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오래전 직장 선배에게 뜻밖의 칭찬을 들은 적이 있다. 꼰대 기질이 다분해서 별로 좋아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너는 기분이 나쁠 만한 말인데도, 그게 합리적이면 받아들일 줄 알아서 좋아.”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나는 스스로 과학적 합리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일할 때도 감정을 되도록 섞지 않는 편이다. 그 때문에 “T발 C냐”라는 농담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인신공격만 아니라면, 나에 대한 지적에는 대체로 무덤덤하다. 누가 어떻게 표현했든 내 업무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받아들인다.
이건 내가 대인배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뭐든 좋은 건 취하고 보겠다는 지극히 이해타산적 사고방식에 가깝다. 과정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결과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만이다.
이런 성향은 글을 쓰는 데도 도움이 된다. 글을 잘 쓰려면 내 글에 대한 비판과 지적에 열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피드백을 반영해 계속 고쳐 써야 글이 좋아진다. 물론 모든 지적이 100% 유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 1%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걸 끄집어내 내 문장으로 흡수해야 한다. 지적이 기분 나쁘다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결국 자기만 손해다. 이런 태도가 바로 퇴고의 출발점이다.
글쓰기 책을 몇 권만 읽어봐도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말이 있다. “글쓰기의 핵심은 고쳐쓰기에 있다.” 초고를 완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단계가 바로 퇴고라는 뜻이다. 윌리엄 진서도 『글쓰기 생각쓰기』에서 단언한다. “고쳐쓰기야말로 글쓰기의 본질이다. 이 단계에서 승패가 갈린다.”
하지만 많은 작가가 초고를 완성하면 진이 빠져버린 나머지 퇴고를 소홀히 한다. 오타나 맞춤법을 대충 훑어보는 형식적 교정에 그치는 것이다. 진정한 퇴고는 문장의 ‘도배’를 다시 하는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글의 뼈대를 다시 세우고, 불필요한 벽을 허물며, 구조의 균열을 보강하는 ‘재건축’에 가깝다.
이 고통스러운 재건축 과정에 가장 필요한 도구가 바로 타인의 시선이다. 작가는 필연적으로 자기 글과 사랑에 빠진다. 내가 밤새 고민하며 짜낸 문장은 자식처럼 소중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바로 그 애정 때문에 작가는 자신의 글에 대해 객관성을 잃는다. 내가 쓴 글의 허점은 나보다는 타인의 눈에 더 선명하게 보인다. 작가에게 생길 수밖에 없는 글의 사각지대다.
따라서 누군가 피드백을 준다면, 그 말이 맞는지 따지기보다 왜 그런 반응이 나왔는지를 살펴보는 편이 훨씬 낫다. 그 표현은 거칠 수 있고, 해결책은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가 어떤 대목에서 걸렸다면 그 자체로 중요한 단서다. 작가가 해야 할 일은 그 말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가리키는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다. 퇴고란 결국 그 단서를 따라 문장을 다시 쓰는 작업이다.
나 역시 처음부터 이런 자세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첫 책인 『최소한의 과학공부』를 쓸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야심 차게 쓴 초고를 출판사에 보여주었다. 속으로는 꽤 잘 썼다고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차가웠다. “응, 아니야. 다시 써.”
지적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아무튼 요는 너무 딱딱하고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 번을 다시 썼으나 피드백은 늘 비슷했다. 그러자 나도 슬슬 이해가 안 되기 시작했다. “아니 이 정도면 쉽지, 도대체 어떻게 더 쉽게 쓰라는 거야?”
하지만 냉정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제 첫 책을 내는 신인 작가였고, 출판사는 베스트셀러를 몇 권이나 낸 곳이었으니까. 이걸 부정할 근거는 없었다. 결국 출판사가 OK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뭐가 됐든 나보다는 출판사가 맞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나서야 겨우 책이 완성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온 『최소한의 과학공부』는 인터넷 서점의 '오늘의 책'에 선정되며 판매 순위 상위권에 올랐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그때는 수긍할 수 없었지만 지금 보면 출판사 지적이 다 맞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왜 그때 더 쉽게 고치지 못했을까”하는 후회가 들 정도다. 지적을 견뎌내는 힘이 곧 글의 완성도로 이어진 셈이다.
이런 태도는 초보 작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가들일수록 퇴고와 타인의 피드백에 더 처절하게 매달린다. 그들에게 초고란 완성을 위한 밑그림이 아니라, 단지 '고쳐 써야 할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본 문학의 거장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표적이다. 그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자신의 퇴고 원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트집 잡힌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 비판을 수긍할 수 없더라도 지적받은 부분이 있으면 어쨌든 처음부터 다시 고쳐 쓴다. 지적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상대의 조언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고치기도 한다."
