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의 번영을 설명하는 익숙한 단어는 수출, 교육, 근면 같은 것들이다. 물론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현대사 전체를 한 컷으로 압축해야 한다면, 그 중심에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가 있다. 경공업으로 벌어들인 외화를 다시 더 ‘무거운 산업’에 재투입해 경제의 체질을 바꾸려는 선택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정책을 넘어, 국가의 생존 조건과 직결된 전략적 결단이기도 했다.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하며 철강·조선·석유화학 등의 수출 확대를 목표로 내걸었다. 이 선언은 곧 예산·금융·외교·인력의 배치를 한 방향으로 정렬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정부는 업종을 선택하고, 산업 인프라를 구축하며, 정책금융을 저금리로 공급하는 방식으로 중화학 부문에 자원을 집중했다. 그 변화는 숫자로도 명확히 드러난다. 한국의 1인당 GDP는 1970년 약 250달러에서 1979년 약 1,700달러로 상승했다.
물론 성장의 원인을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중화학공업화는 나라를 수십 년 떠받칠 산업 구조를 한꺼번에 끌어올린 결정적 분기점임에 분명했다. 그것은 지금도 한국 경제의 기본 골격(철강·조선·자동차·전자·석유화학)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의 우리도 그 성공 비결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후대의 눈으로 보면 중화학공업화는 위험한 도박처럼 보이기 쉽다. 1960년대 한국은 내수시장이 작았고, 자본은 부족했으며, 기술과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었다. 중화학 산업은 막대한 초기 투자가 필요하고 회수 기간도 길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실패하면 외채 증가, 물가 상승, 금융 불안이 동시에 밀려올 위험이 크다. 실제로 중화학공업 정책은 이후 외채 축적과 경상수지 악화 같은 부작용을 낳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선택을 도박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당시 한국이 직면한 문제는 경제정책이 아니라 국가 생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1969년 7월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 안보정책의 변화 – 이른바 닉슨 독트린 - 를 선언했다. 요지는 명확했다. 앞으로 아시아의 군사적 충돌에서 미국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동맹국이 스스로 방위의 부담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71년 미 7사단 약 2만 명이 한국에서 철수하게 된다.
한국에게 이는 단지 외교 환경의 변화가 아니었다. 전쟁 억지력을 유지하려면, 자체 군수 산업 기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산업 기반은 방위산업을 논하기 어려울 만큼 취약했다. 기계공업은 농기계 생산 수준에 머물렀고, 정밀 기계와 소재 산업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때 등장한 발상이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경제관료 오원철은 방위산업을 별도의 군수 공장으로 키우는 방식이 오히려 비경제적이라고 보았다. 군수 생산은 수요 변동이 커서, 전용 설비를 세우면 평시에는 공장이 놀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대신 민수와 군수가 동시에 가능한 중화학공업 기반을 구축하고, 그 위에서 무기 생산 능력을 확보하는 방식이 더 현실적이라는 판단이었다. 이 구상이 곧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 구상을 실제 정책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어떤 산업을 먼저 육성해야 하는지, 기술과 자본은 어디에서 확보할 것인지, 산업 간 연결 구조는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했다.
이 역할을 맡은 곳이 KIST였다. 정부가 키워야 할 전략 산업을 선정하자, KIST는 이 분야들에 대한 기술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선행 연구를 수행했다. 요컨대 중화학공업화라는 거대한 설계도의 앞단 - 타당성 검토, 기술·시장 상황 파악, 우선순위 설정 - 을 먼저 그린 집단이 KIST 연구자들이었다.
중화학공업화의 문은 철강에서 열렸다. 철강은 흔히 ‘산업의 쌀’로 불린다. 자동차든 기계든 배든 철이 없으면 못 만든다. 그래서 한국은 전쟁 직후부터 제철소 건설을 꿈꿨지만, 계획은 번번이 무산됐다. 1957년 미국 원조로 추진한 묵호 지역의 제철소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고, 1958년 양양의 제철소 계획도 외자 유치에 실패했다.
전환점은 막연한 구상을 실제 설계로 바꾸는 데서 나왔다. 정부는 KIST에 외국의 종합제철 건설계획서들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1969년 6월 경제기획원 직속으로 종합제철 건설추진 전담반이 설치되었고, KIST 연구자들이 기술·경제성 분석을 맡았다.
