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이 사회학이라 그런지 주위에서 인문·사회과학 도서를 추천해달라고 할 때가 가끔 있다. 사실 나도 공부를 열심히 한 편은 아니라, 추천의 폭이 넓지는 않다. 주로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책들을 많이 추천한다. 그러니까 전공 진입 전에 기초 개념 정립을 도와줬던 책들이다. 이 책들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인문·사회과학에 관심 있는 직장인들도 교양 차원에서 읽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요즘 유행하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얇은...」 류의 썰 풀기용 책은 아니다. 그런 책들이 왜 인기 있는지는 충분히 안다. 하지만 인문·사회과학 지식은 개념적 기초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사유의 축적을 더하고 학설들의 폭을 확장해야 자기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얇은...」 류의 책들은 이 지난한 과정을 생략한다.지식을 당장 먹기에는 좋지만 영양분은 없는, 인스턴트식품처럼 만들어 내놓는다. 이보다는 뚜렷한 학문적 쟁점과 문제의식을 다루는 책 한 권을 읽는 것이 더 낫다. 나아가 관련 학설들까지 두루 살피면서 쟁점에 접근하는 책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1. 사회학적 상상력(찰스 라이트 밀스 저, 강희경·이해찬 역, 돌베개)
사회학개론 수업에 처음 들어가면 높은 확률로 강의계획서에 올라 있을 책이다. 또한 청년 사회학도의 피를 끓게 하는 로망과도 같은 책이기도 하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학부제로 운영됐던 학교에서는 이 책을 읽고 사회학 전공을 택한 학생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 찰스 라이트 밀스는 미국에서 보기 드문 급진적 사회학자이다. 1950년대 출판된 그의 저작들은 68혁명과 신좌파로 상징되는 1960년대의 진보적 흐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 「파워엘리트」가 특히 그렇다. 파워엘리트는 1940년대 이후 부상한 미국 군부·군수산업·관료들의 권력 카르텔을 지칭하는 개념이다(그런데 이제는 권력집단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일반화되었다). 1960년대 미국 진보세력은 밀스의 이론을 받아들여 국방·외교정책을 주도하는 군산복합체와 정보부 등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렇듯 밀스는 민주주의로 치장된 현대 권력구조의 폐쇄성과 보수성을 밝히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의 또 다른 저작 「사회학적 상상력」은 사회학 자체보다는 사회학 연구의 대상과 방법에 대한 책이다. 더불어 연구자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태도에 대해서도 논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개념이 책 제목인 ‘사회학적 상상력’이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개인-사회-역사의 밀접한 관련성을 이해하려는 접근법이다. 개인의 모습에서 사회구조의 작동을 유추해내고, 나아가 역사적 필연성과의 연계성을 상상력을 발휘해 포착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일상의 개별성과 구조-역사의 보편성을 결부시키는 총체적 시각 전환 역량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학자가 갖춰야 할 핵심 덕목이자 늘 되뇌어야 할 주문과도 같다. 주류 경제학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비판적 사회학자들에게는 ‘사회학적 상상력’이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밀스는 사회학자는 명백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이 입장은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편견의 비판자들도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논쟁으로 확장하면, 사회의 공적 문제가 더 분명해진다. 연구자가 할 일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순을 구체화하고, 사회적 논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연구에 주관을 개입시키면 안 된다는 주류 사회과학과는 충돌한다. 이 책 곳곳에서 충돌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갈등론적-비판사회학과 기능론적-주류사회학(구조기능주의, 논리실증주의, 도구적 합리주의 등) 사이에 형성되는 이론적 쟁점들을 일람할 수 있다.
2. 레즈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황광우·장석준 저, 실천문학사)
고전사회학 삼대장 중 하나인 칼 마르크스의 사상적 기초와 원리를 쉽게 설명한 책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족부터 달자면, 제목의 ‘레즈’는 레즈비언이 아니라 REDS 즉 사회주의자를 뜻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마르크스의 사상은 징글맞게 방대하고 난해하다. 철학, 역사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을 넘나드는 그의 이론은 어디를 진입로로 삼아야 할지 독자를 난감하게 만든다. 특히 초심자들은 뚜렷한 접근 전략 없이 무작정 파고들어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마르크스 특유의 추상적이고 복잡한 논리체계에 파묻혀 금방 질려버릴 수도 있다.
