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으로 돌아온 과학자들

by 배대웅

1969년 모습을 드러낸 KIST는 당시의 공공건축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통은 예산과 공기에 쫓기며 어설픈 타협으로 끝나기 일쑤였으나, KIST만큼은 달랐다. 설계부터 공정 관리, 자금 집행, 자재 구입까지 모든 과정이 한‧미 공동사업의 원칙에 따라 KIST와 바텔기념연구소의 합의로 굴러갔다. 그래서 결과물도 확연히 달랐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노출 콘크리트 공법의 본관과 현대적 연구동들은 미래의 전초기지에 가까운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가난했던 주변과는 다른 풍경이 KIST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주는 듯했다.


건물만 새로웠던 게 아니다. KIST의 연구실과 복도는 다양한 장비들로 채워졌다. 대학과 연구기관이 아직 실험대 하나, 시약 한 병을 아껴 쓰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최신식 분석 장비와 고성능 실험 도구들이 복도를 따라 늘어섰다. 연구자들은 막 포장을 뜯은 기계 앞에서 설명서와 배선도를 펼쳐 놓아야 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 도입이 아니었다. 눈대중과 경험에 의존하던 연구에서 벗어나, 정밀 측정과 반복 실험, 재현 가능한 데이터에 기초한 연구의 물적 조건이 갖춰진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하드웨어였을 뿐이다. 연구소라는 유기체를 움직이게 하는 건 건물과 장비만이 아니다. 그 안에서 연구를 설계하고 밀어붙일 소프트웨어, 즉 ‘사람’이 결정적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1960년대 한국에서 가장 희소했던 자원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두뇌 유출이라는 모순


당시 우리나라에는 연구소를 채울 만한 과학기술 인력 풀이 거의 없었다. 해방 직후 전국의 이공계 박사학위 소지자는 10여 명이었고, 한국전쟁은 그나마 있던 대학과 연구 기반을 초토화했다. 유능한 학생들은 더 나은 교육과 연구 환경을 찾아 미국과 유럽으로 떠나야 했다. 그러나 학위를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온 귀국자 비율은 극히 낮았다. 특히 자연과학과 공학 분야는 박사들의 80~90%가 현지에 잔류했다.

이것은 꼭 임금 격차 때문만은 아니었다. 국내에는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실험실, 장비, 연구비가 없었다는 문제가 더 컸다. 따라서 귀국은 곧 경력 단절을 의미했다. 기업들에는 고급 연구 인력을 흡수할 일자리가 부족했고, 대학교수나 국공립연구소 연구원들의 급여는 한 가구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도 벅찼다. 실제로 박사학위를 가진 연구자가 생활비를 벌려고 강의 등의 부업을 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첨단 인프라와 안정된 연구비가 갖춰진 미국을 떠난다는 것은 개인적 결단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정부 역시 이 흐름을 되돌릴 전략이 없었다. 1962년 수립된 제1차 기술진흥 5개년 계획은 산업기술 육성을 강조했지만, 해외 고급 인력을 조직적으로 유치하고 정착시키는 방안은 부재했다. 유학생의 미귀국은 병역 기피나 외화 낭비의 문제로만 다루어졌을 뿐, 왜 안 돌아오는지에 대한 근본적 진단은 부족했다.


결국 한국은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산업화를 위해 고급 인력이 절실했지만, 가장 우수한 인재들은 해외에 정착하고 있었다. 두뇌 유출은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었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구조적 모순이었다.


KIST의 설립은 바로 이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건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그들이 돌아올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인프라, 연구비, 급여, 그리고 자율성을 갖춘 환경을 구축하는 것. 그래서 질문도 달라졌다.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돌아오게 할 것인가?”로. 그 질문을 가장 먼저 정책으로 구체화한 인물이 최형섭이었다.