이 말은 지적에 대처하는 작가의 가장 완벽한 자세를 보여준다. 하루키는 타인의 지적을 정답이 아니라, '그 지점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독자가 읽다가 멈칫했다면, 그 문장의 흐름이나 논리에 미세한 걸림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는 자존심을 내세워 논쟁하는 대신, 책상 앞에 앉아 묵묵히 그 부분을 해체하고 재조립한다.
실제로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의 초고를 6개월 만에 완성했지만, 이후 퇴고에만 꼬박 1년을 바쳤다. 초고를 쓴 시간보다 두 배나 긴 시간을 '남의 말 듣기'와 '다시 쓰기'에 쏟아부은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해변의 카프카』는 이렇게 지적과 퇴고의 과정을 끝없이 통과하며 완성될 수 있었다.
미국의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사례는 더욱 극적이다. '미니멀리즘의 대가'로 불리는 그의 명성은 편집자 고든 리쉬와의 치열한 협업 속에서 형성되었다. 리쉬는 카버의 원고를 문자 그대로 난도질했다. 어떤 단편은 문장의 70% 이상을 삭제했고, 심지어 작품의 결말을 마음대로 바꾸기도 했다.
카버는 처음에는 편집에 강하게 반발했다. 리쉬에게 보낸 편지에서 “글이 너무 많이 잘려나가 이제는 이게 내 글인지조차 모르겠다”라며 출간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리쉬의 개입은 과격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카버의 원고는 리쉬의 냉혹한 편집을 통과한 형태로 출간되었다. 그 과정에서 카버의 문장은 놀라울 정도로 압축되었고, 우리가 익히 아는 그 간결하고 서늘한 문체가 완성되었다. 말하자면 카버의 문체는 혼자 쓴 결과가 아니라, 타인의 칼질을 통과하며 살아남은 문장이었다.
간결한 문장의 대가로 불리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퇴고에 진심이었다. 그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결말을 수십 번 고쳐 쓴 것으로 유명하다. 1958년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39번을 고쳐 썼다고 말하자 기자가 물었다. “어떤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습니까?” 헤밍웨이는 이렇게 답했다. “아무 문제없었어요. 그저 올바른 단어를 찾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숫자조차 정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사후에 발견된 원고들을 조사해 보니 실제로 작성된 결말 판본이 47개나 있었다. 헤밍웨이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같은 장면을 끝없이 다시 써 내려간 것이다.
이는 작가 내부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독자와의 싸움에 가까웠다. 그는 자기 문장을 가장 냉혹하게 읽는 독자가 되어, 걸리는 지점을 끝까지 파고들었다. 헤밍웨이에게 퇴고란 자기 안의 독자를 만족시킬 때까지 문장을 반복해서 쓰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모든 반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1960년대 초 대약진운동 실패로 입지가 약해진 마오쩌둥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홍위병을 부추기면서 쓴 구호였다. 어린 학생들은 이 말을 등에 업고 당 지도부를 공격했고,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 광기의 숙청과 파괴로 이어졌다. 오늘날 문화대혁명은 중국을 수십 년 후퇴시킨 심각한 오류로 평가된다.
하지만 정치적 맥락을 걷어내고 보면, 이 말은 뜻밖의 통찰을 남긴다. “모든 반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것을 글쓰기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모든 지적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적하는 사람이 작가만큼 글을 잘 쓸 필요는 없다. 설명이 완벽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읽다가 “어? 여기가 좀 이상한데?” 혹은 “이 부분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는 느낌이 들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독자가 읽다가 걸린 지점에는 대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제거하고 더 나은 문장으로 다시 쓰는 일은 온전히 작가의 몫이다. 그러려면 지적을 수용하는 자세부터 갖춰야 한다. 하루키가 그러하듯, 지적을 받으면 타당성을 따지기기보다는 일단 고쳐 보려고 해야 한다.
조반유리는 문화대혁명기의 중국에서는 광기와 파괴를 상징했다. 그것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회를 혼란에 빠트린 비극의 언어였다. 하지만 이 말을 글쓰기의 세계로 가져오면 새로운 작가정신이 될 수 있다. 작가에게 지적이란 악의적 공격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한 사각지대를 밝혀주는 빛과도 같다. 그러니 누군가 당신의 글에 트집을 잡는다면 기뻐해야 한다. 당신의 글이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으며, 더 완벽해질 기회를 얻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적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끝까지 추적해 문장을 다시 쓰는 것, 그것이 바로 퇴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