나는 마르크스는 한 발 떨어져서 천천히 관찰하며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즉 마르크스의 사상사적 맥락과 총체적 얼개를 우선 인식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기존 사상흐름을 전복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전 학문들과 연계성과 단절성을 동시에 가지기도 한다. 예컨대 독일 관념론 철학, 프랑스 사회주의 이론, 영국 고전파 정치경제학과의 관계가 그렇다. 마르크스는 이 사상들을 해체하고 계승하면서 독특한 학문세계를 구축해나갔다. 이를 고려할 때, 마르크스 전후 사상사의 조망에서 출발해 내부의 구체적 논리로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 목적에 가장 잘 맞는 저작이 「공산당 선언」이다. 이 책은 현실정치 개입을 위한 팸플릿이라서 핵심 메시지와 배경에 흐르는 논리가 매우 명료하다. 특히 마르크스 철학의 정수인 변증법과 사적 유물론에 따라, 피억압 계급이 역사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음을 희망찬 문장들로 그려낸다. 워낙 유명해서 국내에도 이 책의 번역본은 이미 많이 있다. 그중 어떤 것을 읽어도 상관은 없다.
그럼에도 굳이 이 책을 골라 소개하는 이유는 「공산당 선언」을 우리 현실에서 해석한 시도가 독특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1980~90년대 민주화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다. 그 역사적 행로를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던 「공산당 선언」에 기대어 뒤돌아본다. 에세이 형식으로 썼기 때문에 읽기도 편하다.
공저자 황광우는 「철학 콘서트」를 비롯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이미 1980년대부터 지하의 좌파 문필가로서 필명을 날렸었다. 특히 고 노회찬과 함께 활동하며, 좌파의 불모지 한국에서 진보정당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저자가 어떤 생각에서 이런 노력을 했는지를 이 책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공산당 선언」 번역서인 동시에 생생한 역사적 기록이도 하다.
책은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공산당 선언」의 의미를 저자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한 에세이, 2부는 「공산당 선언」 전문 번역, 3부는 「공산당 선언」 관련 이론 논쟁이다. 3부를 쓴 공저자 장석준은 세계 진보정당 운동 흐름에 정통한 이론가이며, 3부에서 그의 해박한 지식을 만날 수 있다. 물론 2부만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공산당 선언」의 이상을 구현하려 노력한 1, 3부도 현대사의 중요한 기록으로 읽어볼 가치가 있다.
3. 철학과 굴뚝청소부 : 데카르트에서 들뢰즈까지/근대철학의 경계들(이진경 저, 그린비)
사회과학도 근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기본 개념과 원리 등은 근대철학과 밀접히 연관될 수밖에 없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면 반드시 만나는 이름들인 막스 베버, 칼 마르크스, 미셸 푸코, 위르겐 하버마스 등은 사회이론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일명 ‘철굴’)」는 1990년대 대학가의 철학 세미나 교재로 유명했던 책이다. 사실 그때만 해도 ‘철학사’라는 만만찮은 주제에 대해 교양 수준에서 접근할 수 있는 안내서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대학생들의 철학 스테디셀러로서 10년 넘게 부동의 탑을 지켜온 것이다. 나도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이만큼 근대철학사의 핵심 논점들을 짚어가며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책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저자 이진경(본명 박태호)은 1980년대 운동권에서 논리정연한 글빨로 유명했다. 그래서 제 잘난 맛에 사는 PD라는 정파 안에서도 브레인으로서 여러 문건과 이론서들을 대표 집필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로는 철학 연구자이자 교양서 작가로 변신했다. 폼은 일시적이나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세월이 흘러도 그 시절 글빨은 어디 안 갔음을 이 책을 통해 새삼 느끼게 된다.
물론 주제가 주제인지라 내용이 가볍지는 않다. 책을 완전히 소화하려면 근대철학 성립의 기본 요소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실 제목보다는 ‘근대철학의 경계들’이라는 부제가 이 책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낸다. 토머스 쿤 식으로 말한다면, 패러다임으로서 근대철학의 정립·해체 과정을 이전(중세철학) 및 이후(탈근대철학) 패러다임과의 경계들을 통해 보여준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성 중심·인식론 기반의 근대철학이 신학적 세계관과 어떻게 경계를 지으며 등장했고, 이후 이성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내세운 탈근대철학 앞에서 어떻게 모순을 드러내는가를 파악할 수있다. 이는 인류 지성사의 변곡점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묘사로 다가온다.
