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 레이』를 함께 읽으며
시작은 지난 1월, 『연구소의 승리』 북토크였다. 그 인연이 계기가 되어 아호파파 B 작가님이 운영하는 ‘문장사이’와 본격적인 독서모임을 꾸리기로 했다. 보통 이런 모임은 안전하게 가는 법인데, 나는 첫 단추부터 모험을 걸었다. 내가 고른 책은 민태기의 『판타 레이: 혁명과 낭만의 유체과학사』. ‘유체과학’을 제목에 당당히 박아넣은 그 기세부터 브런치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분량도 무려 500페이지가 넘어간다. 이건 그야말로 선언이었다. “여러분, 오늘은 감성 대신 점성입니다.”
물론 걱정이 되긴 했다. 브런치의 압도적 주류는 문학과 에세이라서다. 그에 비하면 과학은 갈라파고스 같은 분야다. 게다가 같이 모임을 하는 김하진, 문하연 작가님은 분명 문학 쪽 책을 가져올 텐데, 나 혼자 유체과학이라니. 괜히 비교당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도 결국 이 책을 고른 건,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이었다. 나는 과학을 쓰는 작가고, 그걸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내가 문학 이야기를 한다고 누가 “오?!” 하겠는가. 차라리 “그래, 역시 저 사람은 저걸 한다”라는 인식을 굳히는 편이 낫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곤조였다. 원래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고를까 했는데, 그나마 한 단계 낮춘 결과가 『판타 레이』였다. 『과학혁명의 구조』에 비하면 『판타 레이』는 얼마나 친절하고 낭만적인가.
예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모임의 첫 반응은 원성에 가까웠다. “너무 두껍다”, “전공책 같다.” 진행자인 꿈꾸는 나비 작가님의 표정도 퉁명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막상 읽고 모이니 분위기가 바뀌었다. 책이 생각보다 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민태기 작가는 글을 어렵게 쓰지 않는다. 이론을 설명하기보다는 장면을 드러낸다. 에테르가 소용돌이치는 우주, 비판과 의심 속에서 힘을 얻는 중력, 달빛 아래 모여 토론하는 발명가들까지. 개념이 아닌 인물과 사건이 앞으로 걸어 나온다.
이 책을 4년 전 처음 읽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다. 나는 사회학을 전공한 순수 문과생이라, 오래전부터 과학사와 철학사는 서로 다른 계보라고 생각해왔다. 하나는 실험과 발견의 역사, 다른 하나는 개념과 사유의 역사. 그런데 『판타 레이』는 그 둘이 따로가 아니라 서로를 밀어 올리며 함께 흘러왔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읽는 내내 나의 편협한 시야, 빈약한 사유를 사무치게 반성해야 했다. 요컨대 이 책은 내 사고의 경계들을 완전히 허물어 버린 작품인 셈이다.
계몽주의의 기수 볼테르가 뉴턴의 중력에서 혁명의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 근대철학을 완성한 칸트가 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실, 경제학의 시조 애덤 스미스가 뉴턴의 영향을 받았고 천문학 역사에 관한 책까지 썼다는 사실. 이런 것들이 내게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과학은 과학자들이 하고 철학은 철학자들이 한다”라는, 교육과정이 심어준 고정관념이 한 순간에 부서졌다.
이 깨달음은 글쓰기에도 영향을 주었다. 나는 과학을 이론과 수식이 아닌, 역사적 제도와 인물의 네트워크 속에서 서사화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한 마디로 문과적 방법으로 쓰는 과학인 셈이다. 『판타 레이』는 그 방법론이 임의적인 취향이 아니라, 근대 지성사의 실제 구조에 부합하는 방식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모임에서 IndigoB 작가님이 “이건 인문학 책이네요”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했다. 요즘 인문학 간판을 달고 나오는 책들 중에는, 특정 연령대나 삶의 단계에 맞춰 철학자를 처방하듯 제시하는 경우도 많다. 복잡한 사상은 맥락에서 분리된 채 몇 줄의 문장으로 환원되고, 사유의 체계 대신 위로의 문구가 전면에 놓인다. 『판타 레이』는 이와 정반대로, 보편 지식으로서의 교양을 복원한다.
내가 생각하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라는 개념이 딱 이 지점에 있다. 한국에 인문학 열풍이 불어닥친 계기 중 하나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철학을 “테크놀로지와 리버럴 아츠의 교차점”으로 설명했던 순간이었다. 여기서 리버럴 아츠라는 말을 우리는 대개 '인문학'으로 번역해 받아들였다.
하지만 리버럴 아츠는 한국에서 통용되는 문사철 중심의 인문학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다. 그것은 특정 학문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이 갖추어야 할 보편적 교양과 사유의 훈련을 뜻한다. 직업 기술보다 훨씬 큰, 사고를 구속하지 않는 학문. 하나의 전공에 머무르지 않고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 그래서 문학‧철학‧역사학은 물론, 수학과 자연과학, 예술과 음악까지 포괄한다. 이것은 학문 이전의 지적 태도, 즉 세계를 연결해 이해하는 능력이다.
『판타 레이』는 바로 그 넓이와 연결을 보여준다. 뉴턴의 중력은 철학과 정치사상을 자극하고, 산업기술은 경제학 및 시민혁명과 얽힌다. 동시에 과학은 예술과도 호흡을 맞춘다. 뉴턴적 질서가 고전주의 미학과 맞물리고, 낭만주의적 자연관이 유체의 흐름과 공명하며, 음악적 리듬과 파동 개념이 같은 시대의 감수성 안에서 울린다. 이렇듯 이 책은 과학을 차가운 계산으로 다루지 않고, 한 시대의 감각과 미학까지 포함한 지적 운동으로 그려낸다.
