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발국가와 연구소라는 해법

by 배대웅

KIST의 설립을 이해하려면, 20세기 중반 개발도상국들이 가졌던 공통된 고민부터 짚어 봐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은 하나같이 “어떻게 선진국을 따라잡을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 이제 막 산업화의 첫걸음을 뗀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으로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선진국과의 격차는 이미 크게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러한 고민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고자, 우선 후발국이 처한 딜레마와 이를 풀기 위한 이론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그것이 1960년대 한국의 현실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맞물렸는지 검토할 것이다. 이로써 던질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시장도, 자본도, 기술도 없는 나라라면, 무엇부터 만들어야 하는가? 도로인가, 공장인가, 아니면 군대인가? 1960년대 한국의 선택은 뜻밖에도 ‘연구소’였다.


후발국의 성장 경로


1960년대, 개발도상국들이 가장 많이 참고한 성장이론 중 하나는 미국의 경제학자 월트 로스토의 ‘경제성장 단계설’이었다. 로스토는 한 사회가 발전하려면 일정한 단계를 거쳐야 함을 전제로 제시했다. 즉 모든 국가는 전통적인 농업 사회에서 출발해, 산업화와 대량소비 사회로 나아가는 다섯 단계를 밟는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르면, 후발국가도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고 제도와 법률을 정비하면 ‘도약(take-off)’의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다. 그 이후에는 선진국들이 걸어온 길을 따라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는 갓 독립한 신생국들에게는 꽤 매력적으로 들렸다. “이 길만 잘 따라가면 우리도 언젠가는 선진국이 될 수 있겠구나.”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로스토는 각 단계 사이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미 세계시장과의 기술 격차가 견고해진 상황에서, 후발국들이 선진국과 똑같은 경로를 따라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로스토의 모델은 선도국 중심의 발전경로를 지나치게 보편화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단계별 성장이 뚜렷하지 않았던 사례들이 그 근거였다. 그렇게 로스토의 선형적 발전모델에 대한 회의가 커지면서, 더 현실적인 설명을 찾아 나선 이들이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 인물이 러시아 출신의 경제사학자 알렉산더 거센크론이었다. 그의 주장이다. “산업화에 늦게 나선 나라들이 꼭 선진국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만 발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늦었기 때문에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추격해야 한다.” 거센크론은 19세기 유럽의 사례를 근거로, 후발국일수록 시장·금융·기술 등에서 부족한 부분을 국가가 나서서 대체해 왔음을 실증적으로 보였다. 예컨대 민간 금융이 부족하면 정부가 은행을 동원하고, 기업가가 부족하면 국책은행이 그 역할을 대신하며, 내수 시장이 작으면 수출 중심으로 나아가는 식이다.


이처럼 거센크론은 ‘선진국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추격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국가의 전략적 개입이 존재하고 있었다. 기술 격차는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을 줄이려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제도를 조직하고 자원을 투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통찰은 훗날 동아시아의 산업화를 설명하는 이론적 자원이 된다.


실제로 1970~80년대에 일본, 한국, 대만 등의 고도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분명했다. 정부가 앞장서서 산업 육성 전략을 짜고, 민간 기업을 지도하며, 국가 재정을 투입해 기술 개발을 밀어붙인다는 점이다. 즉 발전국가는 결국 잘 조직화된 국가 능력, 다시 말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정책 기획력과 실행력을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이는 그저 명령을 내리는 능력이 아니다. 현대 산업의 복잡한 문제를 파악하고, 최적의 자원을 배분하며, 민간 부문을 견인할 수 있는 고도의 행정적·기술적 전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때 로스토 모형이 제시했던 낙관론과는 다른 현실적 대안을 제시한 셈이었다. 이로써 동아시아 국가들은 시장과 자본이 빈약한 상황에서도 성장을 추동할 엔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기술, 그리고 기술을 조직할 수 있는 제도와 기관이다.


1960년대 한국이 처한 삼중고


이러한 이론적 맥락 속에서, 이제 1960년대의 대한민국으로 눈을 돌려보자. 한국전쟁 직후 남한은 극빈 상태에 처해 있었고, 북한보다도 회복이 더딘 형편이었다. 실제로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북한을 따라잡은 것은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다. 식민통치와 전쟁을 거치며 국내 시장 기반은 붕괴했고,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 축적도 미미했다. 게다가 근대적 산업기술이나 전문 인력도 거의 전무했다. 요컨대 시장, 자본, 기술이 모두 모자라는 삼중고에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구별되는 강점이 있었다. 그것은 ‘국가’라는 조직자의 존재였다. 1961년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산업화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고,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려 했다. 당시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제도적 미비함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의 집중과 조직화 능력 면에서는 특이할 정도로 높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그 역량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였다.


