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이 있다.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할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보통 장르를 떠올린다. 전기, 회고록, 에세이, 칼럼, 평론, 교양서 같은 이름들이다. 어디에 속할지를 정하면 방향이 잡힐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써보면 금방 알게 된다. 장르를 정한다고 해서 글이 써지지는 않음을. 같은 에세이라도 어떤 글은 건조하고, 어떤 글은 유난히 오래 남는다. 같은 전기라도 어떤 책은 정보만 남기고, 어떤 책은 한 사람의 삶을 함께 살아낸 것처럼 읽힌다. 이 차이는 장르에서 나오지 않는다. 글을 쓰는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나온다.
그래서 더 좋은 출발점은 따로 있다. 막연하게 장르를 고르는 대신,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하나 붙드는 것이다. 그 사람을 나의 글쓰기 롤모델로 삼는 방법이다. 좋아하는 작가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어떤 방식의 글에 끌리는지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때 비로소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할까”라는 질문도 방향을 얻는다.
좋아하는 작가들을 찾아 보면 금방 눈에 들어오는 패턴이 있다. 전혀 다른 작가들인데도, 비슷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음이 보인다. 어떤 사람은 한 인물을 끝까지 따라가며 시대를 함께 보여주고, 어떤 사람은 사소한 장면 하나를 집요하게 붙든다. 또 어떤 사람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다시 보이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글쓰기는 더 이상 막막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좋아하고 있는 글들 속에 나아갈 방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 방향을 조금 더 또렷하게 보기 위해, 작가들의 글쓰기 방식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보려고 한다.
• 추적형: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며 시대까지 보여준다.
• 관찰형: 사소한 경험과 일상적 감정에서 보편적인 의미를 길어 올린다.
• 해석형: 이미 안다고 생각한 것을 다시 보이게 만든다.
• 번역형: 어려운 지식을 이해 가능한 말로 바꾼다.
물론 실제 작가는 늘 겹친다. 한 사람이 둘 이상의 유형에 해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초보 독자에게는 이런 분류가 유용하다. 복잡한 지도를 단순하게 보는 순간, “나도 어디선가 시작할 수 있겠다”는 감각이 생기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며 그가 살았던 시대까지 보여주는 글이 있다. 이러한 추적형의 대표적인 이름으로는 월터 아이작슨과 시오노 나나미를 떠올릴 수 있다. 둘은 전혀 다른 결의 작가 같지만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한 사람의 삶 × 시대의 구조”라는 틀을 아주 잘 다룬다. 그리고 단순한 정보 전달보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앞세운다. 이 작가들에게는 독자가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힘이 있다.
월터 아이작슨은 언론인 출신이다. <타임>의 기자와 편집장, CNN의 최고경영자를 지낸 이력이 말해 주듯,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선명하다. 장면 전환이 빠르고, 매 장의 초입부터 갈등의 쟁점을 끌어올려 독자의 호기심을 단숨에 붙잡는다. 그런데 그의 진짜 강점은 문장력보다 취재력에 있다. 그는 인터뷰이의 마음을 열어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 능하다. 듣고, 또 듣고, 서로 모순되는 증언을 맞대고, 그 안에서 사건의 타임라인을 세운다. 그래서 그의 책은 정보가 많아서가 아니라, 인물이 입체적으로 살아나서 잘 읽힌다.
흔히 아이작슨을 두고 ‘천재 전문 작가’라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벤저민 프랭클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처럼 거물들의 전기를 써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진짜 주제가 천재성보다는 혁신에 있음을 알게 된다. 아이작슨은 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에 집중한다. 혁신은 서로 다른 분야가 연결되거나, 당대의 상식과는 정반대 선택을 감행하는 모험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서는 회화와 해부학을 넘나들었고, 『스티브 잡스』에서는 기술과 인문학을 결합했다. 『아인슈타인: 삶과 우주』에서는 과학과 전쟁, 망명과 윤리를 한 사람의 삶 안에 몰아넣었다. 『코드 브레이커』에서는 유전자 편집 기술만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협업과 윤리 논쟁까지 함께 읽게 만든다.
결국 아이작슨의 키워드는 ‘교차’다. 개인과 시대의 교차. 과학과 인문학의 교차. 그 교차점을 따라가다 보면 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시대를 밀어 움직였는지가 드러난다.