이 설계 작업의 중심에는 KIST 제1연구부장 김재관이 있었다. 그는 철강을 단순한 공장 건설이 아니라 국가 산업 구조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물이었다. 종합제철소는 철을 생산하는 공장을 넘어, 여러 산업의 연관 효과를 촉발하는 거대한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김재관 연구팀은 철강 수요를 거꾸로 계산했다. 조선·기계·건설 같은 산업이 성장할 경우 필요한 강재 종류와 물량을 추정하고,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제철소 규모를 도출한 것이다. 그 결과 나온 숫자가 조강 연산 103만 톤이었다. 당시 세계은행은 한국 시장 규모로는 50만 톤도 과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김재관의 계산은 달랐다. 현재 시장이 아니라 앞으로 형성될 산업 구조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작업은 단순한 공학적 계산이 아니었다. 항만 입지, 원료 수입 경로, 전력과 용수, 생산 공정의 단계적 확장까지 포함한 산업 시스템 설계에 가까웠다. 즉 “제철소를 지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한국 산업이 제철소를 중심으로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까지 내다본 밑그림이었다.
KIST의 계획은 이후 일본 조사단과 세계은행의 기술·경제성 평가를 통과하며 구체화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시장 규모와 원료 조건을 이유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수요 전망과 규모의 경제 분석, 단계적 확장 계획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조강 연산 103만 톤 체제가 확정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포항종합제철소, 바로 오늘날의 포스코다. 1973년 7월 3일 포항에서는 조강 연산 103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 1기가 준공되었다. 착공에서 준공까지 걸린 시간은 단 39개월이었다. 국내외 전문가 다수가 경제성과 기술 조건을 이유로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치밀한 설계와 신속한 실행으로 현실이 되었다. 이로써 오랫동안 수입에만 의존하던 나라가 스스로 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중화학공업화가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낸 순간이었다.
철강의 성과는 준공식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험이 없던 기술자들이 공장을 돌려야 했고, 그 기술은 문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축적되었다. KIST는 일본 제철소의 은퇴 숙련 기술자들을 위촉연구원으로 채용해서 포항 현장에 파견했다. 그 결과 원료처리, 제선, 제강, 압연, 계측, 자동화, 품질관리 등 공정 전반에서 경험과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철강이 산업의 ‘쌀’이라면, 그다음에 남는 질문은 명확했다. 이제 그 철로 무엇을 만들 것인가. 철강 생산만으로 산업화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철을 가공할 설비와 그 설비를 활용할 산업이 동시에 성장해야 한다. 그래서 철강 다음 단계로 등장한 것이 기계공업과 조선업이었다.
기계공업은 산업 설비를 만드는 산업이다. 공장을 짓고 생산을 늘리려면, 공작기계, 산업기계, 중장비 같은 생산설비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런 설비산업은 기술 수준이 일정 단계에 도달해야 가능하다는 점이다. 많은 개발도상국이 철강 산업까지는 세웠어도, 이후 산업 구조를 확장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에 대한 답을 내놓은 곳도 KIST였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하던 정부는 KIST에 공업화 전략 연구를 의뢰했다. 국가적 중요성이 컸던 이 프로젝트에는 해외 유치 과학자 대부분이 투입되었다. 그 결과 수개월 만에 『기계공업 육성 방향 조사연구』가 나올 수 있었다. 이 보고서는 기계공업을 중화학공업화의 핵심 축으로 삼으면서도 냉정한 전략을 제시했다. “모든 기계를 만들겠다는 욕심은 비현실적이다. 산업화에 직접 필요한 설비 산업부터 구축한다.” 즉 공작기계, 산업기계 같은 기반 장비가 먼저 마련되어야 다른 산업도 성장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를 뒷받침한 인물 중 하나가 이춘식이다. 베를린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KIST에 합류한 그는 서독의 기계산업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그래서 단순 조립 수준이던 기계공업의 국산화를 추진했고, 중화학공업의 메카였던 창원국가산업단지 조성에도 기술 자문을 맡았다. 당시 청와대가 추진하던 창원국가산업단지는 서독의 에센, 루르 공업지대 같은 '집적화된 기계공업 도시'를 모델로 했다. 이춘식은 현지 근무 경험을 살려 서독 공업 도시의 계열화된 구조 - 소재, 부품, 완성 설비가 연결되는 체계 - 를 창원의 설계에 적용했다. 이러한 ‘독일통’으로서의 역량은 이후에도 꾸준히 발휘되었다. 이춘식은 1970년대 재독한국과학기술자협회장을 거쳐 1996년에는 KIST 유럽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내며, 한-독 기술협력의 구심이 되었다.
기계공업의 기반 위에서 조선업 역시 전략 산업으로 부상했다. 당시 KIST 유일의 조선공학자였던 김훈철은 청와대를 설득해 대형 조선소 건설을 밀어붙였고, 그 구상은 울산 조선소 건설로 이어졌다. 물론 건설을 결정한다고 끝나는 문제는 아니었다. 대형 조선소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선박 설계, 용접 기술, 대형 엔진, 생산 공정 같은 제반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했다. 이 역할을 맡은 것도 KIST였다. 김훈철의 주도로 해외 조선소와의 기술 협력 방식, 선박 설계 도입 경로, 생산 규모와 기술 수준 등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현대가 울산에 조선소를 짓는 동안, KIST는 서울에서 그것이 작동할 기술 구조를 짜놓은 셈이다.
