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국문판과 영문판. 이 책은 경향신문이 선정한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국내 저술' 4위에 올랐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렇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이익을 정치적으로 표출하고 대표해 대안을 조직함으로써, 한편으로 대중 참여의 기반을 넓히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체제의 안정에 기여하는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기존의 냉전 반공주의의 헤게모니와 보수 편향의 정치 구조에 그저 얹혀 있는 외피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특권적 기득 구조와 계급 구조는 심화되었고 사회의 공동체적 기반은 더욱 약화되었으며 개인의 삶도 황폐화되었다. ...(중략)...
나는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매우 협애한 이념적 대표 체제, 사실상 보수만을 대표하는 정치적 대표 체제에 있다고 본다. 내용적으로 보수 편향의 정치 구조는 민주화 이후에 변화되기보다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한 사회가 이념적으로 자유롭지 못할 때, 냉전 반공주의가 여전히 지배적인 정치 언어로 기능하고 있을 때, 민주주의는 그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합의 형성의 기제가 되기는커녕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 사회의 기득 구조와 특권 체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기제에 머무르게 된다.“
- 책 본문 중에서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2005년이다. 그때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생을 통틀어 가장 영향받은 책 1권을 말해보라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꼽는다. 내게 이 책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일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2005년 초 나는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있었다. 즉 인생이라는 롤플레잉 게임에서 대학입시 다음으로 어려운 취업 퀘스트와 마주한 셈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동년배들은 잘 모르지만 뭔가 바빠 보였다. 수업도 잘 안 들어왔고, 끝나기 무섭게 삼삼오오 무리 지어 어디론가 사라지기도 했다(그게 취업 스터디 모임이었다는 건 한참 나중에 알았다). 나도 덩달아 조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뭘 준비하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영어실력은 수능 때보다도 퇴보했고, 자격증은 운전면허조차 없었으며, 인턴이나 연수 경험은 어디서 쌓는지도 몰랐다. 오죽하면 ‘스펙’의 뜻도 몰라서, 나보다 두 살 어렸던 여자친구가 알려줄 정도였다.
취업보다는 ‘공부를 더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커졌다. 그런 생각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도무지 사회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을 전공(수능 점수에 맞춰서 택했지만 뭐 어쨌든)했고, 학점도 나쁘지 않았으며, 사회 진보에 기여하고 싶다고 학생운동도 몇 년 열심히 했다. 그런데도 정작 인간과 세상의 이치를 잘 모른다는 게 당시 나의 자각이었다. 그래서 취업은 미루고 대학원에 가기로 했다. 행정학(학부 전공)은 사회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결여한 응용학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공을 바꾸기로 했다. 사회과학의 기초학문인 사회학이 나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들었다. 결국 사회학과 대학원에 가기로 했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러면 어떤 주제를 잡고 공부할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원은 학부와 달라서 본인이 연구주제를 정하고 세부계획을 세워야 했다. 당연히 교수나 선배가 가르쳐주지 않고, 사교육을 받을 학원도 없다. 온전히 혼자 힘으로 깨우쳐야 했다. 나는 무작정 중요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책들을 찾아서 읽었다. 그저 많이 읽다 보면 뭔가 맥락이 잡히겠지 싶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평소 이름을 많이 들어본 사회과학 대가들의 저작을 추렸다. 사회학뿐만 아니라, 철학, 역사, 정치, 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서 골랐다.
그중에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이것이야말로 나의 연구주제라는 확신이 들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문제점을 핵심에서부터 정확히 짚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민주화 운동의 성과로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는데도, 왜 많은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가?’로 요약된다.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한 다양한 이론적 검토와 정책적 논의들이 전개된다. 결론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렇다 :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인 정당정치가 보수독점구도로 형성되고, 그래서 시민사회의 이익 갈등이 정치의 장으로 제대로 표출되지 않아, 시민 삶과는 동떨어진 의사결정이 확대된다.’ 지금 봐도 우리 시대의 모순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책의 문제의식을 총론적 기조로 삼고, 총론의 구체성을 기할 한 꼭지의 각론을 만드는 것을 대학원의 공부 목표로 삼았다. 석사학위논문도 이 책의 문제 설정과 관련한 정책적 예시를 찾아 사례연구를 해서 완성했다. 물론 이후 박사과정은 엄두도 못 냈으니, 최초의 원대한 학업계획과 비교하면 중도 탈락한 셈이다.
‘직업으로서의 공부’는 중단했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이 책은 글쓰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은 좋은 정치학 교양서이자 훌륭한 글쓰기 교본이기도 하다. 특히 저자 최장집이 글을 짓는 작법이 본받기에 더없이 좋은 모델이다. 이 책으로 상징되는 최장집의 글은 중후하면서도 밀도가 높다는 특징이 있다. 즉 정치와 사회의 근본적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도입부터 결론까지 어느 부분 하나 건너뛸 수 없이 촘촘하게 서사를 구성한다. 두툼한 책이든 얇은 논문이든 예외가 없다. 크게는 서사 구성의 프레임워크부터, 작게는 문단과 문장을 이루는 개념어들에 이르기까지, 각 요소들이 잘 조직된 시스템처럼 기능하며 논리의 명징함과 구성의 응집력을 뽐낸다. 최장집의 글이 가진 또 하나의 강점은 추상 세계와 현실 해법 간 탄탄한 연계이다. 이른바 대가들의 글은 구름 위에 정좌한 신선들의 선문답처럼 추상적이거나 원론적인 경우가 많다. 혹은 서구에서 핫한 이론들을 화려하게 인용하면서도, 실천적 결론은 정작 우리 현실과 동떨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최장집의 글은 추상적인 서구 정치이론에 근거하면서도 구체적인 우리 현실에 천착한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 ‘민주주의란 추상 세계에 존재하는 이상향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대변하는 다원적 정당체제, 노동이 중요한 의제로 다뤄지는 사회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대표적 예다.
이 책의 이론적 토대를 구성하는 학자들. 왼쪽부터 Philippe Schmitter, Robert Dahl, E. E. Schattschneider, Adam Pzerworski
물론 그의 저작 대부분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니다. 주제들은 죄다 무겁고, 함축적인 개념어들이 많이 사용되며, 문체도 건조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조금 힘겹더라도 차분히 논지를 따라가 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처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으며, 해결의 단초는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대가의 통찰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최장집의 글쓰기 문하생(오직 내 입장에서만 규정한 일방적 관계지만)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쓰는 글을 조금이라도 흉내 내 보고자 노력한다. 불가능한 목표이겠지만, 나의 글쓰기도 언젠가는 그와 닮아갔으면 좋겠다. 도입부터 결론까지 선 굵은 서사를 구축하면서도, 각 콘텐츠들과 문장들이 물 샐 틈 없이 조직되는 치밀한 글쓰기. 또한 누구나 공감하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일반론과 당위론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과 조우하여 분명한 해법을 제시하는 실천적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