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홍릉에서 그려진 대한민국의 설계도

by 배대웅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 산업국가다. 명목 GDP 기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며, 반도체·조선·자동차 등 첨단 제조업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제조업 경쟁력 지표 역시 최상위권이다.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의 산업경쟁력 지수에서 한국은 1990년 세계 16위에서 2010년경 4위까지 상승했다. 또 한국은 연구개발(R&D) 강국이기도 하다. 2020년 기준 국내총생산 대비 R&D 투자 비중은 4.8%에 이르러 이스라엘에 이어 OECD 회원국 중 2위를 기록했다. 투자 비중뿐만 아니라 절대 규모로도 세계 최상위권이다. 이 지표들은 한국 경제가 양적 성장을 넘어 기술혁신과 고부가가치 제조업을 중심으로 질적 발전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과거 국제 원조에 의존하던 최빈국이 이제는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선진국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성취를 단순한 ‘기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이면에는 국가 전략, 연구개발 제도, 인적 자본을 결합시킨 치밀한 설계와 이행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선진국 문턱을 넘어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과거로 눈을 돌리게 만든다. 그 시작점 중 하나로 1966년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꼽을 수 있다.


기술의 불모지에 세운 연구소


1960년대 초 대한민국은 산업화의 초입에 있던 농업국가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 남짓, 수출 품목은 합판·섬유·가발 등 경공업 제품이 대부분이었다. 외국에서 기술을 사 와도 이를 흡수하거나 개량할 역량이 부족했다. 문제는 단지 돈이 없다는 데만 있지 않았다. 무엇을 개발할지, 어떻게 산업을 육성할지, 기술을 어디서부터 쌓아야 할지 판단할 제도적 근거 자체가 없었다. 이런 일을 하려면 과학기술의 기반과 전문가 집단이 필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대학이나 기업에서 연구개발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이 정부 지원을 받는 공공 연구소에 한정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학계의 지식과 산업현장을 연결하고, 기업에 선진 기술을 공급하는 브레인 역할을 해줄 곳이 전무했다.


따라서 산업화를 뒷받침하고 기술을 육성할 '유능한 연구소'의 등장은 국가적 과제였다. 실제로 1961년 말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기획원에 산업기술 연구소 설립을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1962년에는 민간 전문가들과 함께 계획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열악한 국가 재정으로 인해 거대 연구소를 자체 설립하기는 어려웠다. 기존 연구소의 통합이나 민간 주도의 설립도 시도되었지만 모두 무산되었다.


그러다 의외의 돌파구가 외교에서 열렸다. 1965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산업기술 연구소의 필요성을 제안했고, 미국이 이를 수용하여 공동성명에 포함되었다. 이는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보상이자, 미국의 냉전 전략과도 맞물린 결과였다. 같은 해 7월 존슨 대통령의 과학기술 특별보좌관 도널드 호닉이 이끄는 조사단이 방한하여 연구소 설립 타당성을 점검했다. 조사단은 기존의 연구시설을 둘러보며 실태를 파악했고, 협력 파트너로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를 선정하였다. 이어서 KIST 설립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백악관에 제출했다. 여기에는 ‘정부가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되 운영은 독립적이고 산업 수요에 부응하는 연구소’라는 청사진이 담겼다. 이는 한국에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연구기관으로서, 국가 주도의 산업화 전략에 과학기술을 접목한다는 원대한 구상이었다.


이 구상에 따라 이듬해 KIST가 만들어졌다. 1966년 2월 설립위원회가 발족했고, 그해 9월 대한민국 최초의 과학기술 종합 연구기관으로서 문을 열었다. 초대 소장은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최형섭 박사가 맡았다. 최형섭은 대통령을 설득하여 KIST를 기존 공공기관과는 다른 방식으로 출범시켰다. 정권의 이해에 따라 운영이 좌우되는 것을 막고자 독립된 이사회와 예산 운영 시스템을 갖췄다. 연구 방식 역시 산업 수요와 직접 연결하는 계약연구체제를 택했다. 여기에 서울 홍릉의 임업시험장 부지를 활용하는 입지 또한 상징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나라를 살릴 기술을 개발할 연구소가 더 중요하다"라며 기존 시설을 이전하고 KIST에 자리를 내주었다.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


다만 하드웨어만 갖췄다고 연구소가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에 못지않게 고성능의 소프트웨어 역시 필요하다. 이 점에서 갓 출범한 KIST의 최대 과제는 우수 인재의 확보였다. 당시 국내 이공계 인재풀은 턱없이 부족했다. 전국의 대학원생을 다 합쳐봐야 900명 남짓이었고, 국제학술지는 연간 수십 편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런 수준의 자원으로 거대한 종합 연구소를 꾸려나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최형섭 소장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1950년대 유학을 떠나 미국과 유럽에 정착한 한국인 과학자들이 있었다. 최형섭은 이들을 찾아다니며 KIST에서 함께 일하자고 설득했다. 귀국을 망설이는 과학자들에게는 조국의 뒤처진 현실을 강조했다. “KIST는 과학자들이 좋아하는 사치스러운 기초연구는 못 한다. 그러니 노벨상 받고 싶은 사람은 오지 마라. 우리는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이렇게 조국의 발전을 위해 모인 1세대 연구자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18명 중 상당수가 미국, 독일, 일본 등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젊은 과학자들이었다. 그러자 정부도 파격적인 대우로 화답했다. KIST 연구원들의 초봉은 서울대 교수보다 세 배 높게 책정되었고, 일부는 대통령보다도 많은 급여를 받았다. “왜 그들만 특혜를 주느냐”는 논란도 제기되었지만, 정부는 인재를 데려오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국내 최고 대우를 받았어도, 해외에서 받던 수준에 비교하면 30%에 불과했다. 국내 자원이 부족한 현실에서 기술 인재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해줘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던 셈이다.