어떻게 돌아오게 할 것인가


최형섭은 바텔기념연구소와 손을 잡고 철저하게 준비된 인력 유치 작전에 돌입했다. 바텔기념연구소는 해외 500여 개 기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과학자들에게 KIST 설립을 알리는 안내 책자를 배포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가난한 고국에서 들려온 연구소 설립 소식에 800여 명의 과학자들이 지원 의사를 밝혔다.


최형섭은 서류상으로만 인재를 고르지 않았다. 그들의 철학과 가치관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66년 10월, 후보자들과 마주한 자리에서 KIST의 성격을 분명히 밝혔다. "노벨상을 목표로 하거나 개인의 명예를 위해 미국에서 하던 연구를 계속하고 싶은 사람은 오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장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는 KIST가 산업화를 지원하는 계약연구기관이며, 기초연구보다는 기업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순수과학을 전공한 학자들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형섭은 애국이라는 대의명분에 따라 이 취지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러면서도 최형섭은 애국심에만 호소하는 일이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과학자들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 부딪힐 현실적인 장벽을 제거하기 위한 시스템을 도입했다.


첫째는 당시 사회적 상식을 뛰어넘는 보상 체계였다. KIST 책임연구원의 월급은 6만 원에서 9만 원으로 책정되었다. 이는 서울대 교수 급여의 3배에 달하는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심지어 대통령보다도 급여가 높은 사람도 수두룩했다. 당연히 특혜 시비가 일어났고, “왜 그들만 특별대우를 해주느냐”는 진정이 정부에까지 접수되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상황을 보고받고도 과학자들의 처우를 그대로 보장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우리나라를 오래 지배해 왔던 사농공상의 유교적 관념에서 벗어나, '과학기술자가 대접받는 시대'를 여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둘째는 완벽한 정착 지원이었다. 홍릉 단지 내에 건설된 현대식 아파트와 독신자 기숙사가 연구원들에게 무상으로 주어졌다. 해외 생활에 익숙한 가족들을 위한 미국식 의료보험 시스템, 자녀 교육을 위한 사립학교 입학 등의 편의도 제공했다. 특히 3년 근무 시 1년의 유급 연구휴가를 주는 제도는 선진 연구 동향에서 뒤처질까 우려하던 과학자들에게 가장 환영받는 조건이었다.


셋째는 자율적 운영이었다. KIST는 연구실 단위의 독립채산제를 채택하여 연구실장에게 예산과 인사 등의 전권을 부여했다. 이는 관료주의적 통제를 거부하던 해외 유학파들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과학자에 대한 신뢰와 자율에 기초한 이 시스템은 훗날 설립된 수많은 정부출연연구소의 표준 모델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최형섭이 박정희로부터 "연구소 운영에 정부가 간섭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받아내서 가능했다. 최형섭은 이 철학을 현지의 과학자들에게 확신시켰다. 이러한 진정성 있는 설득과 정부의 강력한 지원 의지는 과학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해외 인재 유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18명에 달하는 과학자가 즉각 KIST행을 결정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김재관, 철강과 자동차 산업의 밑그림을 그리다


김재관은 서독 뮌헨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철강 기업 데마크(DEMAG)의 기획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 운명은 1964년 12월 박정희의 서독 방문 현장에서 바뀌었다. 그는 뮌헨 유학생 조찬 모임에서 대통령에게 직접 준비한 '한국 철강산업 육성방안'을 전달했다. "철강이야말로 산업을 일으키는 필수 기반입니다. 자금이 많이 들어서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사업입니다." 이 말을 들은 박정희는 내심 놀랐다. 진작에 종합제철공장을 건설하려 했지만, 경제성과 기술성이 없다는 이유로 세계은행 등에서 자금을 지원해주지 않아 포기 직전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재관은 2년 뒤 KIST 유치 과학자 1호로 귀국했다. 그리고 제1연구부장을 맡아서 포항종합제철소 건립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세계은행은 50만 톤 규모도 과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103만 톤의 고로를 고집하여 결국 관철시켰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 자동차 모델인 '포니'를 구상하고 기술 자립화를 추진했다. "자전거도 못 만드는 나라에서 무슨 자동차냐"는 비웃음 속에서도 그는 표준형 차체 개발 기획서를 만들어 정주영 회장과 의기투합했다. 오늘날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현대자동차그룹이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훗날 ‘한강의 기적’의 핵심 분야가 될 철강과 자동차 산업의 밑그림을 김재관이 그려낸 것이다.


