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는 건립과 해외 과학자 유치를 통해 조직의 핵심 뼈대를 세웠다. 연구소가 돌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마련한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하나였다.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 당시 우리나라 산업은 기술은 고사하고 ‘기술을 고르는 눈’부터 부족했다. 자동차, 조선, 반도체 같은 단어는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고, 수출의 상당수는 경공업 제품이 차지했다.
결국 KIST는 연구의 출발점을 책상 위가 아니라 공장 바닥에서 찾기로 했다. 과학자들은 쾌적한 연구실에서 나와 기름때 묻은 공장 현장으로 향했다. 무엇을 연구할지 정하려면, 산업의 현주소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1966년 11월부터 1967년 6월까지 이루어진 ‘산업 실태조사’는 그 첫 번째 원정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체계적인 기술 진단으로서, 미국 바텔기념연구소 전문가들과 KIST 과학자들이 함께 수행했다. 조사단은 서류를 검토하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전국 25개 부문, 600여 개의 선도 기업과 공공기관을 직접 방문하는 '필드 워크'를 감행했다. 그 현장에서 얻은 결론은 명쾌했다. 성장 전망이 큰 산업은 기업만이 아니라, 연구소가 떠맡아야 할 국가 과제이기도 하다는 것. 산업의 수요가 곧 연구소 운영의 방향타가 된 셈이다. 그 결과 재료공학, 화학공학, 전자공학, 기계공학, 식량자원이 KIST가 집중해야 할 5대 중점 분야로 선정되었다.
조사가 끝나자 KIST는 기업들과 연결망을 만들기 시작했다. 세미나와 간담회, 정례 협의체가 연이어 생겼다. KIST의 초기 운영이 ‘단기 연구과제’와 ‘현장 기술지도’ 중심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장에서 벌어지는 고장, 불량, 수율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곧 연구였고, 동시에 존재 이유였다. 예컨대 폴리에스터 방사 장치 문제로 멈춰선 삼덕물산의 공장에 KIST가 투입되자, 설비는 정상화되었고 회수율은 95% 이상으로 올라갔다. 이는 KIST가 ‘연구실 성과’보다 ‘현장에서 돈이 되는 성과’를 우선했음을 잘 보여준다.
산업실태조사 이후 전자공업 분야는 KIST가 선정한 대표적인 미래 산업이 되었다. 이에 KIST는 1968년 전자공업 육성을 위한 조사를 시행하고 세부 계획을 수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성과가 나왔다. 1971년 손성재 연구팀이 국내 최초로 반도체 집적회로를 이용한 컬러TV 수상기를 개발한 것이다. 프로젝트를 이끈 손성재는 회로·부품·제조 공정을 한 덩어리로 묶어 제품으로 완성하는 데 강점이 있었다. 그래서 TV 한 대가 아니라 ‘전자산업의 설계 역량’ 자체를 겨냥했다. 당시 국내 TV는 부품을 이어 붙이는 방식이라 크고 고장이 잦았는데, 손성재 연구팀은 회로를 칩에 집적하는 IC(Integrated Circuit) 기술을 끌어와 제품을 작고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조립’에서 ‘설계’로 넘어가는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나라의 컬러TV 방송은 1980년 12월에나 시작된다는 점이다. 즉 KIST는 방송 환경이 갖춰지기 한참 전부터 컬러 시대의 물건을 먼저 만들었다. 이는 "우리가 먼저 기술을 확보해야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다"라는 비전이 있어서 가능했다. 실제로 KIST의 기술과 노하우는 태동기였던 금성사(현 LG전자), 삼성전자, 대한전선 등으로 이전되어 국내 가전 산업의 성장을 견인했다.
컬러TV는 출발점에 불과했다. 1970년대 KIST의 전자기술 축적은 통신 시스템으로 확장되었고, 미국 GTE 사의 지원을 받아 KG-500 전자교환기 개발(1974~1976년)을 추진했다. 그 결과 ‘설계하고 시스템을 완성하는 경험’이 산업에 남았다. 이는 훗날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기술적 자원이 된다.
이 사례에서 KIST의 연구 방식이 드러난다. ‘당장 팔리는 제품’을 만드는 것만이 목표였다면, 굳이 컬러TV 수상기 개발에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KIST가 내다본 것은 제품이 아니라 전자산업의 시간표였다. 글로벌 시장의 중심이 컬러로 이동하는 흐름을 읽고, 부품·회로·제조기술을 국내 산업이 흡수할 수 있도록 선제적으로 확립해 둔 것이다.
전자제품이 ‘미래의 부(富)’를 상징했다면, 결핵은 그 시절 한국인의 ‘현재’였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우리나라는 '결핵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얻을 정도로 결핵이 만연했다. 1960년대 들어서 국가의 결핵 관리가 이루어지고 생활 수준이 높아져 그나마 발병률이 감소했다. 하지만 여전히 결핵은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갉아먹는 질병이었다. 당시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였던 에탐부톨을 미국 레덜리 사로부터 전량 수입했으나, 수입 원료 가격은 kg당 100달러가 넘는 고가였기 때문이다.
