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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구름 Oct 05. 2021

나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데카르트와 칸트로부터.

수업이 끝나면 로그아웃. 여전히 방구석을 벗어나지 못한다. 집밥을 먹고 다시 로그인. 집밥 먹는 대학생들이라니. 마냥 부럽지는 않다. 캠퍼스에 와본 적이 없다. 한 새내기와 줌(zoom) 상담을 한 적이 있다. 그 학생은 고3 때까지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왔다. 대학 생활이 기대되었다. 그런데 수업을 마치고 로그아웃하니 또다시 방구석에 홀로 남겨져 있단다. 상담을 마치고 나도 로그아웃하자 내 사무실 컴퓨터 앞이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나서야 스크린을 벗어난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일까?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물론 가르쳐야 할 교과서는 정해져 있다. 경영학에서 인사관리 및 조직행동론을 가르친다. 그것을 가르치면 그만이다. 그런데 매 학기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고민한다. 나의 고민이 교과 내용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라면 답은 더 쉬웠겠지. 세상 널린 교수법이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교과 내용을 충실히 전달해도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적어도 그들에게 가르쳐야 할 ‘그 무엇'이 단순한 지식 전달은 아니었다. 


나는 ‘그 무엇’에 대한 단서를 지적 도약을 이룬 위대한 철학자들에게서 얻었다. 우선 그들에게 ‘데카르트식 모험’을 심어주는 것이다. ‘나'를 독립적 지식 생산의 주체가 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고등학교까지 모든 공부는 입시에 집중되었다. 당연히 주어진 교과서를 의심 없이 수용하고 정답을 찾아야 했다. 기존 지식을 비판적으로 읽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훈련은 부족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체성을 가진 ’나‘이다. 이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식 모험이라 할 수 있다. 중세 시대 모든 지식의 확실성은 ‘신'의 계시였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지식의 확실성이 ‘나'라고 선포한다. 이 선포로 인류는 드디어 신을 떠나 지식을 탐구하는 능동적 주체자가 되었다. 나는 이런 사고의 전환과 모험을 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가르치는가?


다음으로 ‘세상'을 향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이성의 공적인 사용'을 언급한다. 이는 공동체의 규율과 제도를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을 넘어 더 나은 공동체가 되도록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식인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것에도 제약되지 않는 자유이다. 하지만, 금수저와 흙수저로 대비되는 불평등, 불공정으로 대학 지성들은 불안한 사회적 기반 속에 지식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 추운 겨울 방 안에서 한껏 몸을 웅크려 체온을 유지하려는 것과 같다. 몸을 뻗어 스트레칭을 하고, 바람이 들어오는 곳을 보수해야 한다. 대학 지식이 자신의 체온을 유지하는 도구로만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공동체를 위해 자유롭게 사용되어야 한다. 대학은 이런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이어야 한다. 나는 지식을 공적으로 사용하도록 가르치는가?


어떤 이는 내 고민에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겐 안정적 사회 기반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취업이라고. 그렇다. 모든 대학의 교육은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취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심지어 취업률이 대학과 학부 평가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나는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라고 조언하는 것인가? 그럴 순 없다. 나는 빵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지식의 주체가 되고 이를 공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학생들은 취업이 어렵다지만, 회사에서는 뽑을 사람이 없다고 한다. 지식의 주체성과 공적 사용 능력이 없는 사람은 회사가 필요하지만, 회사는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나는 연구하고 가르친다. 특별히 대학생에게 경영의 한 분야인 인사조직을 가르친다. 열심히 가르쳐도 부족함, 허전함이 있었다. 내가 잘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나는 인사조직이라는 분야를 가르치며 무엇을 전수하고 싶었던 것인가? 사회로 나가는 마지막 터널을 걷는 그들에게 어떤 무기를 줄 수 있을까? 그것은 지식의 주체자가 되고 이를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제 ‘무엇’에 대한 정리가 어느 정도 된 것 같다. 이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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