다양한 현실 사례들과 함께 강연식으로 풀어냈다는 점도 이 책의 미덕이다. 따라서 전공자가 아니어도 큰 흐름의 논지를 따라가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요즘 인문학에 대한 대중의 욕구를 겨냥한 개념 다이제스트 수준 책들이 쏟아지는데, 물들어올 때 노 젓자는 상업적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비록 20여 년 전에 나왔지만 내용만큼은 충실한 이 책 한 권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4.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막스 베버 저, 김덕영 역, 길)
정치학에 「군주론」, 경제학에 「국부론」이 있다면 사회학에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있다. 저자 막스 베버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철학, 정치학, 경제학, 법학을 망라하는 베버의 통합과학적 사유로부터 사회학이 분리·정립된다고 할 수 있다.
고전사회학의 또 다른 수장인 마르크스와는 사회연구에 대한 관점과 방법에 있어 반대 포지션에 있기도 하다. 갈등과 당파성을 전제해야만 과학적 연구가 가능하다고 본 마르크스에 비해, 베버는 가치판단의 배제와 객관성을 중시한다. 그래서 베버는 사회적 행위를 이해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행위를 해석해 인과적 법칙으로 정립하는 것이 사회연구의 임무라고 보았다. 다만 인간의 행위는 천차만별이라 그대로 소재로 사용할 수 없으므로, ‘이념형’이라는 가상의 모델을 분석의 도구로 삼았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회‘과학’의 기본 틀을 만든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이러한 방법론적 기초에 따라 저술되었다. 이 책이 해명하려는 것은 ‘근대 자본주의 경제는 어떤 요인에 의해, 어떻게 탄생했는가?’이다. 그야말로 역사와 시대를 관통하는 근본적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베버가 주목한 것은 프로테스탄트(시민계급)들의 소명의식 및 금욕주의와 자본주의적 합리성 사이의 선택적 친화력이었다. 이는 과학혁명과 계몽주의에서 근대적 이성의 출발점을 찾는 여타의 연구와 다른 부분이기도 하다. 즉 서로 무관해 보이는 종교와 경제의 상관성에 주목해 근대라는 거시적 시간대의 본질을 설명해내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몇 백 년을 관통하는 유럽의 종교와 생활사적 흔적들을 쌓아 올리고 조합해 일관된 결론으로 나아간다. 베버 이론에 대한 찬반을 떠나, 시대에 대해 이렇게 총체적인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제시했다는 것에서 이 사상가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요즘 하는 말로 빅 퀘스천을 던지고 후대에 표준적 근거가 될 수 있는 답을 남긴 것이다.
이 책은 고전 중의 고전인 만큼 번역본 종류도 많다. 그중 2010년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김덕영 교수의 번역이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역자 김덕영은 사회학계에서 보기 드문 독일 유학파 출신의 베버 전공자다. 단순히 박사학위만 받은 것이 아니라, 어렵기로 악명 높은 하빌리타치온(교수자격시험)까지 통과했다. 누가 봐도 이 책의 번역에 적합한데, 오래전부터 번역 제안이 있었음에도 고사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 가장 큰 범주를 차지하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에야 번역에 착수했다고 한다.(...)
특히 말미에 실린 170 페이지 분량의 역자 해제가 이 번역본으로 읽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이 책이 사회학의 대표 입문서라고 하지만(그런데 이 책 하나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사람도 많다), 종교·역사·경제를 망라하는 범위가 워낙 방대하고 저자 베버의 문장도 (독일인답게) 이해가 쉽지 않아 완독이 어렵다. 역자 해제는 그래서 도움이 많이 된다. 본문보다 해제부터 읽고, 이를 길잡이 삼아 베버의 방대하고 까다로운 논의를 헤쳐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5.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구해근 저, 신광영 역, 창비)
사회과학은 현대자본주의의 과학적 분석을 위해 태동했다. 그래서 계급론은 사회과학의 영원한 클래식이 된다. 계급문제를 다루는 학파와 관점들은 굉장히 다양하다. 그중 196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한국노동계급의 기원을 추적하는 이 책은 우리나라 계급론 연구의 대표작이다. 계급 연구서라면 건조한 분석틀과 어지러운 숫자·도표들로 가득 찼을 것 같지만,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서평에 썼듯 이 책은 잘 구성된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다. 열악한 환경을 딛고 계급으로서 일어서는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실감나게 펼쳐진다.
이런 특징은 저자의 독특한 방법론과 연관된다. 많은 사회이론들이 계급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 파생되는 구조로 해석한다. 이와 달리 이 책은 노동자들이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경험을 거치며 스스로를 계급으로서 조직한다고 본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못지않게, 노동자들이 계급으로 각성하게 되는 생활경험·전통·언어·종교·가치관 등이 중요한 탐구 대상이 된다.