이 오랜 난제를 1969년 서독에서 귀국한 한 과학자가 해결했다. 뮌헨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채영복이 KIST 유기합성연구실장으로 합류한 것이 그 시작이다. 그는 귀국 직후 수입 통계를 분석하여 국민 복지와 직결된 정밀화학 연구를 강화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실제로 당시 국내에서 생소했던 정밀화학이라는 용어를 대중화한 것이 그였고, 이 목표에 따라서 유기합성 연구의 개척에 나섰다.
1970년 한독약품공업의 의뢰로 시작된 에탐부톨 합성 연구는 기술적 난관이 많았다. 그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성질이 완전히 다른’ 분자 형태를 가려내는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했다. 만약 효과가 있는 형태만 골라내지 못하면, 치료가 아니라 위험이 된다. 채영복 연구팀은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타타릭산을 활용하여 순수한 에탐부톨만 효율적으로 분리해 내는 공정을 개발했다. 이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성공한 쾌거였다. 더불어 우리나라 제약 산업을 '조립'에서 '원료 합성' 수준으로 격상시킨 사건이기도 했다. 에탐부톨의 국산화로 수입 가격은 kg당 100달러에서 20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 결과 가난한 환자들도 쉽게 결핵 약을 복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채영복의 역할은 ‘실험실에서 약을 만든 사람’에 그치지 않았다. 에탐부톨 연구는 합성 성공 이후가 더 중요했다. 공장을 짓고, 생산을 돌리고, 가격을 낮춰 사회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단계까지 가야 했다. 이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럼으로써 막대한 외화 유출을 막고, 해외에 수출까지 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970년대의 고부가가치는 꼭 거대한 설비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소재가 산업을 혁신했다. 폴리에스터 필름은 포장용·절연용으로 활용도가 높았을 뿐 아니라 미디어 산업의 핵심 소재이기도 했다.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지만, 1970년대만 해도 비디오와 오디오 테이프는 정보와 문화를 기록하는 최고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술 장벽이었다. 당시 폴리에스터 필름은 일부 선진국이 주도하던 첨단 소재였다. 국내 기업이 사오려 해도 공정 전체를 통째로 이전받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한국이 수입 의존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이유다.
때마침 선경화학(현 SKC)이 KIST에 폴리에스터 필름 기술 개발을 의뢰했다. 이 프로젝트의 키맨은 고분자연구실의 최남석이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알자(ALZA)에서 일하던 그는 1974년 귀국했고, 산업 현장 경험을 살려 폴리에스터 관련 특허와 논문을 면밀히 분석했다. 그 결과 폴리에스터 필름 생산기술이 크게 ‘필름 칩 생산’과 ‘후가공’이라는 두 단계로 나뉜다는 점을 파악했다. 이 점에 착안해 모든 공정을 한꺼번에 국산화하려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대신 기술 자립의 관건이 되는 핵심 소재, 즉 칩 개발에 연구 역량을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 결단은 1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1977년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 가능한 수준의 폴리에스터 필름 칩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강인성과 유연성, 낮은 흡수성을 동시에 갖춘 이 소재는 순수 국내 기술로 구현한 고성능 화학 소재의 성취였다. 선경화학은 1978년부터 이를 양산하기 시작했고, 매년 수천억 원대의 매출과 막대한 수입대체 효과를 거두었다.
폴리에스터 필름은 이후 자기테이프, 전자부품, 디스플레이용 광학필름 등으로 응용 범위가 넓어졌다. 선경화학도 이를 발판으로 고부가가치 소재 기업으로 체질을 전환할 수 있었다. 오늘날 SK그룹이 에너지·화학 중심 대기업 집단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연구소로부터 이전받은 초기 기술이 부스터로 작용한 셈이다. 선경화학은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979년 2월 10억 원을 KIST에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이 기부금은 '선경 연구 기금'으로 명명되었고, 우리나라 기업 역사에서 기술을 전수해준 연구소에 거액의 이익을 환원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었다. KIST와 선경화학은 연구소와 기업이 어떻게 공생하며 국가 경제를 이끌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모델이라 할 만하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IT 강국의 위상을 갖게 된 것도 KIST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96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 컴퓨터는 낯선 존재였다. 고가의 전산 장비를 도입할 외화도, 이를 운용할 인력도 턱없이 부족했다. 반면 같은 시기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IBM을 중심으로 대형 컴퓨터가 통계, 국방, 금융, 항공우주 산업에 활용되고 있었다. 일본 역시 1960년대 초부터 국산 컴퓨터 개발과 데이터 처리 인력 양성에 나서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미군 부대 외에 컴퓨터를 보유한 기관이 거의 없었고,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조차 생소했다. 전산화는 기술을 넘어 국가 혁신 역량의 격차를 드러내는 상징과도 같았다.