물론 영웅을 너무 매력적으로 그려서 위인 서사로 흐른다는 비판도 받는다. 실제로 그런 위험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이 계속 읽히는 이유는 분명하다. 뻔한 설교보다 살아움직이는 스토리텔링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들기보다, 먼저 독자가 인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든다. 추적형이 배워야 할 덕목은 바로 여기 있다. 자료를 쌓고 서사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사람의 얼굴과 선택의 순간으로 바꾸어야 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추적형을 역사 쪽으로 크게 확장한 작가다. 그녀는 10대 시절 『일리아스』를 읽고 서양 문명에 매혹되었고, 이후 혼자 이탈리아로 건너가 역사를 독학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그녀만큼 잘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다. 『르네상스의 여인들』, 『체사레 보르자, 또는 우아한 냉혹』,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거쳐 『로마인 이야기』에 이르는 흐름은 한 사람의 취향이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의 장점은 분명하다. 역사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쓴다는 것. 딱딱한 연표와 무미건조한 사건을 살아 있는 인간 군상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두 가지에서 나온다. 하나는 방대한 사료를 흡수하고 현장을 답사하는 집요함이다. 다른 하나는 사료의 공백을 서사적 상상력으로 메우는 대담함이다. 덕분에 로마라는 거대 제국의 정치와 전쟁, 권력과 배신이 대하소설처럼 읽힌다. 이 점에서 시오노의 글쓰기는 정통 역사학자와 구별된다.
물론 이런 방식은 역사학의 엄밀성과는 거리가 있다. 역사 연구의 치밀함보다는 이야기의 추진력을 앞세운다. 그래서 읽을 때 어느 정도는 비판적 관점이 필요하다. 시오노의 서술은 최종적 해석이 아닌 역사 읽기의 입구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배워야 할 점도 분명하다. 시오노는 애초에 ‘학자’가 아닌 ‘이야기꾼’으로서 역사에 접근했다. 이 점에서 로마사라는 방대한 주제를 수백만 독자가 자발적으로 읽게 만든 공로는 작지 않다. 추적형의 두 번째 교훈도 여기에 있다. 당신이 학자가 아니어도, 좋아하는 대상을 끝까지 따라가면 하나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
당신이 추적형에 끌린다면, 시작은 의외로 검소해야 한다. 거대한 인물을 고를 필요가 없다. 가족 중 한 사람도 좋고, 동네에서 오래 버틴 가게 주인도 좋다. 먼저 연표를 짠다. 그다음 목소리를 모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론을 쓰기보다, 그 사람을 설명해 주는 장면을 고른다. 추적형은 결국 '많이 아는 사람'의 글이 아니라 '쉽게 놓지 않는 사람'의 글이다.
추적형이 ‘사람’을 따라간다면, 관찰형은 ‘순간’을 붙든다. 추적형을 대표하는 전기가 큰 이야기라면, 관찰형에 속하는 에세이는 작은 이야기다. 하지만 작다고 힘이 약한 건 아니다. 오히려 사소해 보이는 경험이 어떤 언어를 만나느냐에 따라 오래 남는 울림이 된다. 미셸 드 몽테뉴가 『수상록』에서 자기 자신을 탐색하며 이 전통을 열어젖힌 뒤, 이런 글쓰기는 오래 살아남았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이상하게 남의 마음도 건드리는 글. 관찰형은 바로 그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조앤 디디온은 이 부류가 어디까지 정교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가다. 그녀는 잡지 <보그>에서 글을 쓰며 문장을 다듬었고, 1960~70년대 미국 사회의 균열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기록했다. 히피 문화, 정치적 혼란, 개인의 불안이 뒤엉키던 시대를 통과하며, 그녀는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포착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완성해 갔다.
그 정점이 드러나는 책이 『상실』과 『푸른 밤』이다. 『상실』에서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의 시간을, 『푸른 밤』에서는 딸을 잃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이런 주제라면 흔히 감정이 넘쳐흐르기 쉽다. 그러나 디디온은 감정을 쓰지 않는다. 감정이 생겨나는 순간을 쓴다. 사건의 순서와 그때의 생각,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문장들을 차분하게 쌓아 올린다. 그래서 독자는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슬픔이 설명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들어와 있었음을.
이렇듯 디디온의 힘은 과장하지 않는 데 있다. 감정에 곧바로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먼저 장면을 세우고, 분위기를 만들고, 그 속에서 불안과 상실이 어떻게 스며 나오는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글은 솔직해서가 아니라 정확해서 오래 남는다. 그 정확성은 타고난 감수성의 결과라기보다, 언론인으로서 세계를 관찰하고 기록해 온 시간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관찰형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는 원래 재즈 바를 운영하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러다 1978년 프로야구 경기를 보다가 문득 “나도 쓸 수 있겠다”라는 감각을 얻었다. 이 일화가 오래 남는 이유는 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이 얼마나 일상적인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소설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에세이에서도 독보적이다. 그는 소설에 비해 에세이는 소품처럼 쓴다. 어쩌다 작가가 된 사람다운 담백함으로, 자기가 본 것과 느낀 것을 가볍고 정확하게 풀어낸다. 그래서 그의 글은 잘 조율된 재즈 연주처럼 흐른다. 과장된 감정도 없고, 억지 교훈도 없다. 대신 오래 관찰한 사람만이 잡아낼 수 있는 미세한 리듬이 있다.
