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탄생의 드라마

by 배대웅

1965년 5월 17일, 워싱턴 D.C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용기 에어포스 원을 보내는 등 파격적인 국빈 대우로 맞았다. 이렇듯 두 정상의 회담은 겉으로는 혈맹의 우의를 과시하는 이벤트로 보였다. 그러나 화려한 행사의 이면에는 냉전의 정점에서 벌어진 고도의 정치경제적 거래가 숨어 있었다.


당시 세계는 두 개의 전쟁이 겹쳐 돌아가고 있었다. 하나는 베트남 정글에서 벌어지는 실제 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발도상국을 둘러싼 체제 경쟁이었다.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베트남전에 본격 개입했고, 1965년에는 북폭과 지상군 투입을 확대했다. 그야말로 ‘인도차이나의 늪’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던 셈이다. 전쟁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며, 대학가와 언론을 중심으로 반전 여론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존슨은 한편으로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라는 기치에 따라 복지 확대와 빈곤 퇴치를 추진했다. 그러나 전쟁은 예산과 정치적 자산을 빠르게 잠식했다.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존슨으로서는 전장에서 함께 싸워줄 ‘아시아의 동맹군’이 절실했다. 미군 단독이 아니라 다국적 개입의 형식이 그나마 정당성을 확보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전혀 다른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그러나 외환은 부족했고 산업 경쟁력은 취약했다. 경공업이 수출을 주도했으나 기술 혁신의 동력은 부재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외자를 일부 확보했으나, 중화학공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은 여전히 공백 상태였다.


군인들의 피와 맞바꾼 연구소


이 두 위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거래의 가능성이 열렸다. 먼저 박정희가 베트남 파병이라는 카드를 꺼냈다. 전투 병력 제공은 군사 협력을 넘어 미국의 대외전략에 동참한다는 지분 확보를 노린 것이었다. 한국은 그 대가로 원조 삭감을 막고,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확보하려 했다.


그래서 5월 18일 발표된 한미 공동성명에는 당초 없던 조항이 추가되었다. “한국의 공업 발전에 기여할 종합 연구기관의 설립을 양국이 공동으로 지원한다.” 한국의 입장에서 이 문장은 단순한 협력 조항이 아니었다. 전장에 투입된 군인들의 피와 산업화라는 미래를 맞바꾼 상징적 문장이었다.


원래 존슨은 과학기술보좌관 도널드 호닉의 건의에 따라 한국에 공과대학을 지어주려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를 거절하면서 '공업기술 연구소'를 요청했다. 당장 굶주림을 해결해야 하는 나라에 필요한 것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기업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수출 기술을 만들어줄 연구소라는 판단이었다. 훗날 박정희는 이를 두고 "미국이 주는 고기(원조) 대신, 고기를 잡는 낚싯대(기술)를 선택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물론 이전에도 정부는 연구소 설립을 여러 번 시도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될 무렵, 문교부가 '한국과학기술원' 설치안을 마련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1963년 경제기획원은 국립공업연구소를 재단법인화하여 종합연구소로 키우려고도 했다. 그러나 이 계획들은 모두 서류상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돈’이었다. 전후 복구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수천만 달러가 드는 종합연구소 설립은 무리였다. 외자 조달 없이는 재정적 현실성이 없는 계획이었다. 둘째는 '사람'이었다. 연구소를 짓는다 해도 그 안을 채울 과학자들이 국내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외의 인재를 데려오자니, 이미 좋은 대우를 받는 그들을 불러들일 만한 유인책이 부재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관료주의'였다. 당시 국공립 연구소들은 정부 산하 기관으로서 공무원들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연구비를 집행할 때마다 수십 개의 도장을 찍어야 했고, 처우는 일반 공무원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환경에서 창의적인 연구나 산업계와의 유연한 협력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결국 1965년 이전의 실패들이 주는 교훈은 분명했다. "정부가 투자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파격적인 독립 모델이 필요하다.” 연구소 설립에는 이제까지와 다른, 과학기술에 대한 새로운 철학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한국판 바텔 만들기


1965년 7월, 호닉이 이끄는 조사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조사단에는 벨연구소 소장 제임스 피스크, 바텔기념연구소 소장 버트럼 토머스 등 미국 산업계의 거물들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산업 현황부터 인재 풀까지 전방위적으로 살피며 ‘한국형 연구소’의 청사진을 구상했다.


초창기에는 벤치마킹 모델로 벨연구소가 고려되었다. 통신기업 AT&T가 세운 이곳은 응용연구는 물론 순수 기초연구에도 강점이 있었다. 특히 연구자들이 원하는 연구를 마음껏 하도록 지원해 주는 자율성이 뛰어났다. 벨연구소가 산업계 연구소로서는 이례적으로 다수의 노벨상을 석권한 배경이기도 하다. 다만 현장 조사 결과, 이 모델은 한국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음이 드러났다. 벨연구소는 거대 통신기업이라는 안정적 재정 기반이 있어서 장기적 기초연구를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장기 투자는 가난한 한국으로서는 불가능했다.