조선소 건설이 시작되고 불과 2년 뒤인 1974년, 현대는 26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을 건조했다. 이전까지 한국의 조선 능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울산 조선소의 가동으로 연간 건조 능력은 단숨에 100만 총톤 규모로 뛰어올랐다. 이제 막 철강을 생산하기 시작한 나라가, 그 철로 세계 최대 규모의 선박을 건조하는 나라로 바뀌고 있었다.
중화학공업화를 설명할 때 자동차와 전자는 종종 소비재 산업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1970년대 한국에서 이 두 산업이 의미하는 바는 달랐다. 자동차와 전자는 철강, 기계, 화학과 정밀 가공 기술이 결합되는 고도 산업의 집약체였다. 완성차 한 대에는 수만 개의 부품이 들어가고, 전자 제품 하나에는 부품·설계·품질·표준 체계가 동시에 작동한다. 요컨대 두 산업은 산업 생태계 전체를 끌어올리는 마지막 단계였다.
자동차 분야에서 그 전략은 고유 모델 개발로 나타났다. 1970년대 초까지 한국 자동차 산업은 외국 모델을 조립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 방식을 유지해서는 설계 능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결국 1973년 상공부는 자동차산업의 전략을 국내 고유 모델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전면 수정하게 된다.
여기서 김재관이 다시 한번 나섰다. 1973년 상공부 초대 중공업 차관보로 임명된 그는 자동차 산업정책의 방향을 조립에서 설계로 전환한다는 강력한 비전을 제시했다. 같은 해 상공부는 장기 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을 수립했고, 완전 국산 자동차 생산과 대규모 수출 목표를 세웠다.
이 정책은 하나의 상징적 장면으로 이어진다. 19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현대자동차는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Pony) 시제품을 공개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이탈리아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참여했고, 일본 미쓰비시의 기술 협력이 더해졌다. 해외 기술을 결합한 국제 협업 프로젝트였지만, 차량 설계와 모델 기획을 한국 기업이 주도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단순한 신차 발표가 아니었다. 철강과 기계 산업을 구축한 나라가 이제 자동차 설계 능력을 갖춘 제조 국가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오늘날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출발점도 바로 이 장면에 있다.
전자산업에서도 정책과 기술의 결합이 비슷한 위력을 발휘했다. 1960년대 후반 정부는 전자산업을 새로운 수출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실태 조사를 추진했다. 이에 정만영을 중심으로 한 KIST 연구팀은 전자산업의 기술 수준과 시장 구조를 분석해 육성 전략의 기초 자료를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전자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지정하고, 연구개발과 생산 기반 구축, 수출 확대를 일괄 추진하는 방안을 실행했다.
이러한 정책 추진에 맞물려 기술개발도 따라왔다. 1970년대 초 KIST 연구진은 국내 최초로 반도체 집적회로를 활용한 컬러TV 수상기를 개발했다. 이어서 전자교환기와 액정표시장치, 한글 터미널 같은 정보통신 기술을 개발해 산업체로 이전했다. 이러한 축적이 1970년대 삼성, 금성 등의 진출과 맞물려, 전자산업은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오르게 된다.
중화학공업화는 안보 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산업 전략이었다. 닉슨 독트린과 미군 감축이라는 현실 앞에서 한국은 자주국방을 가능하게 할 산업 기반을 고민해야 했다. 철강, 기계, 조선 같은 중화학공업은 군수 산업의 토대이면서 경제 구조를 뒤바꿀 수 있는 선택지였다. 정치가 방향을 정했고 기업이 실행을 맡았다면, 그 사이에서 “어떤 산업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한 집단은 연구소였다.
물론 이 전략이 곧바로 안정적인 성장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중화학공업화는 막대한 외채와 투자 부담을 동반했고, 두 차례의 오일쇼크는 한국 경제를 크게 흔들었다. 그러나 산업 구조는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철강, 기계, 조선, 자동차, 전자라는 제조업의 축이 갖춰지자, 1980년대 들어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호황과 맞물려 한국 경제는 폭발적인 성장 국면에 들어간다. 이렇듯 중화학공업화는 단기적으로는 위기를 낳기도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을 산업국가의 궤도에 올려놓은 토대가 되었다.
이 거대한 변화는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서사에서 KIST의 이름은 그리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철강의 규모를 계산하고, 기계설비 구축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조선소와 자동차의 기술 경로를 분석했던 사람들은 화려한 정치 연설도, 기업가의 결단도 하지 않았다. 대신 산업의 구조를 설계하고 정책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한강의 기적은 어쩌다 찾아온 기적 같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설계된 산업화였다. 그리고 그 설계도의 상당 부분은 태어난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KIST에서 그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