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는 KIST에 변화의 시대였다. 1981년 한국과학원(KAIS)과 통합하여 한국과학기술원(KAIST) 체제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1971년 설립된 KAIS는 국내에 부족한 과학기술 인력을 육성하기 위한 연구 중심 이공계 대학원이었다. 두 기관은 연구와 교육의 시너지를 높인다는 취지에서 통합했으나, 8년여의 '불편한 동거' 끝에 1989년 다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분리되었다. 이후 KAIST는 대전의 대덕연구단지로 이전해 세계 수준의 이공계 대학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국가 정책의 전환과도 맞물려 있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는 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지만, 막대한 외채와 중복 투자라는 부작용도 낳았다. 철강, 조선, 기계, 화학 등을 단기간에 육성하는 과정에서 재정과 금융 시스템은 빠르게 팽창했고, 두 차례의 오일쇼크는 그 취약성을 한꺼번에 드러냈다.
이 위기 국면에서 등장한 전두환 정부는 다른 해법을 택했다. 더 많은 투자와 확장이 아니라, 효율과 통제를 앞세운 구조조정이었다. 1980년대 초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 – 작은 정부, 공공부문 효율화, 자본 자유화 등 - 의 바람은 한국에도 닿았다. 정부는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중복 기능을 줄이고 자원을 집중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재편했다. KIST와 KAIS의 통합도 같은 배경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한국 경제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진입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찾아온 ‘3저(低) 호황’ -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 은 예상치 못한 기회를 제공했다. 수출 경쟁력은 급상승했고, 외채 부담은 완화되었으며, 산업의 투자 여력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 결과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연평균 두 자릿수에 달하는 고성장이 이어졌다. 한국은 더 이상 생존을 걱정하는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선진국에 얼마나 빨리 도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단계로 이동했다. 이는 경제 지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의 연속 개최는 한국의 국제적 도약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과학기술 역시 같은 흐름을 타고 있었다. 이제는 선진국의 단순 모방이 아니라, 그들이 장악한 기술적 문턱을 넘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시대 KIST에 주어진 과업은 명확했다. 선진국이 독점한 핵심 원천 기술을 확보하여 기술 주권을 세우고, 글로벌 무대에서 정밀함과 신뢰도를 증명하는 것. 1970년대의 KIST가 산업화의 설계자였다면, 1980년대에는 그것을 완성하는 마지막 공정을 맡아야 했다.
선진국의 기술 장벽을 가장 선명하게 무너뜨린 성과는 공업용 다이아몬드였다. 다이아몬드는 보통 귀금속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산업의 필수 소재로서도 활용도가 높다. 자연계의 물질 중 가장 단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업용 다이아몬드는 콘크리트와 석재 가공은 물론, 우주항공산업과 정밀기기 제작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쓰인다.
다만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은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공업용 다이아몬드 시장은 미국과 영국 기업들이 전 세계 공급의 90% 이상을 틀어쥔, 사실상 독점 시장이었다. 한국의 산업 구조가 고도화될수록 수입액은 크게 늘었으나, 선진국들의 장비와 기술을 들여올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기술 장벽에 도전한 것이 KIST 경질재료연구실의 은광용이었다. 연구진의 과제는 자연계에서 오랜 시간을 거치며 만들어지는 다이아몬드를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합성해 내는 것. 이 작업은 1,400°C가 넘는 고온과 5만 기압에서 흑연과 촉매 금속을 처리해야 하는 난제였다. 수억 년에 걸쳐 빚어지는 물질을 단 며칠의 실험으로 재현하는 도전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은광용 연구팀은 결정 특성이 우수하고 질소 불순물 함량이 낮은 고품질 다이아몬드 제작에 성공했다. 1988년 말, 이 기술은 일진금속으로 이전되어 양산 체제에 들어갔다. 이어서 1990년대에는 일진다이아몬드가 설립되며 본격적인 상업화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전량 수입으로 조달하던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국산화할 수 있었다. 일진다이아몬드는 2000년대 중반 전 세계 합성다이아몬드 시장의 약 18%를 차지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는 연구소의 원천 기술이 기업의 생산 역량과 결합해 글로벌 독점 시장을 무너뜨린,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의 상징적 장면이다. 2006년 기준 약 4,000억 원의 수입 대체 효과를 기록했으며, 한국을 단숨에 세계 3대 공업용 다이아몬드 생산국으로 끌어올렸다. 단순한 수입 대체를 넘어, 선진국의 독점 시장에 한국 기술이 처음으로 균열을 낸 사건이었다.