결국 한국의 산업에 곧바로 이익을 줄 응용기술 연구소가 적합하다는 결론이 났다. 이에 바텔기념연구소가 새로운 모델로 떠올랐다. 벨연구소의 장점이 연구 자율성에 있었다면, 바텔기념연구소의 그것은 계약 연구에 있었다. 계약 연구는 연구소와 기업을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로 묶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기업은 연구비를 대고, 연구소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개발해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벨에서 바텔로의 방향 전환에는 전문가들의 통찰이 결정적이었다. “괜히 선진국 연구소를 따라 하다가, 자국 산업과 동떨어지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호닉은 이러한 결론을 모은 보고서를 백악관에 올렸다. 그 논리는 명확했다.


‧ 연구소는 정부 출연금으로 기본 인프라를 확보하되,

‧ 산업계 계약 연구를 통해 시장과 연결되고,

‧ 장기적으로는 자체 수입으로 자립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자 곧바로 구체적 실행 조치가 뒤따랐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는 바텔기념연구소에 연구소 설립 방안 수립 용역을 맡겼다. 이리하여 1965년 9월 바텔기념연구소 전문가들이 한국에 와서 추가 조사를 진행했고, 그해 12월 <KIST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사보고서>가 완성되었다. 이 보고서는 KIST를 ‘한국판 바텔기념연구소’로 설계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 핵심은 정부와 산업계 계약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독립법인 형태의 다분야 종합연구소였다. 그리고 1966년 2월, 한국 정부와 미국 국제개발처는 KIST 설립에 관한 협정에 서명하여 재정 지원과 기술 협력을 약속했다.


설계자 최형섭


KIST 설립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가 “누가 이 연구소를 이끌 것인가”였다. 이건 단순히 연구소를 운영하는 일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낯설고 새로운 조직을 기반부터 설계해야 하는 과업이었다. 흔한 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일”이었던 셈이다. 이 일에는 국내 산업과 해외 과학기술 트렌드를 모두 이해하는 최고의 전문가가 필요했다. 1966년 초 설립 실무가 본격화하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은 원자력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최형섭 박사를 초대 소장에 내정했다.


최형섭은 1920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직접 무전기를 만들거나 화학 실험을 하는 열혈 과학 소년이었다. 그래서 일본 와세다대학에 진학할 때도 채광야금학(금속공학)을 전공했다. 훗날 최형섭은 그 이유가 “장래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면 지하자원 개발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와세다대학에서 그는 채굴한 광석에서 유용한 성분을 분리해내는 선광 기법에 관심을 가졌다. 이 주제는 이후 미국 유학 시절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1917년 출범한 이화학연구소(리켄)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리켄이 개발한 기술들은 논문을 넘어 산업계로 이전되었고, 그 기술로 창업한 기업들이 ‘리켄 콘체른’이라는 대규모 기업집단을 이룰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전시경제와 맞물려 리켄 콘체른은 중화학공업의 핵심 기반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연구소와 산업계의 긴밀한 연계는 일본의 과학이 산업밀착형으로 발전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일본에 유학했던 최형섭도 이 모델을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다.


1944년 졸업 후 조선광업진흥주식회사에서 일하던 최형섭은 이듬해 해방을 맞게 된다. 그리고 경성대학 이공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고, 그대로 공군 장교로 입대했다. 그는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도 미국 유학을 계획했다. 1953년 12월 예편 직후 미국 노터데임대학의 박사과정에 입학했고, 냉전으로 인한 군사연구가 활발한 상황 속에서 해군연구소의 X선 회절에 관한 과제를 수행했다.


다만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조국을 생각하면, 값비싼 X선 회절 장치를 쓰는 연구는 사치로 느껴졌다. 그보다는 산업화로 직접 이어질 수 있는 연구가 더 시급해 보였다. 이에 최형섭은 1955년 미네소타대학으로 옮겼고, 저품위 철광석에서 유용한 성분을 뽑아내는 제련 방법으로 연구주제를 바꿨다. 이것은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 연구했던 부유선광법과도 연관이 깊었다. 그가 목표한 대로 국내 광업 현장에 직접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1958년 최형섭의 박사학위 취득 소식은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화제였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금속공학 박사학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국 직후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실제로도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원자력연구소의 연구관으로도 근무했고, 대한중석에 공장을 세우는 일을 돕기도 했다. 당시 대한중석은 국가 전략 광물 기업으로서 국책사업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요컨대 최형섭은 한 대학에 소속된 교수를 넘어, 과학기술계를 떠받치던 엘리트 공학자 집단의 일원이었다. 서울대 교수였지만 동시에 원자력 연구에 참여했고, 산업 현장의 기술 자문도 맡았다. 고급 인력이 부족했던 우리나라에서 최형섭과 같은 박사 한 명이 곧 연구소이자 공장이자 정부위원회였던 셈이다.