하루키의 강점은 소재의 폭에도 있다. 여행기인 『먼 북소리』에서는 유럽의 일상 풍경과 창작의 고민이 한 데 섞여 나온다. 『언더그라운드』와 『약속된 장소에서』에서는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인터뷰와 기록으로 붙들면서, 개인적 고독을 쓰던 작가가 사회적 참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보여준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에서는 미국과 일본의 문화 차이가 특유의 건조한 유머와 함께 드러난다.
그러니까 하루키는 이런 걸 보여준다. 잘 쓰는 사람은 하나의 주제만 잘 쓰지 않는다. 자기가 진짜 관심을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기 언어로 바꿀 수 있다.
관찰형의 계보가 꼭 해외 작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의 경험을 삶의 통찰로 바꾸고, 유시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자기 삶의 궤적과 철학적 질문을 연결해 독자에게 성찰의 거울을 건넨다. 둘 다 자기 이야기를 하되, 그걸 자기 자랑이나 독백으로 두지 않는다. 더 넓은 질문으로 밀고 나간다. 관찰형의 좋은 글은 바로 거기서 탄생한다. “이게 내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당신 이야기이기도 하다”라는 감각이다.
당신이 관찰형을 좋아한다면, 재능보다 먼저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하루 한 장면이면 충분하다. 오래 남는 표정 하나, 유난히 신경 쓰인 말투 하나,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 하나를 적어두라. 중요한 건 그 감정에 너무 빨리 이름 붙이지 않는 것이다. 장면을 먼저 쓰고, 공기를 묘사하고, 왜 그것이 당신 안에 남았는지 천천히 따라가 보면 된다. 관찰형은 화려한 소재보다 정확한 시선에서 나온다. 에세이가 특히 그렇다. 그것은 대체로 이런 작은 메모가 쌓여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누구나 시작할 수 있으면서도 아무나 끝까지 쓰지는 못하는 장르가 된다.
해석형은 이미 본 것을 다시 보이게 만드는 글쓰기다. 이 부류의 작가는 판단을 서둘러 내리지 않는다. 먼저 장면을 살피고, 구조를 짚고, 그 작품이나 사건이 왜 그런 모양을 띠는지 차근차근 보여준다. 그래서 좋은 해석은 잘난 척이 아니라 안내에 가깝다. “내가 본 걸 당신도 볼 수 있게 다시 말해 줄게.” 바로 그 태도다. 좋아하는 평론가를 따라가다 보면, 이 방식이 얼마나 강력한지 금방 알게 된다.
로저 이버트는 해석형 글쓰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가장 대중적으로 증명한 평론가다. 그는 <시카고 선 타임스>에서 활동하며 수천 편의 영화를 리뷰했고, TV 프로그램을 통해 평론을 대중의 영역으로 끌어왔다. 그는 “이 영화가 좋다, 나쁘다”만 말하는 평론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특정 장면과 구도의 의미를 세심히 짚어 주면서, 독자에게 영화를 보는 방법 자체를 가르쳐 주었다.
실제로 그의 글을 읽고 나면 영화 한 편을 다시 보게 된다. 카메라가 어디에 놓였는지, 편집이 어떤 감정선을 밀어 올리는지, 왜 어떤 장면은 끝나고도 마음에 오래 남는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좋은 평론이란 이렇게 독자의 눈을 바꿔놓는 것이다.
수전 손택은 해석형을 한 단계 더 밀어붙였다. 그녀는 철학, 문학, 예술 비평을 넘나들며 20세기 지성사의 한 축을 이룬 사상가이기도 하다. 대표작인 『해석에 반하여』에서는 예술을 억지로 메시지로 환원하려는 습관 자체를 경계한다. 작품은 먼저 감각과 형식으로 다가오는데, 우리는 너무 빨리 “무슨 뜻이야?”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비평의 역할을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해석이 작품을 납작하게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말이다. 이 태도는 해석형 작가에게 아주 중요하다. 설명은 필요하지만, 설명이 대상의 생생함을 죽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동진은 이런 해석형을 한국 독자에게 가장 친숙한 방식으로 펼쳐 보였다. 그는 오랫동안 기자로 일한 뒤 평론에 집중해 왔다. 그의 강점은 대중성과 인문학적 깊이의 균형이다. 글의 구조는 명료하다. 핵심 명제를 먼저 세우고, 영화 속 장면을 근거로 붙이고, 마지막에 감상의 의미를 정리한다. 미장센이나 몽타주 같은 전문용어를 무턱대고 앞세우지 않고, 일상적 비유와 짧은 단락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그렇다고 해서 얕은 건 아니다. 그는 종종 장 보드리야르, 밀란 쿤데라,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이름을 끌어온다. 인문학을 전공한 그의 역량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으면 “어렵지 않은데, 생각보다 깊다”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해석형의 최고 덕목은 친절이다. 하지만 그 친절이 단순한 쉬운 말은 아니다. 독자가 어디에서 막히는지 알고, 그 막힘을 풀어 줄 구조를 짜는 능력이다. 당신이 해석형에 끌린다면, 당장 별점부터 매기지 말고 질문부터 붙들어 보라. 왜 이 장면이 좋았을까. 왜 이 글은 설득력이 있을까. 왜 이 작품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까. 해석형은 생각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오래 버티는 사람에게 열린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려운 개념 때문에 공부를 포기한다. 번역형은 바로 그 지점에서 독자를 붙잡는다. 한 마디로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글쓰기’다. 채사장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은 복잡한 인문학 개념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내며 엄청난 독자를 모았다. 이유는 분명하다. 어려운 개념을 그대로 전달하는 대신, 곧바로 그려지는 언어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번역 방식은 대담하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게임의 규칙에 비유하고, 철학을 삶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안경처럼 설명한다. 종교는 세계관의 큰 틀로, 과학혁명은 규칙이 바뀌는 순간으로 번역한다. 학문적 디테일은 과감히 덜어내고, 대신 독자가 전체 숲을 먼저 보게 만든다.