성기수는 이런 황무지에서 전산화의 뿌리를 내리게 한 선구자다. 1963년 처음 컴퓨터를 접한 그는 이 기계가 단순한 계산기가 아니라, 행정‧경영‧산업 전반을 바꿀 혁신적 도구임을 직감했다. 하버드대학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 남을 기회가 있었지만, 한국에 컴퓨터를 보급하겠다는 비전을 품고 귀국을 선택했다. 1967년 돌아온 성기수가 이력서를 들고 찾아간 곳은 건물이 지어지기 전의 종로 5가 KIST 사무실이었다. 그는 임시연구원으로 채용되었고, 곧바로 컴퓨터가 가져올 산업 파급효과를 분석해 제출했다. 그 타당성을 인정한 KIST는 전자계산실을 신설하며 성기수를 초대 실장으로 기용했다.
마침내 1969년, KIST는 100만 달러를 들여 우리나라 최초의 대형 상용 컴퓨터인 CDC(Control Data Corporation) 3300을 도입했다. 워낙 거액이라 예산 확보에 난항이 많았는데, 성기수가 직접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서 승인받을 수 있었다. 3년 뒤인 1972년에는 처리 능력이 3배 이상 높은 CDC CYBER 72-14로 교체되면서 KIST는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컴퓨터센터로 자리 잡았다.
이후 성기수가 이끈 KIST 전자계산실은 한국 행정 전산화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정부조차 예산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던 그 시절, 성기수는 CDC 3300을 활용해 경제기획원 예산국과 연결하는 데이터 통신망을 구축했다. 국내 최초의 시분할 원격 처리 방식이었다. 이는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라 “국가 운영을 숫자로 관리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이어 서울시 전화요금 고지서 전산화, 중학교 무시험 추첨, 대학입시 자동 채점, 관세·전매 행정 전산화까지, 컴퓨터는 점점 정부 업무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1976년에는 한글 터미널을 개발해 한국어 기반 전산 행정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진짜 시험대가 1980년대에 찾아왔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경기 정보 시스템(GIONS)은 100만 줄이 넘는 소프트웨어 명령어를 작성해야 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외주를 준다면 500만 달러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성기수는 국내 연구진에게 기회를 달라고 정부에 요청했고, 1983년 인천 전국체전에서 먼저 능력을 증명하라는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그는 단 3개월 만에 시스템을 완성해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이 성과로 올림픽 전산화는 결국 KIST에 맡겨졌다. 외주 비용의 10분의 1로 완성된 GIONS는 경기 일정과 기록을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송출했다. 이로써 한국은 대형 정보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나라로 진화할 수 있었다.
1984년 전자계산실은 시스템공학연구소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은 1980년대 행정 전산망과 1990년대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전자정부 세계 1위라는 타이틀 뒤에는, 국가가 가난하던 시절 “컴퓨터로 나라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한 연구자의 집요한 실험이 놓여 있는 셈이다.
컬러TV 수상기, 에탐부톨, 폴리에스터 필름, 국가 행정 전산화는 서로 다른 영역의 성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네 사례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 KIST는 ‘논문을 생산하는 연구소’라기보다는 ‘산업의 병목을 제거하는 연구소’였다는 점이다. 연구 주제는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라 산업 실태조사에서 도출되었다. 연구의 완성은 특허 등록이 아니라 공장 가동과 매출 발생으로 판단되었다. 기술은 실험실을 넘어 기업의 생산 라인으로 반드시 연결되었다.
KIST가 지향한 계약연구 체제는 이 구조를 제도화했다. 기업이 문제를 제기하면, 연구소는 기술적 해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연구성과는 기술이전, 공동생산, 심지어 연구기금 환원으로 다시 산업 생태계 안으로 순환했다. 이 점에서 선경화학의 발전기금 기부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연구소와 기업이 단지 수주·발주 관계가 아니라, 성장의 동반자로 승화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개발도상국에서는 보기 드문 모델이었다. 국가가 연구소를 세우고, 연구소가 기업을 키우고, 기업이 다시 연구 역량을 확장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그 성공 요인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철저한 수요 기반 전략이었다. 산업 실태조사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정했고, 세계 기술 흐름 속에서 한국이 흡수할 수 있는 전략 영역을 선별했다. 둘째, 선택과 집중의 실행력이었다. 폴리에스터 칩처럼 핵심 공정에 집중하고, 에탐부톨처럼 사회적 파급력이 큰 정밀화학에 자원을 투입했다. 셋째, 인재의 귀환과 현장 중심 연구 문화였다. 해외에서 훈련받은 과학자들이 귀국해 공장 바닥과 행정 현장에서 기술을 구현했고, 이는 모방을 넘어 응용과 축적으로 이어졌다.
결국 초창기 KIST는 한 가지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가난한 나라가 어떻게 기술을 축적할 것인가?” 그 답은 거창하지 않았다. 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가장 먼저 읽고, 가장 빠르게 실현하며, 기업이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밀어주는 것. 따라서 그 시대 KIST의 성적표는 논문 목록이 아니라 ‘바뀐 현실’이었다. 공장에서는 멈춰선 설비가 다시 돌았고, 약국에서는 값비싼 수입 약이 저렴한 국산으로 대체되었으며, 행정에서는 손으로 하던 업무가 데이터와 네트워크로 넘어갔다. KIST는 그 과정을 통해 한국 산업의 시간을 빠르게 앞당겼다. 연구소가 산업을 위해 존재할 수 있음을, 그것이 국가 성장의 강력한 엔진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