안영옥, 노벨상 대신 기술을 택하다


안영옥의 귀국은 집안에 흐르는 애국심의 발현이었다. 그의 아버지 안국형은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모금원이었다. 독립운동가로서 신학문을 익힌 그는 큰아들에게 "막내는 반드시 미국에서 공부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안영옥은 큰형이 빚을 내서 마련해 준 돈으로 미국에 갔고, 아이오와주립대학에서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세계적 화학 기업인 듀폰의 중앙연구소에서 일하던 중에 1967년 불쑥 찾아온 최형섭을 만나게 되었다.


그를 움직인 것은 최형섭의 한마디였다. "노벨상은 나중에 받아도 됩니다. 지금 조국은 기술이 없어서 가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노벨상 대신 기술을 개발해 조국을 살립시다." 이 말을 들은 안영옥은 곧바로 가족들과 귀국을 결정했다. KIST에서는 고분자연구실장을 맡아서 에어컨의 냉매와 반도체 절연 물질로 쓰이는 프레온가스를 개발했다. 그가 KIST에서 받은 급여는 8만 1천 원으로 박정희 대통령보다도 1만 원이 높았다. 그럼에도 듀폰에서 받던 급여에 비하면 30% 수준이었다.


이후에는 산업계로 나가 기업연구소와 공장 설립을 주도했고, 1981년 KIST가 세운 벤처캐피털 회사인 한국기술진흥의 대표를 맡았다. 1970~80년대 수많은 기업이 그의 손을 거쳐서 탄생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김훈철, 조선업의 스케일을 확장하다


김훈철은 미국 해군선박연구개발센터에서 연구하다가 1968년 KIST로 돌아와 조선해양연구실장을 맡았다. 그 무렵 한국의 조선업은 1만 톤급 선박을 조립하던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훈철은 "20만 톤 생산 규모의 조선소를 건설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로서는 파격을 넘어 황당하기까지 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KIST 유일의 조선공학 전문가였던 그의 말이었기에 진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김훈철 주장의 요지는 이랬다. "배를 지으려면 선박 설계, 선박 용접기술, 선박용 엔진의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리나라가 20만 톤 선박의 설계 능력은 없으나 외국에서 도면을 사 오면 되고, 선박 용접기술은 스웨덴 조선소와 협상해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으며, 선박용 엔진은 어차피 구입해서 쓰는 게 원칙이다." 그러니 3가지가 다 충족된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대통령과 각 부처 장관, 기업 대표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발표됐다. 예상대로 반발이 거셌다. 우리나라 사정상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때 한 번 해보겠다고 나선 이가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이었다. “아파트 건설과 선박 제조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해보겠습니다.” 그 결단은 곧 울산의 바닷가로 이어졌다. 허허벌판이던 해안에는 거대한 도크와 크레인이 들어섰고, 수십만 톤급 선박이 건조되는 풍경이 일상이 되었다. 오늘날 울산을 상징하는 대형 조선소의 스카이라인은, 당시 회의 속에서 던져진 그 한마디에서 출발했다. 제철, 화학, 기계와 더불어 조선이 산업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김훈철의 집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선박 설계의 핵심 시설인 길이 200m가 넘는 대형 수조 건설도 제안했다. 2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필요한 일이라 KIST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으나, 김훈철은 끈질긴 설득 끝에 정부의 승인을 받아냈다. 1978년 완공된 이 수조 덕분에 우리나라 조선업은 1990년대 세계 1위로 도약할 수 있는 독자적 연구 역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윤여경, 숫자로 산업화를 계산하다


윤여경은 미국 퍼듀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마치고 노던 일리노이 가스회사에서 일하다가 귀국했다. 유치 과학자 중 드물게 문과 전공자였던 그는 KIST의 초대 경제분석실장을 맡았다. 과학기술이 국가의 '돈'과 '산업'이 되려면, 치밀한 경제성 평가가 필수라는 최형섭의 혜안이 반영된 인선이었다.