1987년 4월 9일은 한국이 세계 과학의 중심지에 처음 이름을 올린 날로 기억된다. 국내 연구기관이 수행한 연구가 최초로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되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KIST 섬유고분자연구실의 윤한식으로, 아라미드 펄프의 새로운 합성 방법에 대한 논문이었다.
아라미드 펄프는 고온에서도 견디고, 무게 대비 강도가 매우 높아 ‘기적의 섬유’, ‘총알을 막는 섬유’라고 불렸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방탄조끼, 헬멧, 항공기 구조재 등의 핵심 소재로 널리 각광받았다. 특히 같은 용도로 사용되던 석면이 발암물질로 판명되면서 그 가치가 더욱 상승하게 되었다.
다만 이 역시 1973년 미국의 화학 기업 듀폰이 ‘케블라’를 상용화한 이후 오랫동안 세계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에 윤한식은 완전히 다른 원리로 아라미드 섬유를 합성한다는 목표에 따라 연구에 뛰어들었다. 1979년 그가 KIST에 제출한 기획서의 제목은 ‘듀폰의 케블라 섬유 개발’이었다.
윤한식은 3년여의 도전 끝에 듀폰보다 훨씬 간편한 방법으로 아라미드 펄프를 만들 방법을 찾아냈다. 아라미드 펄프의 재료인 실의 분자들은 자연 상태에서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듀폰은 실 분자에 황산을 처리하고 가는 구멍으로 뽑아내는 방식으로 실을 만들었다. 반면 윤한식 연구팀은 마치 양털처럼 분자들이 자연스럽게 성장하면서 실이 형성되는 방법을 발견했다.
아라미드 섬유의 형성 과정이 자연 속의 섬유와 동일하다는 이 이론은 실용적 기능보다 과학적 발견의 의미가 더욱 컸다. 섬유를 만드는 방법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윤한식 본인의 비유에 따르면, “인체의 피부, 머리털 등 섬유질이 생성되는 과정을 실험실에서 재현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순수 과학의 성과를 주로 소개하는 <네이처>에 이 논문이 게재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상업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실험실 수준에서 성공한 제조방법으로 대량생산을 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구에 동참한 코오롱 등 국내 기업들이 원천 특허를 확보했고, 듀폰과의 국제 특허 분쟁에서도 승소했지만, 성과는 거기까지였다. 그럼에도 아라미드 펄프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모방에서 벗어나 세계적 독창성을 인정받은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IT 강국으로 성장한 배경에도 KIST가 있었다. KIST가 국산화한 광섬유 통신 기술이 1990년대 정보화의 핵심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 세계는 구리선 기반의 아날로그 통신에서 빛을 이용한 디지털 통신으로 급격히 전환하고 있었다. 광섬유 통신을 이용하면 기존 구리선보다 훨씬 많은, 대용량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KIST 응용광학연구실의 최상삼은 이러한 변화를 남보다 먼저 읽어낸 선각자였다. 그를 비롯한 KIST 연구자들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빠르게 실리카 광섬유 개발이 추진될 수 있었다.
당시 최상삼 연구팀은 유리관 내부에 화학 가스를 불어넣어 나노 단위의 막을 입히는 ‘변형 화학 기상 증착’ 공법을 택했다. 이 기술의 핵심은 빛의 산란과 흡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불순물을 10억 분의 1 단위 이하로 통제하는 초고순도 제어에 있었다. 문제는 당시 우리나라가 가열 장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결국 연구원들은 유리관의 온도를 육안과 수동 계측기로 확인하며 수천 번의 인출 실험을 반복해야 했다.
마침내 KIST는 1978년 실험실 규모의 광섬유 기술을 확보했고, 1980년부터는 이를 국가 전력망과 연계한 실용화 실험으로 확대했다. 1981년 서울전력(지금의 한국전력공사) 부산 변전소간에서 진행된 시험에서는, 기존의 고압 전력선 옆에 광섬유를 설치해 데이터 통신을 구현해 보였다. 이 실험에서 KIST 최상삼 연구팀은 광섬유의 전송 손실 저감과 제조 단가 절감 효과를 동시에 입증할 수 있었다. 특히 국내에 풍부한 규사(석영, 모래)를 원료로 활용하여, 광섬유 제작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기존 구리선 케이블의 제작 비용은 ㎞당 약 115만 원이었으나, KIST 기술로 만든 광섬유는 ㎞당 약 15만 원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미국 벨연구소에 근접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이었다. KIST는 1981년 금성전선, 대한전선과 함께 한국광통신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이를 민간에 확산시켰다. 사회경제적으로도 이 기술이 갖는 의미는 중요하다.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1990년대 초고속 인터넷 혁명은 막대한 로열티를 선진국에 지불하는 ‘절반의 성공’에 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훗날 전국을 뒤덮은 초고속 정보망의 밑바닥에는, 이 시기 KIST가 깔아 놓은 광섬유 기술의 토대가 놓여 있었던 셈이다.