박정희 정부의 고민은 로스토 성장이론의 빈틈을 파고든 거센크론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었다. “선진국처럼 잘 발달한 시장도 없고, 투자할 자본도 부족하며, 기술조차 없다. 그럼 무엇부터 만들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분명했다. “국가 스스로 기술과 지식을 조직하자.” 즉 민간과 시장에 맡기기에는 너무 요원해 보였던 산업기술 역량을 정부 주도로 육성하자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인식에 따라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결단을 내렸다. 국내에 부족한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 원조와 차관을 끌어오는 동시에, 국가 연구소를 만든다는 실험에 착수한 것이다. 1960년대 한국에서 대학은 교육에 집중했고 기업은 생산에만 급급했다. 그러다 보니 연구개발을 수행할 주체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정부가 직접 연구기관을 육성하는 전략이 채택되었다. 그 최초의 시도가 바로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설립이었다.


발전국가를 향하여


1960년대 한국에서는 ‘발전국가’가 더 이상 책 속의 추상적 모델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국가가 직접 나서서 산업화의 기획자이자 추진자를 자임했다. 박정희 정부의 관료들은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산업화 전략을 설계했고, 필요한 제도와 조직을 과감히 신설했다. 그 중심에 바로 KIST가 있었다.


당시 한국은 과학기술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막 시작되었지만, 과학기술 인프라는 빈약했고 이공계 인력의 교육 수준도 낮았다. 외국 차관이나 원조로 공장 자금을 마련해도 정작 제품을 만들 기술이 없었다. 거기다 내수 시장은 너무 협소해 수출 산업부터 키워야 하는 처지였다. 정부는 우선 섬유, 합판, 가발 등 비교적 단순한 경공업 수출에 주력하여 외화를 벌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립가공 위주의 산업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수출이 늘수록 상품의 질을 개선하고 품목을 고도화해야 했으며,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단계적 도약도 준비해야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 주도의 기술역량 구축’이 가장 논리적인 해법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당시 한국처럼 강력한 국가만이 이러한 장기 투자에 나설 수 있었다. 민간 기업들은 영세하거나 기술 축적이 없어서 연구개발에 뛰어들 여력이 없었고, 대학 또한 기초교육에 머무르며 산업 현장과 연결되지 못했다. 요컨대 산업기술 개발 생태계 자체가 부재한, ‘구조적 공백’ 상태에 있었다.


KIST라는 전략적 발명품


국가 연구소 KIST의 설립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KIST는 한국 발전국가 모델이 가진 ‘조직 능력’의 결정체였다. 박정희 정부는 KIST라는 새로운 기관에 기존의 관료조직과는 완전히 다른 실험적 구조를 도입했다. 조직의 자율성과 예산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연구원들에게 대학교수의 3배에 달하는 파격적인 보수와 아파트를 제공했다. 이는 발전국가가 추구하는 ‘관료적 자율성과 전문성’을 과학기술에서 극단적으로 실현한 사례였다.


물론 경제개발계획의 청사진을 그린 것은 정부의 핵심 기구였던 경제기획원이었다. 그러나 경제기획원은 계획이 정말 실현 가능한지 검증할 수 있는 기술적 안목이 부족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관료들은 수많은 장밋빛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누가 이 공장을 지을 것인가? 이 기술이 과연 한국에서 작동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었다. 이는 당시 산업화를 진두지휘하던 경제기획원으로서는 큰 약점이었다. 기술적 전문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경제개발계획은 공허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KIST는 이러한 기술적 지식을 유일하게 제공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예컨대 경제기획원이 제철소를 짓겠다고 선언할 때, KIST의 과학자들은 “조강 생산량 103만 톤이 왜 적절한지, 일본의 기술을 어떤 조건으로 도입해야 하는지”를 수치와 논리로 증명했다. 이 점에서 KIST의 과학자들은 산업정책의 기술적 싱크탱크이자 집행관이었다. 그들은 포항제철의 입지를 분석하고, 기계공업 육성을 위한 4대 핵심 공장 계획을 입안하며, 국가 전체의 기술 지도를 그려나갔다. 자본도 시장도 없는 정부가 기술 창출 기관부터 만든 이 결정은 매우 선진적인 투자였다. 이렇게 KIST와 그 뒤를 생긴 분야별 정부출연연구소들은 반도체, 정보통신, 자동차, 화학 등 한국 주력산업에 기둥이 되었고, 수백조 원대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다. 요컨대 KIST는 단순한 연구기관이 아니라, 산업화라는 시대정신을 이루기 위한 ‘전략적 발명품’이었던 셈이다.


최초의 질문을 한 번 더 되짚어보자. 시장도, 자본도, 기술도 없는 국가는 무엇을 먼저 조직해야 하는가? 한국의 경험이 보여준 대답은 분명하다. 우선 기술부터 조직하라. 국가가 나서서 미래의 시장과 산업을 활성화할 연구소를 세우고 기술 역량을 축적하라. 1960년대 한국은 그렇게 함으로써 산업화라는 불가능해 보이던 도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출발점에 “왜 하필 KIST였는가”에 대한 역사적 답이 놓여 있다. KIST의 탄생은 단순히 과학기술정책의 산물이 아니라, 후발국이 겪는 치명적 딜레마를 돌파하는 고도의 정치경제학적 해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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