이 관점에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물이 아닌, 능동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P. 톰슨의 대작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 이러한 역사주의적·구성주의적 계급연구의 효시이다. 이 책도 (제목에서 알 수 있듯) E. P. 톰슨을 오마주하여 그 방법론을 한국에 적용했다. 저자가 10년여에 걸쳐 모은 방대한 통계, 수기, 인터뷰 등이 논지를 탄탄하게 떠받친다. 이를 기초로 저자는 최초의 도시 임금노동자가 등장해서 현실에 순응하고, 불의를 인식하고, 막연한 저항에서 출발해 정치적으로 각성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특히 기존 노동운동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1970년대 경공업 여성노동자의 재평가, 노동자를 지원한 교회와 대학생들의 재조명 등이 눈에 띈다. 연구서답게 촘촘한 자료망에 근거하면서도, 노동자들의 연대를 통한 성장을 드라마틱하게 그린 역작이다.
6. 자유주의 사회경제사상(이근식 저, 한길사)
현대사회과학은 자유주의를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는 수백 년 간 축적된 다양한 사상의 기초 위에 서 있다. 멀리 잡으면 산업혁명과 시민혁명부터 이어져 온 사상의 경쟁과 재조합이 오늘의 자본주의-근대국민국가 체제를 만들었다. 그중 끝판왕이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는 수많은 사상이 명멸했던 세계 근현대사의 최후 승자이다. 세기의 라이벌이었던 전체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몰락한 오늘날 자유주의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사회과학에 있어서도 자유주의의 기초와 원리에 대한 이해는 중요한 선행학습 요건이 된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생각보다 유연하고 스펙트럼도 넓다. 바로 이 점이 자유주의를 근현대 사상경쟁의 최후 승자로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보통 자유주의라고 하면 경제적 관점에서 사유재산, 자유방임, 시장경쟁 등을 떠올린다. 이런 요소들이 중요하긴 하나, 그것 자체를 자유주의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자유주의의 시원은 중세의 종교적 질곡과 절대주의 독재로부터 사회의 기초인 ‘개인’을 해방시키려 했다는 데 있다. 즉 경제운용원리 이전에 새로운 사회체계(근대시민사회) 설계를 위한 철학적 기획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흐름이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애덤 스미스 등이 정초한 고전적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는 이후 다양한 역사적 국면을 거치며 갱신을 거듭한다. 이 갱신의 폭은 굉장히 넓어서, 20세기쯤 오면 경쟁자였던 사회주의와 공동체주의 등의 요소들도 꽤나 많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 결과 자유주의 범주 안에서도 진보적 입장과 보수적 입장이 공존하게 되었다. 예컨대 존 스튜어트 밀(그는 사회주의자라는 의혹도 꽤 받았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등은 전자에 해당한다. 반면 허버트 스펜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은 후자에 포함된다. 별로 사상적 접점이 없어 보이는 이들 모두가 자유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이다. 국내 버전으로 보면 최장집과 공병호가 똑같이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복잡한 계보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에 대한 체계적 이해가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책은 그런 길고 복잡한 자유주의 역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제공한다. 이 책의 장점은 자유주의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균형 잡힌 시각에서 시도한다는 것이다. 최근 좌파 사회과학의 자유주의 담론은 주로 신자유주의 비판에 집중돼 있고, 반대로 우파는 무조건적인 자유주의 찬양에 몰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이 두 가지 입장을 수용하면서, 세계 자본주의 변동에 자유주의가 어떻게 대응해왔는가를 보여준다. 애덤 스미스(고전적 자유주의)부터, 존 스튜어트 밀(진보적 자유주의), 발터 오이켄·빌헬름 뢰프케(질서자유주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밀턴 프리드먼·제임스 뷰캐넌(신자유주의) 등의 사상 역정을 풍부한 레퍼런스와 함께 서술한다. 특히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 이론을 상세히 소개한 것이 백미이다.
저자 이근식은 소싯적 서울대 학생운동의 지도부였으나, 미국 유학을 계기로 개혁적 자유주의자로 변신했다. 이후 경실련을 중심으로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했으며 최근까지도 ‘상생적 자유주의’를 주창해왔다. 이른바 개혁 성향 학자 중에 이런 테크(마르크스주의 -> 시민사회론)를 탄 사람이 적지 않다. 이런 배경이 있어서 자유주의에 대한 균형 잡힌 소개를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책에는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바로 절판이 되었다는 점이다.(...) 추측컨대 후속판인 자유주의 총서(이 책의 사상가들을 좀 더 세분화해서 다른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재발간) 때문에 절판시킨 것 같다. 하지만 중고책 사이트를 뒤져야 한다는 수고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읽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