어떤 논지로 수렴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숲』은 이런 기대를 애초에 거부한다. 인물들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끝내 설명되지 않고, 사건들은 어떤 결론을 향해 정리되지도 않는다. 와타나베와 세 여성 -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 - 의 관계 역시 애매하게 흘러간다. 연인인지, 친구인지, 치유의 대상인지 불분명하다. 이야기의 조각들이 하나의 논지로 결집하기는커녕, 흩어져서 붕붕 떠다니는 느낌을 준다. 예전 같았으면 뭐 이딴 책이 다 있냐며 중간에 덮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럴 수가 없었다. 우선 작품 전반에 깊게 드리운 허무와 냉소의 정서가 묘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세련된 문체 역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결정적으로 달랐던 것은, 이 소설이 나에게 “이야기의 의미를 해석하라”가 아니라 “그 안에 머물러 보라”고 요구하는 방식으로 읽혔다는 점이다. 즉 인물들의 행동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 장면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따지는 대신, 그들이 놓인 공기와 거리, 말과 침묵의 리듬이 어떤 감정을 만들어내는지 따라가게 되었다. 마치 안개 속을 걷듯, 의미를 파악하려 애쓰기보다 그 분위기 속에 잠겨 버리는 독서였다. 이 새로운 방식이 나에게는 낯설면서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즉 이 소설은 메시지가 아니라 이미지로 읽는 독서의 가능성을 처음 체감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말로 해버리면 평범하지만 그때 나는 그것을 말로써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 덩어리로 몸속에서 느꼈다. 문진 안에도, 당구대 위에 놓인 빨갛고 하얀 공 네 개 안에도 죽음은 존재했다. 우리는 그것을 마치 아주 작은 먼지 입자처럼 폐 속으로 빨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편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 있는 게 아니다.
- 『노르웨이의 숲』55쪽
이 문장들은 죽음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든다. 당구공의 색, 문진의 질감, 폐 속으로 들어오는 먼지 같은 이미지들. 그것이 하나의 정서적 공기로써 죽음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의미의 해석보다 그 분위기 속에 잠길 때 더 강하게 다가온다. 또 다른 예시로 이런 구절도 있다.
"네가 정말로 좋아, 미도리."
"얼마나 좋아?"
"봄날의 곰만큼 좋아."
"봄날의 곰?" 미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뭔데, 봄날의 곰이?"
"네가 봄날 들판을 혼자서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벨벳 같은 털을 가진 눈이 부리부리한 귀여운 새끼 곰이 다가와. 그리고 네게 이렇게 말해.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너랑 새끼 곰은 서로를 끌어안고 토끼풀이 무성한 언덕 비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 종일 놀아. 그런 거, 멋지잖아?"
"정말로 멋져."
"그 정도로 네가 좋아."
- 『노르웨이의 숲』 452쪽
와타나베와 미도리의 이 대화에는 하루키 특유의 쿨하고 감각적인 문체가 잘 드러나 있다. 뻔한 사랑 고백을 이렇게 신선한 이미지로 풀어내는 문장은 독자에게 쾌감을 준다. 내가 주로 읽었던 사회과학 서적의 거대담론에서는 접할 수 없는 스타일리시함이었다. 이렇듯 『노르웨이의 숲』의 문장들은 메시지 자체보다 리듬을 타듯 이어지는 이미지의 향연으로 다가왔다.
『노르웨이의 숲』은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다. 소설의 배경에는 1960년대 말 일본이라는 시대상이 존재한다.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을 구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이 들끓었다. 특히 1968년 전후로 각 대학에서 결성된 전학공투회의(약칭 전공투)는 전국을 뒤흔든 사회현상이었다. 전공투는 대학 당국과 기성 체제에 맞서 바리케이드 점거와 시가전을 불사하며 캠퍼스를 ‘해방구’로 만들었다.
이 운동은 일본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5월 혁명, 미국의 반전·흑인민권운동, 독일의 신좌파 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68운동’의 동아시아적 변주였다. 냉전 질서와 베트남 전쟁, 관료화된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이 전 세계적으로 분출한 것이 바로 1968년이었다. 전공투는 그 흐름이 고도성장 속에서 제도화된 일본 사회와 대학을 향해 폭발한 형태였다.
그러나 뜨거웠던 운동의 열기는 1970년대 들어 급속히 식어버렸다. 1969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던 그들은 경찰에 진압되면서 대학 내부에서 패퇴했다. 일부 극렬파는 테러리즘으로 치달았다가 완전히 민심을 잃었다. 그렇게 운동이 소멸한 뒤 많은 학생이 허탈감 속에 일상으로 복귀했다. 『노르웨이의 숲』에도 이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동맹 휴교가 해제되고 기동대가 점령한 가운데 강의가 시작되자 맨 먼저 출석한 인간들도 동맹 휴교를 주도한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교실에 나와 필기를 하고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했다. … 나는 녀석들에게 다가가서 왜 동맹 휴교를 계속하지 않고 강의를 듣느냐고 물어보았다. 다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대답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출석 일수 부족으로 학점을 못 따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그런 작자들이 대학 해체를 부르짖었다고 생각하니 진짜 어이가 없었다.
