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글을 쓴다. 이 말은 이제 어떤 결심이나 의지의 표현이 아니다. 그저 하루의 루틴 그대로의 진술이다.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이를 돌보고 재운 뒤, 자연스럽게 책상 앞에 앉는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하루가 흘러간다.
이 생활은 2020년 10월, 온라인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취미였다. 그러나 시간이 쌓이면서 취미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글이 쌓였고, 그 글이 책이 되었고, 다시 또 다른 글을 불러왔다. 지금 나는 회사원이면서 몇 권의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 또한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주위 사람들은 내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대단하다”라는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그렇게 꾸준히 하느냐?”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정작 나는 대단한 의지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글쓰기는 해결해야 할 숙제나 견뎌야 할 고통이 아니라서 그렇다. 오히려 그것은 하루 중 유일하게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즐거움의 영역이다.
아마 이 말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글쓰기를 유용성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글을 잘 쓰면 직장에서 인정받고, 책을 내면 명성을 얻을 수 있으며, 지식을 정리하고 축적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식이다. 물론 모두 맞는 말이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도 그런 기능적 측면을 충분히 다루었다.
그러나 이 설명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글쓰기를 어디까지나 ‘수단’으로만 바라본다는 점이다. 인간은 수단만으로는 결코 오래 움직일 수 없다. 특히 보상이 불확실하고, 성과가 늦으며, 노력 대비 결과가 불균형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글쓰기는 그런 조건을 모두 갖춘 행위다.
실제로 글을 써서 돈을 벌거나 이름을 알리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부분은 들이는 시간과 정성에 비해 얻는 것이 많지 않다. 몇 시간을 붙들고 써도 마음에 드는 문장이 한 줄 나올까 말까 하고, 공들여 쓴 글에 독자의 반응이 거의 없는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 출판의 문턱이 높다. 많은 사람이 작가를 꿈꾸며 글을 쓰지만, 그중 책을 내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출판사에 투고된 원고의 상당수는 제대로 읽히지도 못한 채 탈락하고, 간신히 출간된 책 역시 시장에서 주목받는 경우가 드물다. 여기에 신춘문예나 공모전처럼 전통적인 등단 경로 역시 극소수만 통과할 수 있다. 요컨대 효율만 따지자면 글쓰기는 그다지 권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역설이 드러난다. 그런 비효율을 감수하고도 많은 사람이 여전히 글을 쓴다는 사실이다. 네이버 블로그에만 수천만 개의 계정이 있고, 브런치에서도 수만 명의 작가가 매일 글을 올린다. 여기에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스레드 같은 SNS까지 포함하면 우리는 하루에도 수억 개의 문장이 생산되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 형식만 다를 뿐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언어로 기록하고 공유한다. 글쓰기 강의와 수업, 에세이 출판 시장까지 고려하면, 오늘날 글쓰기는 더 이상 일부 작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매우 넓은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 행위가 되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분명해진다. 글쓰기는 가시적 보상만으로 지속되는 활동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 비효율적인 행위를 계속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쓰는 과정 자체에서 얻는 어떤 종류의 기쁨이다. 글쓰기는 참고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한 사람이 계속할 수 있는 행위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글쓰기를 사명감이나 책임감으로 버텨오지 않았다. 오히려 쓰는 일이 즐거워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물론 그 즐거움은 단순하지 않다. 편안한 휴식 같은 기쁨도 아니고, 결과에 따라 주어지는 보상도 아니다. 그것은 생각을 밀어붙이고, 문장을 다듬고,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생겨나는 종류의 즐거움이다. 이를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글쓰기는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나는 회사에서 15년 넘게 전략기획 업무를 하면서 글을 써왔다. 보고서, 기획서, 발표문, 기고문, 설명자료 같은 문서들이다. 겉으로 보면 이것도 분명 글쓰기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남을 위한 글’이었다.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쓰고, 누군가의 승인을 통과하기 위해 다듬는다. 따라서 문장은 넘쳐났지만 그 안에 내 목소리는 없었다. 글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숨이 막혔다. 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 언어는 철저히 타인의 기준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렇게 남의 문장만 써오다가, 어느 날 처음으로 내 이름을 내걸고 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도 승인하지 않아도 되는 문장, 오직 내 흥미로만 쓰인 글. 그 순간부터 글쓰기는 전혀 다른 행위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회사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서 글을 찍어냈다면, 그때부터는 독립된 사유의 주체로서 문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글쓰기의 자유란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의외로 자기 생각을 잘 모른다. 글로 쓰기 전까지는 그것이 내 생각인지, 남의 말을 빌려온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글쓰기는 이 모호한 상태를 허용하지 않는다. 내 언어로, 내 판단에 따라 하나의 문장을 완성해야 한다. 이 과정은 고되지만, 동시에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면서 해방감을 느낀다.