이런 방식은 채사장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대학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지만, 학문 경력으로 이어 나가진 않았다. 대신 여러 일을 거치며 지식을 ‘전문가의 언어’가 아니라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는 감각을 익혔다. 2011년 큰 교통사고를 겪은 이후에는 삶의 방향을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글쓰기 방식이 더욱 분명해졌다.
채사장의 서술에는 비판도 따른다. 설명이 쉬워지는 만큼 복잡한 맥락이 잘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형의 위험은 단순함보다는 단순화에 있다. 하지만 입문서의 역할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읽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든 처음부터 임마누엘 칸트나 카를 마르크스를 읽기는 어렵다. 이때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같은 입문서가 깊은 탐구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책을 계기로 철학의 원전에 도전했다는 독자들도 많다. 채사장의 강점은 바로 그 도전으로 향하는 입구를 넓게 열어 놓았다는 데 있다.
번역형이 당신에게 주는 교훈도 분명하다. 당신이 꼭 전문가가 아니어도, 어떤 주제를 남보다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꿔 줄 수 있다. 이것은 축소가 아니라 설계다. 어렵고 낯선 개념을 일단 손에 잡히는 형태로 만드는 일. 물론 여기에는 늘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너무 쉽게 쓰다 보면 깊이를 잃고, 너무 정확하게만 쓰다 보면 독자를 잃는다. 번역형의 과제는 그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 것이다.
당신이 번역형에 끌린다면, 복잡한 주제 하나를 고른 뒤 이렇게 물어보면 된다. “이걸 중학생에게 설명한다면 어떻게 말할까.” 혹은 “친구에게 3분 안에 설명해야 한다면 어떤 비유를 쓸까.” 바로 거기서 첫 문장이 나온다. 번역형은 지식을 과시하는 글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게 건네는 글이다.
여기 나온 작가들의 출발선은 전부 다르다. 기자도 있고, 재즈 바 사장도 있고, 조기 유학을 떠난 역사 덕후도 있고, 독학으로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들을 한자리에 놓으면 공통점 하나가 드러난다. 다들 자기가 오래 좋아한 것을 끝까지 따라갔다는 것. 취향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관심을 문장으로 바꾸는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작가는 처음부터 특별한 인간이라서 되는 게 아니다. 오래 궁금해한 것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작가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니 “나는 아직 멀었다”라는 말부터 꺼낼 필요는 없다. 당신이 좋아하는 작가는 이미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나는 인물을 따라가는 글에 끌리는가. 아니면 장면과 감정을 붙드는 글에 더 마음이 가는가. 혹은 작품과 지식을 다시 풀어내는 글을 좋아하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출발선은 이미 지난 셈이다.
답이 정해지면 첫 연습도 확실해진다. 추적형이라면 인물 한 명의 연표를 짜 본다. 관찰형이라면 하루 한 장면을 적어본다. 해석형이라면 영화 한 장면을 600자로 설명해 본다. 번역형이라면 어려운 개념 하나를 비유로 풀어본다. 작가를 흉내 내라는 뜻이 아니다. 작가의 작업 방식을 빌려오면 된다.
결국 필요한 건 거창한 결심이 아니다. 오래 붙들 질문 하나, 매일 조금씩 쓸 자리 하나, 그리고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작가들도 대부분 거기서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 남은 일은 어렵지 않다. 읽던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아주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된다. 작가가 되는 길은 자격증이나 스펙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좋아하는 무언가에 얼마나 오래 파고드는가에 달려 있다. 내 글을 쓰는 일은 그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이다.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 누군가는 당신의 글을 읽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나도 한번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