- 『노르웨이의 숲』 102~103쪽
주인공 와타나베는 이렇게 체제에 쉽게 순응하는 자들이 대학 해체를 부르짖었다는 사실에 냉소를 보낸다. 이 대목은 당시 운동권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하루키 본인도 그 전공투 세대를 통과했다는 점이다. 1949년생인 하루키는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의 시위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1968년에서 70년에 걸쳐 우리가 한 일은 당시의 사회 체제에 대고 ‘아니오’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어떤 가치를 긍정하고 지향할지는 끝내 명확히 하지 못했다고 인정한다. 열정에 비해 뚜렷한 비전이 없는 운동은 좌절과 허무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입증한 셈이다.
이러한 인식은 『노르웨이의 숲』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작품 속 젊은이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거대담론을 냉소적으로 거부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출세지상주의에도,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는 투쟁에도 발 담그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랑, 우정, 죽음처럼 개인의 문제에 골몰한다. 일본 현대사를 대표하는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인물들은 철저히 개인화된 상실과 고독의 세계에 머무른다.
그래서 이 책은 1987년 출간 당시 전공투 세대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고 한다. 한때 강렬했던 이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물론 전공투 세대가 아닌 이들에게도 『노르웨이의 숲』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시대와 무관하게 누구나 겪을 법한 젊은 날의 상실과 고독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그것의 역사적 연원을을 알면, 이야기는 다른 깊이를 얻는다. 한국에서는 이 작품이 주로 연애소설이나 개인주의적 성장담으로 소비되곤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1968년 이후 일본의 한 세대가 겪은 정치적 패배에 대한 조용한 애도가 깔려 있다. 이 지점을 놓친다면 『노르웨이의 숲』의 매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1960년대 전공투 세대 이야기에는 흥미로운 후일담이 있다. 운동권 학생들이 사회로 복귀한 이후, 그들의 삶은 각양각색으로 전개되었다. 어떤 이는 실의에 빠져 조용히 살아갔지만, 어떤 이들은 운동 경력을 발판 삼아 출세 가도를 달리기도 했다. 한국에서 86세대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금배지를 달거나 사회지도층에 오른 상황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전공투의 리더였던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다른 길을 택했다. 도쿄대 물리학과에 수석 입학할 만큼 촉망받던 그는 1968년 도쿄대 전공투 의장으로 투쟁을 이끌었다가 수감되었다. 그런데 석방 후에도 학교나 제도권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재야에 머물며 과학사 연구에 몰두해 『과학의 탄생』 같은 중요한 저작들을 남겼다. 2015년 그가 오랜 침묵 끝에 펴낸 회고록 『나의 1960년대』라는 책이 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그 시절을 낭만화하지도, 전면 부정하지도 않는 객관적 태도다. 그는 실패와 비극을 인정하면서도 당시 맞섰던 사회의 부조리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나는 이 태도에서 전공투 세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책임 있는 자기 인식을 본다. 또한 그의 독특한 과학사 재구성 작업은 과학 교양서를 쓰는 데에도 중요한 레퍼런스가 된다.
이렇게 전공투 세대를 그린 『노르웨이의 숲』의 정서가 유난히 강하게 와 닿았던 이유가 있다. 나 역시 그와 조금은 비슷한 시간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1999년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한국의 학생운동은 이미 한 세대를 불태우고 난 뒤 서서히 절멸해 가고 있었다. 우리는 선배들처럼 시대를 흔들 수는 없었다. 다만 “대학생이라면 뭔가 해야 한다”라는 도덕적 압력 속에서 반미(反美)와 사회변혁의 테제를 그저 반복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매향리 미군기지 반대, 의왕 포도원 철거 반대, 이라크 파병 반대, 한·칠레 FTA 반대 등의 투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두 종류의 회의가 쌓였다. 하나는 생활의 차원에서였다. 입으로는 진보와 해방을 말하면서, 일상의 태도와 실천에서는 조금도 진보적이지 않은 선배들의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또 하나는 이론의 차원에서였다. 식민지 반자본주의론이나 NL 노선처럼, 세계를 지나치게 단순한 도식으로 재단하는 변혁 이론들이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자각이 들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나는 졸업을 1년 앞두고 조용히 활동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온갖 거대담론이나 대의명분과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노르웨이의 숲』이 그리는 허무와 냉소의 정서가 추상적인 묘사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 내면에 분명히 존재했으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정서를 정확히 대변해주는 듯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을 때,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관한 고백으로도 읽을 수 있었다.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통틀어 매우 예외적인 작품이다. 1천만 부 이상 팔리며 하루키를 스타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지만, 작품 경향이나 작법 면에서는 철저히 비주류적 시도였다. 원래 하루키는 판타지와 오컬트에 기초한 스토리텔링을 즐기는 작가다.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2010년대 『1Q84』, 『기사단장 죽이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설 다수는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두 개의 달이 뜬 하늘, 갑자기 평행 세계로 건너가는 주인공, 정체불명의 존재와 조우하는 결말 등은 특히 익숙한 장치다. 