그래서 『판타 레이』를 읽다 보면, 과학·철학·정치·경제·예술이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이 보인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리버럴 아츠다.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절충이 아니라, 애초에 분리되지 않았던 지적 세계의 복원.
만약 스티브 잡스가 말했던 “테크놀로지와 리버럴 아츠의 교차점”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추상적 구호 대신 『판타 레이』의 몇 장면을 펼쳐 보일 것이다. 그 안에서는 이론이 예술과 맞물리고, 과학적 발견이 사회적 상상력으로 확장된다. 리버럴 아츠는 학문의 이름이 아니라, 지식을 연결하는 힘이라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특히 흥미로웠던 대목이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데카르트 vs 뉴턴 논쟁. 나는 이걸 “뉴턴이 옳았고 데카르트는 틀렸다”로 읽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시대의 맥락에서는 데카르트가 더 과학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라는 점이 더 인상 깊었다. 17세기 유럽은 이제 막 신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을 벗어나 ‘이성적 설명’을 요구하던 때였다. 그런 시대에, 보이지도 않고 닿지도 않는데 작용하는 중력은 오히려 신비주의처럼 보였을 것이다. 반면 데카르트의 에테르 이론은 세계를 연속적인 매질로 설명했고, 그 시대의 합리주의 정신에 더 부합했다. 결국 예측력에서 뉴턴이 압도하며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뉴턴 자신도 연금술과 신비주의 연구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과학사가들은 중력 개념도 이러한 신비주의 연구에서 영감을 얻었을지 모른다는 흥미로운 추측을 내놓는다.
이 대목에서 모임의 대화가 깊어졌다. “누가 맞았는가”를 넘어서, “무엇을 과학으로 인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라도 수학적으로 정확하면 과학인가, 아니면 기계적 메커니즘이 설명되어야 과학인가. 설명의 투명성이 더 중요한가, 예측의 성공이 더 중요한가. 데카르트와 뉴턴의 대립은 결국 과학의 기준을 둘러싼 싸움이었고, 그 기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재정의되어왔음이 선명해졌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과거의 논쟁을 복기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의미 자체를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루나 소사이어티다. 버밍엄을 중심으로 한 기술 네트워크와, 에든버러의 정치경제학, 그리고 대서양 건너의 시민혁명이 1776년을 전후해 서로 공명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개량, 벤저민 프랭클린의 미국 독립선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등장했지만, 같은 시대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었다. 따라서 저자가 1776년을 ‘서양이 동양을 넘어서는 해’라고 규정한 대목에서 나는 강렬한 통찰을 느꼈다. 그것은 특정 모임의 성취가 아니라, 기술·정치·경제가 하나의 지적 생태계 안에서 동시에 가속되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자유의 선언과 경제적 생산력의 폭발이 각기 다른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결국은 하나의 근대를 향해 수렴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판타 레이』는 과학사를 넘어, 근대라는 시스템의 탄생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책을 따라가다 보니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근대 과학의 탄생 과정에서는 문과·이과의 구분이 지금처럼 뚜렷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는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였고, 뉴턴은 물리학자이면서 조폐국을 총괄한 행정가이기도 했다. 루나 소사이어티에서는 철학자, 의사, 과학자, 정치사상가가 한 공간에서 논쟁했다. 혁신은 학문의 경계 안이 아니라, 경계를 넘나드는 지점에서 폭발했다. 실제로 ‘과학(science)’이 자연과학만을 뜻하게 된 것도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한때 그 단어는 체계적인 지식의 총칭이었다. 학문의 분야를 초월하는 거대한 지적 체계가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니 오늘날의 문과·이과 구분은 세계의 기본 구조라기보다, 교육과 행정의 효율성을 위한 분류 체계에 가깝다. 그리고 그 구분으로는 점점 현실을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기후위기, 인공지능, 생명공학, 우주탐사 같은 현대의 난제는 기술적 문제이면서 철학적·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사유 방식으로서의 칸막이는 이제 더 설득력이 없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 리버럴 아츠가 가리키던 “보편적 지식의 태도”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판타 레이』를 함께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독서모임이 아니다. 이것은 과학사를 배우는 것을 넘어, 지식을 연결하는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과 사상, 기술과 예술, 과거와 현재를 한 자리에서 묶어보는 훈련이다. 500쪽이라는 두께는 부담보다는 사고의 폭을 넓히는 든든한 장치에 가깝다.
다음 모임에서도 『판타 레이』를 읽을 것이다. 이제는 분량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 경계는 어디서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넘을 수 있는가 - 을 끝까지 따라가 보는 일이다. 아마도 그 과정 자체가, 내가 『판타 레이』를 읽자고 고른 이유일 것이다.
독서모임 에필로그.
작가로 활동하다 보니 줌 미팅은 이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세미나, 강의, 회의… 화면 속 사각 프레임이 또 하나의 작업실이 된 셈이다. 다음 달이면 유치원에 가는 딸도 그 풍경에 익숙하다. 노트북과 카메라를 세팅하고 있으면 먼저 묻는다. “아빠, 오늘 강의해?” 나는 장난처럼 되묻는다. “서우도 같이 할래?”
낯가림이 심한 녀석은 늘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다. 줌 미팅이 시작되면,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고 믿는 경계선 근처에서 끊임없이 사부작거린다.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화면 안을 훔쳐보고, 나를 빵 터뜨리겠다며 앞에서 춤도 추고, 갑자기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본인은 화면 밖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종종 화면 안이다.
과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 곁에서는 또 다른 세계가 제멋대로 흐른다. 이게 관종 기질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지적 토론과 아이의 깨방정이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 풍경이 꽤 마음에 든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