둘째, 문장을 만들어내는 일이 즐겁다. 나는 글을 쓸 때 문장 하나하나를 오래 만지작거린다. 개념을 바꾸고, 구성과 배치를 뒤집고, 호흡과 리듬을 조절한다. 겉보기에는 번거롭고 비효율적인 작업이다. 그러나 그 비효율 안에 글쓰기의 큰 쾌감이 있다. 바로 생각이 형태를 갖추고, 언어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순간이다. 그것은 복잡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정확히 들어맞는 것과도 비슷하다.
이 감각은 아주 구체적인 장면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주기율표에 대한 글을 쓰면서, 92번 우라늄(Uranus, 천왕성), 93번 넵투늄(Neptune, 해왕성), 94번 플루토늄(Pluto, 명왕성)으로 이어지는 행성 이름의 원소 명명 체계를 힙합의 펀치라인에 비유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비유를 문장에 쓰면서 혼자 쿡쿡 웃었다. 무미건조한 과학사가 갑자기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로 변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 재미있었다.
이런 순간도 글쓰기의 즐거움이다. 단순히 재미있는 표현을 만들었다는 만족이 아니다. 서로 무관해 보이던 생각들이 문장으로 연결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통찰이다. 흐릿했던 사유가 정확한 문장 하나로 붙잡히고, 막연했던 감정이 적절한 표현을 만나 비로소 형태를 얻는다. 그때 느껴지는 작은 전율이 있다. 그래서 나는 문장을 만드는 일 자체가 즐겁다. 글로 완성된 결과물도 좋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역시 좋아한다.
셋째, 글쓰기는 평범한 일상을 발견의 연속으로 바꿔 놓는다. 매일 쓰는 사람에게 세상은 더 이상 지루한 반복이 아니다. 무엇을 쓸까를 고민하는 순간부터 일상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출근길의 풍경, 아이의 말 한마디, 업무를 하면서 얻은 지식, 하루 중 스쳐 지나간 감정들이 모두 관찰의 대상이 된다. 관찰은 사유를 낳고, 사유는 문장이 된다.
이 변화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과학기술정책을 만드는 일을 하다 보니,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예전에는 그것들을 그저 업무의 일부로 흘려들었다. 해외 연구소들의 시스템, 연구 환경의 차이, 협업 방식의 특징 역시 참고 정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에는 그것들이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보였고, 제도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결과가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이건 하나의 이야기로 묶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런 관찰들이 쌓이면서 두 번째 책인 『연구소의 승리』의 방향이 잡혔다. 개별 과학자들의 경험이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연구소라는 시스템과 국가의 과학기술 역량을 설명하는 단서로 읽힌 것이다. 업무로 접한 이야기들이 글의 소재가 되고, 다시 하나의 구조로 정립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 셈이다.
이제 이 이야기를 하나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글쓰기를 지속하게 만드는 힘은 의지나 기술이 아니다. 물론 일정 수준의 훈련과 방법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글을 오래 지속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글쓰기를 시작하지만, 대부분은 어느 지점에서 멈춘다. 노력의 과정은 고되지만, 성과와 보상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이 조건에서는 의지만으로 버티는 데에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끝까지 쓰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서 생길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차이는 글쓰기 안에서 어떤 즐거움을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서 말하는 즐거움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다.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자유, 흐릿한 생각이 문장으로 정확히 고정되는 순간의 쾌감, 일상이 의미 있는 구조로 재편되는 인식의 변화와 같은 구체적인 경험을 가리킨다. 이 즐거움이 살아있는 동안, 글쓰기는 외부의 보상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행위가 된다.
그래서 글쓰기는 ‘잘해야 하는 일’로 접근할수록 오래 하기 어렵다. 잘 쓰려는 노력은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어느 순간부터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즐거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반복이 가능해지고, 반복이 쌓이면서 문장과 사유가 함께 깊어진다. 글쓰기가 나아지는 핵심 경로는 기술이 아니라, 즐거움이라는 감각의 축적에 있다.
따라서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더 많이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떻게 쓰느냐 못지않게, 쓰는 과정에서 어떤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문장을 다듬는 일 속에서 생각이 또렷해지는 순간을, 일상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의미가 드러나는 장면을 붙잡아야 한다. 그 순간 글쓰기는 부담이 아니라 몰입의 대상이 되고, 과제가 아니라 스스로 확장되는 영역이 된다.
결국 글쓰기는 의지로 버티는 일이 아니다. 계속 쓰게 되는 상태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상태를 만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