KIST 경제분석실은 제철, 석유화학, 기계, 조선 등 대규모 산업 프로젝트의 타당성을 수치로 검증하는 역할을 맡았다. 세계은행과 외국 컨설팅 기관들이 경제성이 없다고 평가한 사업들에 대해, 윤여경은 장기 수요 예측과 산업 연관 효과를 분석해 다른 결론을 제시했다. 이것은 단순한 낙관론이 아니었다. 인구 증가율, 국내총생산 성장 전망, 수출 구조 변화, 원자재 수급 조건 등을 종합해서 도출한 계산 결과였다. 산업화는 기분이나 의지로만 밀어붙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숫자로 설득해야 하는 일이었다. 윤여경은 그 숫자를 만들어냈다.


특히 김재관의 포항종합제철 건립 계획, 김훈철의 대형 조선소 건설 계획이 정부와 세계은행의 회의론을 뚫고 확정되는 과정에 결정적인 논리를 제공했다. 50만 톤도 과하다는 외부 평가와 달리, 윤여경은 국내 철강 수요의 장기 증가 가능성과 수입 대체 효과를 분석해 대형 고로 건설의 경제성을 제시했다. 조선과 자동차 산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기 수익성만 따지면 무모해 보였지만, 산업 연관 효과까지 고려하면 국가 전체의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한국의 중화학공업화는 훗날 ‘정책의 승리’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 정책의 뒤편에는 객관적 수치와 모델, 냉정한 계산이 있었다. 윤여경은 그 계산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철강, 자동차, 조선이 산업의 골격을 세웠다면, 경제분석실은 그 골격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중을 계산한 구조 설계자였던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례적인 역두뇌 유출


KIST의 해외 과학자 유치는 한국을 넘어 국제사회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두뇌 유출은 대체로 일방향적 흐름으로 이해되었다. 개발도상국의 고급 인력은 선진국으로 이동했고, 그 흐름을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이 점에서 1960년대 후반 KIST가 해외 과학자를 집단적으로 귀환시켜 안착시킨 사례는 국제적으로도 드문 경우였다. 실제로 1975년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해럿 앤 헨트게스는 KIST의 해외 인력 유치 사례를 연구 대상으로 다루었다. UNESCO와 OECD에서도 개발도상국의 두뇌 유출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KIST를 중요한 참고 사례로 검토했다. 그것은 “조건이 갖춰지면 인재는 이동한다”라는 정책적 시사점으로 인식되었다.


KIST의 1세대 해외 유치 과학자들은 계약 기간이 끝난 뒤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대로 국내 연구소, 대학, 기업 등에 남아 연구를 이어갔다. 이로써 철강, 자동차, 조선, 화학, 전자 산업의 토대가 되는 연구 역량이 형성되었고, 산업화의 가속을 뒷받침하는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산업 경쟁력의 상당 부분은, 그때 귀국한 1세대 과학자들이 남긴 성과의 기반 위에 서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낭만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높은 연봉과 자율성 뒤에는 막중한 책임과 압박도 뒤따랐다. 연구는 곧 산업 성과로 연결되어야 했고, 실패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 정책의 좌절로 해석될 수 있었다. 안영옥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3~4년 사이에 함께 귀국한 18명 중 4명이 스트레스 때문에 암으로 사망했다.” 국가 전략의 최전선에 섰던 이들의 선택은 개인에게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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