최형섭이 정부의 신뢰를 얻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박정희는 수출 효자 품목인 중석(텅스텐)의 부가가치를 높이도록 기술 자문을 해준 최형섭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1962년 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발탁했다. 1959년 설립된 원자력연구소는 만성적인 전력 부족 문제를 극복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었다. 당시 막 상용화되던 원자력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었다. 최형섭은 국가 전력사업을 총지휘하며 본격적인 과학 관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렇듯 학계·산업계·정부를 두루 거친 최형섭의 비전은 확고했다. “우리나라 같은 개발도상국이 생존하려면 과학기술에 우선 투자해야 한다. 경공업 중심 구조를 고부가가치 기술 산업으로 고도화하지 않는 한 성장은 불가능하다.” 1965년 스웨터를 2천만 달러나 수출했다고 자랑하는 박정희에게 언제까지 그런 것만 할 거냐고 질타한 것도 그래서였다. 이때 깨달음을 얻은 박정희가 미국에 공업기술 연구소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최형섭은 국내에서 연구소라는 조직을 가장 잘 이해하는 전략가이기도 했다. “지금 한국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연구를 해서는 곤란하다. 기업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해야 한다.” 박정희는 이러한 통찰과 비전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그에게 KIST 설계의 중책을 맡긴 것이다.


과학기술의 ‘치외법권’


1966년 2월 10일, 마침내 KIST가 정식 출범했다. 그 시작은 매우 초라했다. 갓 임명장을 받은 최형섭은 사무실조차 없어 어머니가 입원한 병실에서 집무를 시작해야 했다. 이후 한일은행 청계천 6가 지점장이 내준 어물시장 옆 낡은 건물에 입주할 수 있었다. 이 건물 5층의 작은 셋방에 KIST의 첫 간판이 걸렸다. 그 10평 남짓한 공간에는 최형섭 소장과 직원 두 명뿐이었다.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고 파리가 들끓는 그곳에서, 이들은 산업화의 과제를 짊어질 국가 연구소의 설계도를 그려나갔다.


KIST가 기존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해외 유학을 거쳐 국내 산업 현장을 경험한 최형섭이 누구보다 이 점을 잘 알았다. KIST와 같은 연구소는 관료제의 틀 안에 갇히는 순간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재정 안정성과 운영 자율성을 동시에 보장하는 별도의 법적 장치를 구상했다. 그것이 바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육성법>이었다. 이 법은 당시 관료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치외법권적 특혜를 담고 있었다. 그 핵심 조항은 다음과 같다.


1. 정부 출연금 보장: 정부가 연구소의 건설비와 운영비를 직접 지급하도록 명시하여 재정적 안정성을 확보했다.

2. 독립 법인화: 정부 산하가 아닌 재단법인 형태를 취함으로써 공무원 조직의 간섭과 통제에서 탈피했다.

3. 감사 및 승인 특례: 매년 사업계획 수립에 정부의 사전 승인을 받지 않으며, 회계감사는 감사원이 아닌 외부 공인회계사에게 맡김으로써 연구의 자율성을 극대화했다.


한 마디로 “국가의 지원은 받지만, 간섭은 받지 않겠다.”라는 선언이었다. 당연히 관료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국민 세금을 쓰면서 통상적 감사도 받지 않는 사례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예산 삭감 시도도 뒤따랐다. 하지만 박정희가 나서서 모든 반발을 무마시켰다. 그는 경제기획원을 향해 “과학자들이 돈 걱정하지 않게 하라”라면서 예산안의 전액 복구를 지시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산림청 소유의 임업시험장 부지를 KIST에 넘겨주기까지 했다. 국가 정책의 모든 우선순위가 KIST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모양새였다.


1966년 10월에는 서울 홍릉에서 KIST 기공식이 열렸다.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연구동 건물을 착공했고, 연구장비 반입을 위해 관세 면제 등 각종 지원 조치가 단행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국회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육성법>이 통과되어 KIST 설립과 운영의 법적 근거를 갖추었다. 이어 1967년 1월에는 <과학기술진흥법>이 제정되었고, 3월에는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과학기술처가 신설되었다.


한국은 불과 2년 전만 해도 과학기술 전담 부처조차 없던 나라였다. 하지만 KIST 설립이 트리거가 되면서 관련 법률과 조직을 순식간에 만들어냈다. 이제 과학기술을 연구할 기본 하드웨어는 어느 정도 갖춰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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