1980년대의 가장 큰 국가적 이벤트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었다. 이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선진적 운영 능력을 검증받는 무대이기도 했다. 다만 이 거대한 행사들이 그냥 되는 것은 아니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개최국이 반드시 공인된 도핑 검사 기관을 보유해야 함을 요구했다. 만약 이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올림픽의 양심을 외국 기관의 손에 맡겨야 하는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1984년 KIST에 도핑컨트롤센터가 설립되었다. 초대 박종세 센터장과 연구팀이 직면한 과제는 가혹했다. 1987년 IOC 공인 테스트 당시, 연구팀은 성분을 알 수 없는 10개의 샘플에서 금지 약물을 72시간 내에 완벽히 찾아내야 했다. 워낙 중요한 과제였던 탓에 연구원들 사이에서 "실패하면 총살감"이라는 말이 나돌 만큼 중압감이 컸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한국 과학의 정밀도를 단기간에 끌어올리는 동력이 되었다. 연구팀은 질량 분석기를 활용한 독자적 분석법을 정립하여 10개 샘플의 성분을 100% 일치시켰다. 그 결과 세계 15번째로 IOC 공인 실험실 자격을 획득했다.
KIST의 정교한 분석력은 서울올림픽 남자 100m 결승에서 빛을 발했다. 전 세계가 영웅으로 칭송하던 벤 존슨의 시료에서 금지 약물인 스타노졸롤을 적발해 낸 것이다. 캐나다 측의 강력한 항의와 언론의 의구심 속에서도 KIST 연구팀은 3차례 이상의 반복 검증과 명확한 데이터를 제시하여 그들의 주장을 잠재웠다. 이 사건은 한국의 도핑 분석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공인받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에도 KIST 도핑컨트롤센터는 연간 수천 건의 시료를 검사하고 있다. 1980년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이후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2019년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를 거치며 세계 5대 주요 스포츠 이벤트를 모두 경험했다. 또한 2021년 도쿄 올림픽에 이어 2024년 파리올림픽에도 전문 인력을 파견할 정도로 세계적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
1980년대 KIST가 이룬 성과들은 단순한 국산화나 수입 대체의 기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한 장벽 앞에서 멈춰 설 것인지, 아니면 그 장벽을 부수고 주권을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였다. 공업용 다이아몬드와 아라미드 펄프는 소재의 자립을, 광섬유 통신은 정보화 시대의 혈맥을, 그리고 도핑 컨트롤 기술은 국가적 신뢰의 정밀도를 상징했다. 이 기술들은 각기 다른 분야에 흩어져 있었으나 하나의 지향점을 향했다. 바로 기술 의존의 상태를 벗어나, 세계 표준을 논의하는 자리에 당당히 서는 것이었다.
당시 KIST를 둘러싼 환경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KAIS와의 통합이라는 혼란과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이라는 경제적 위기 속에서 연구자들은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위기를 기회로 바꿔내는 데 성공했다. "남이 시키는 연구는 노역일뿐"이라는 연구자들의 자존심은, 선진국이 쌓아 올린 기술 장벽을 정면 돌파하는 동력이 되었다. 1970년대의 KIST가 황무지에 산업의 설계도를 그렸다면, 1980년대의 KIST는 그 위에 정밀한 부품을 채우며 ‘기술 한국’을 비로소 현실의 구조물로 세워 올렸다.
1980년대 KIST의 분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경제 지표의 상승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핵심 원천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성장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과 같다. KIST 연구원들이 1,400°C의 고온과 5만 기압의 극한 조건을 견디며 다이아몬드를 빚어내고, 0.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도핑 분석에 매진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이 한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기술적 주권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KIST는 더 이상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한 산업화의 도구가 아니었다. 선진국의 기술을 뒤따라 익히라는 임무도 이미 넘어섰다. KIST는 국력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였고, 앞으로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먼저 시험해 보는 전초기지였다.
결국 1980년대 KIST가 넘어선 ‘기술 문턱’은 한 연구소의 성공담으로만 읽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의 출구를 지나 선진국의 입구에 들어섰음을 입증한, 가장 명확한 징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