출범 초기 KIST의 전략은 한마디로 ‘추격형 연구개발’이었다. 선진국의 기술과 정보를 국내에 들여와, 산업현장에 맞게 개량하고 기업에 이전시키는 일. 이에 KIST는 설립 직후부터 정부 및 산업계와 긴밀히 협력하며 국가 전략과제들을 수행했다. 1967년에는 국산 1호 컴퓨터(세종 1호) 개발에 착수했고, 1968년에는 화학공업 진흥을 위한 기초연구들을 진행했다. 특히 1969년 경제기획원의 요청으로 착수한 기계공업 육성 방안 연구는 KIST가 산업화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했는지를 보여준다. KIST의 유치 과학자 대다수가 투입된 이 프로젝트에서, 연구팀은 수개월의 합숙까지 불사하며 대한민국 기계공업 발전 청사진을 작성했다. 이것은 곧바로 현실 정책에 반영되어, 한국중공업(중공업 공기업), 삼미특수강(특수강 기업), 포항종합제철(대형 제철소), 현대조선소 등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특히 미국 전문가들이 “국내 수요가 부족해 불가능하다”라고 결론 내렸던 포항제철소 건립 계획을 끝내 실현해 낸 것도 KIST 연구진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단기간에 중화학공업의 성장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렇듯 KIST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전략기획실이었다. 한국은 KIST를 통해 과학기술을 산업정책의 선도자로 끌어올렸고, 이러한 ‘과학기술 기반의 산업화 전략’의 실효성은 이후의 역사에서 그대로 증명되었다. KIST는 단지 기술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어떤 기술을 개발해야 할지를 먼저 정하는 곳이었다. 기업에 필요한 기술을 도입하고, 정부가 중장기적으로 육성할 산업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은 오직 KIST만이 가능했다. 그래서 연구 주제도 연구자의 흥미나 상부의 명령이 아니라, 산업계·정부·연구소의 삼자 협의 구조를 통해 결정되었다. 기술이 정책을 자극하고, 정책이 다시 기술을 이끄는 상호작용 모델의 중심에 KIST가 있었던 셈이다.


선진국으로의 도약


KIST의 실험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후 한국형 과학기술정책의 기본 형식으로 발전했다. 1970~80년대 대덕연구단지 조성, 분야별 전문 출연연구기관 설립, 산업현장 중심의 기술지도 및 기술이전 촉진 정책은 대부분 KIST의 운영 방식에서 파생했다. 즉, KIST는 단일 연구소를 넘어, 과학기술을 통해 산업을 설계하는 국가 시스템의 원형이 된 셈이다. 그 근간에는 계약연구 체제, 연구실 독립채산제, 연구 과제에 대한 기업의 요구 반영, 국가가 보장하는 자율성과 같은 파격적인 시도들이 있었다. 이는 과학기술정책이 단기적 재량사업을 넘어, 국가의 중장기 전략기획 체계로 자리 잡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KIST의 실험이 후발국가도 기술을 자체 역량으로 축적할 수 있음을 보였다는 데 있다. 과학기술이 산업화의 전략적 선행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이 모델은 여러 개발도상국에게 영감을 주었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아시아, 중동, 중남미 등지에서 과학기술을 통한 국가 주도형 개발 전략을 구상할 때, 많은 나라가 KIST를 비롯한 한국의 출연연구소 체제를 벤치마킹했다. KIST의 역사적 궤적은 후발국가도 적절한 제도 설계를 통해 기술주권을 확보할 수 있음을 입증한, 그 자체로 하나의 시사점이었다.


이러한 외부의 주목은 우리가 실험하고 제도화한 시스템의 의미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돌이켜 보면 KIST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가능케 한 제도와 정책의 산물이었다. 한국은 KIST를 통해 과학기술을 산업정책과 성공적으로 결합했고, 산업화의 기술적 설계 방법을 스스로 깨우쳤다. 기술을 개발하는 것보다, 그 기술을 어떤 제도를 통해 축적하고 사회 속에 어떻게 내재화할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한국은 KIST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이제 그로부터 60년이 지났다. 대한민국은 기술 수입국에서 기술 창출국으로 도약했고, KIST는 그 극적인 여정을 증명하는 제도적 유산이 되었다. 이 책은 이 KIST라는 유산이 어떠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태어나고 변화했는지를 되짚어 보려 한다. 어떤 기술도 사회적 진공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과학기술은 언제나 시대적 과제와 정책적 상상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명되고, 제도화된다. 이렇게 볼 때 KIST는 과학기술 그 자체보다 더 드라마틱한 서사 - 한 나라가 생존하기 위해 제도를 설계하고, 자원을 동원한 이야기 - 가 펼쳐진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