이러한 요소들은 작품을 난해하게 만들기도 하고, 독자에 따라서는 – 나도 그렇다 – 불호가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루키 본인은 이러한 작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과 세계의 어두운 심연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숲』은 100% 리얼리즘 소설이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그 어떤 기이한 판타지 없이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이는 집필 당시 하루키의 전략적 선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79년 등단 이후 전위적인 작풍으로 마니아층의 인기를 얻었으나, 한편으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이기도 했다. 문단 주류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일반 독자들에게 폭넓게 어필할 작품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87년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것이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하루키의 여행기 『먼 북소리』에서 집필 당시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1980년대 초 그는 일본을 떠나 유럽에 머물며 이 작품을 썼다. 고국과 거리를 두며 과거의 시간과 자신을 돌아보려는 의도였다. 그 자신이 “반드시 써야 했던 소설”이라고 할 정도로 절박하게 집필한 작품이었고, 그래서인지 편집자에게 최종본을 건낼 때는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장담했다. 이렇게 보면 대가는 대중에게 먹힐 작품을 쓰려고 작정하면 실제로 해내는 모양이다. 하루키의 예상대로 『노르웨이의 숲』은 출간 직후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성공을 거둔 하루키는 다시 본래의 초현실주의 노선으로 복귀했다. 15편이 넘는 그의 장편소설 중에 리얼리즘으로 분류되는 작품은 매우 드물다. 1992년작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나 2013년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정도만이 해당될 뿐이다. 나머지 작품들은 크고 작은 판타지적 색채를 띤다. 이 점에서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 월드의 특이점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특이한 작품이 그의 소설 중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대표작으로 남았다. 1988년 신해철이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하기 위해 <그대에게>를 쓰고, 결국 정통 하드록으로 돌아간 것과 비슷하다(그럼에도 최대의 히트곡은 역시 <그대에게>인 것도 비슷하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 반, 유명세 반으로 가볍게 집어 든 책이었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 이토록 할 말이 많은 작품이 될 줄은 몰랐다. 그만큼 『노르웨이의 숲』은 내게 여러 측면에서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앞서 말했듯, 메시지 중심의 독서관을 깨고 이미지와 분위기로 소설을 느끼는 법을 알게 해주었다. 스타일 면에서도 간결하고 세련된 문장이 내가 추구하고 싶은 글쓰기 모델이 되었다. 거대담론 일색이던 나의 독서 취향에 개인적 정서의 섬세함을 음미하는 즐거움을 더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품 저변에 흐르는 허무의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삶에서 필연적으로 겪는 상실과 좌절의 순간마다 되살아나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살아가며 크고 작은 상실을 겪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경험뿐만 아니라, 한때 삶의 중심이었던 무엇이 어느 날 사라져 버릴 때도 그렇다. 나 역시 그런 순간들을 여러 번 지나왔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질문은 하나였다. 이렇게 무너진 자리에서, 인간은 어떻게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까? 『노르웨이의 숲』은 이 질문에 의외로 냉정한 방식으로 답한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 『노르웨이의 숲』 529~530쪽
이 문장은 따뜻한 위로라기보다는 차가운 진실에 가깝다. 오히려 그래서 위안이 된다. 인생의 허무란 극복할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야 할 조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이 꼭 거창한 깨우침을 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을, 조금 다른 거리에서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에게는 『노르웨이의 숲』이 그랬다. 이 소설은 상실과 허무의 근원을 파고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곁에 두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하루키를 이렇게 인식하게 되었다. 허무와 상실을 가장 냉정하게 응시하는 사상가이자, 그것을 가장 세련된 문장으로 구현해내는 스타일리스트. 사상가와 스타일리스트라니 언뜻 상충되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두 요소는 서로를 보완한다. 차가운 인식이 없으면 문체는 장식에 그치고, 문체가 없으면 인식은 독자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하루키는 그 둘을 하나의 호흡 안에서 엮을 줄 아는 작가다.
과학 교양서를 쓰는 나에게도 이것은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다. 과학 글은 개념과 논리 자체가 난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독자는 본격적인 이해에 이르기 전에 벌써 지쳐 버리곤 한다. 그런데 하루키의 문장은 난해한 내용을 경쾌한 리듬과 명료한 문장 위에 실어 나른다. 겉으로는 쉽게 읽히지만, 속에는 중후한 질문이 남아 있는 이중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과학 글쓰기도 그런 방식으로 독자에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소설을 계기로 하루키를 글쓰기의 중요한 전범으로 여기게 되었다.
결국 『노르웨이의 숲』도 내 인생의 책 목록에서 빠질 수 없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허세의 아이콘에서, 내 평생 참고하고 싶은 문장의 기준으로 바꿔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