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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돌담 Feb 03. 2020

그대 갑질에 힘이 드네요. 조금만 배려해주면 안 될까요

1년 좀 넘게 금융분야에서 광고영업맨으로 뛰고 있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 스스로 칭찬해 주고 싶다. 광고영업은 요즘 기피하는 일이다. 3D업종에 가까워 20~30대는 찾아보기 어렵다. 상대적으로 적은 보수와 ‘을’의 위치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요즘 젊은 친구들은 광고영업을 하려 하지 않는다. 40대 후반인 내가 이 바닥에서 젊은 축에 들어가는 것은 이 같은 현실을 대변한다. 하지만 광고영업이 어렵고 힘든 것만은 아니다. 계획한 대로 일이 될 때도 많고 시간을 잘 활용하면 여유 시간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어려운 걸 해냈을 때의 성취감, 희열감, 만족감 등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IT분야에서 광고일을 15년 넘게 해오다 금융분야로 넘어왔는데 느낌이 많이 다르다. 깔끔한 맛이라고 해야 할까. 금융권의 홍보담당자들은 매너 있고 인성도 좋은 편인 것 같고 외모도 준수한 편이다. 이런 분들과 지난 1년 동안 네트워크를 쌓아온 것은 재미있는 과정이었다. 홍보담당자들을 통해 기업들의 문화를 알 수 있었고 그들의 성향에 맞춰 세운 전략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짜릿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늘 재미있고 좋을 수는 없다.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기업들은 우선 홍보예산부터 삭감하기 때문에 광고영업사원들은 실물경기를 바로 체감할 수 있다. 


이럴 때 진짜 광고영업맨의 영업실력이 드러난다. 물론 영업실력은 매체력에 비례한다. 이른바 마이너 매체에서 근무하는 영업사원들은 침통함을 느낀다. 기업은 매체력을 기준으로 광고비를 삭감하기 때문이다. 매체력을 빼고 나면 영업력이 당락을 좌우한다. 광고영업사원이 그동안 홍보담당자들과 유대관계를 잘 맺어 놓았으면 삭감폭을 줄이거나 평년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친해질 수 없는 담당자들도 있다. 매체의 순위를 정해놓고 마이너 매체의 영업사원들은 아예 만나주지도 않는 홍보담당자들이 있다. 매체력이 약한 광고영업사원들한테 이들이 하는 행동은 갑질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나도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해나’ 회의감이 들었을 때가 있다. 모회사의 홍보담당자를 만나려고 수 차려 전화를 했는데 받지도 않고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없어 직접 회사로 찾아갔다. 1층에 와있으니 잠깐 볼 수 있나 정중히 메시지를 보냈는데 다음에 오라는 답만 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이미 광고 계획이 잡혀 있었던지라 수차례 확인 연락을 했다가 겨우 어렵게 메시지만 하나 받았다. 연초라서 ‘광고 예산이 나오지 않아 광고 진행이 어렵다’라는 답이었다. 순간 맥이 풀렸다. 그래도 그 담당자의 말만 믿고 이미 회사에 보고해둔 상태였는데... 며칠 후 우리 매체만 빼고 타 매체에는 광고가 모두 진행되었다. 


기운이 빠지고 화도 났다. 우리 매체만 소외되었다는 사실도 기분 나빴지만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에 대해 인간적인 모멸감까지 느꼈다. 나와 내가 속한 매체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근데 을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런 홍보담당자들을 만났을 때 일은 두세 배로 힘들어진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일부러 사람을 애태우게 한다. 내부적으로 광고를 진행하기로 결정이 나도 마지막까지 기다리게 한 후 진행을 한다. 그 시간에 모든 정성을 다해야 한다.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전화하고 깎듯이 예를 갖춰 문자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그런 다음 광고가 나온다. 그렇다고 광고비가 많아 회사 매출에 큰 기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분들과는 통화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어쩌다 통화가 되면 짜증 섞인 목소리에 화가 나있는 듯한 투로 말하기 때문이다. 통화하고 나면 부정의 에너지가 몰려와서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들 때도 있다. 내 생각이 틀리길 바랄 뿐이다. 너무 내 입장만 대변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그분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수많은 광고영업사원들한테 연락이 올 테고 일일이 답변을 못 해주는 상황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상대방 입장이 안되어 봤으니 모를 일이다. 


근데 분명한 건 거절에도 기술이 있다.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인간적으로 배려한 상태에서 거절당하면 기분이 나쁘지 않다.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업무적으로 갑이라고 해서 인격까지 갑은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해 줄 때 진정한 갑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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