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글을 쓸 때의 나는 좀 이상한 코드에 꽂힌다. 작가의 자아를 가진 내가 쓴 글을, PD인 내가 본다면 굉장히 난처했을 법한 그런 기획들. 내가 제작진의 관점에서 작가님에게 쏟아내는 말들이 있기에, 요즘은 더더욱 펜이 잘 나아가지 않는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고 계속 뒤로 미뤄둘 뿐이다.
최근에는 소파에 멍하니 앉아 탈모에 관한 방송을 봤다. 아침방송. 흔히 말하는 건강정보 프로그램이랄까. 스튜디오에서는 탈모에 좋은 음식. 탈모에 좋은 생활 습관. 탈모를 예방할 수 있는 운동 등등등. 머리가 풍성한 의사 선생님이 나와 시청각 자료와 함께 귀에 쏙쏙 박히는 설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패널들의 찰떡 리액션은 덤이다. 탈모에 관심이 있어서 본 건 딱히 아닌데, 요새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뇌를 빼놓고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무해한 프로그램을 선호한다. 이런 방송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탈모에 대해 두려움을 심어주는 일이다. 원형탈모가 발생해 정수리에 흰 부분이 점점 늘어가는 한 남자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그를 나는 한참이나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에게는 인생 최대의 고민일 텐데. 남 일이면 역시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는 걸까. 심지어 그의 머리 모양을 보면서 지구본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구본은 지구본인데, 지구온난화가 일어나는 지구본. 가장자리만 머리가 빽뺵하고 중앙의 빈 공간이 점점 늘어가는 모양을 보며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는 지구를 상상했다. 지구 온난화가 발생해 바다가 육지의 공간을 점점 잡아먹는 것처럼. 저 사람의 두피에도 지구 온난화 같은 게 발생하는 건 아닐까.
그러다 언젠가 신이 나에게 형벌을 내린다면 탈모가 찾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처럼 지구를 괴롭히는 사람도 없으니까. 여름철에는 당연히 에어컨을 풀가동 해야 하고. 에코백은커녕 비닐봉지 애호가인 데다가. 매일 분리수거도 대충 하고. 등등등. 지구를 괴롭히는 나에게 신이 형벌을 내린다면, 탈모라는 형벌을 내릴 수도 있겠다.
지구 온난화가 진행될 때마다 머리가 빠지는 사나이. 그래서 지구 온난화를 막으려고 노력하는 사나이.
티비를 멍하게 보다가도 뭐 이딴 아이템에 꽂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떤 작가님이 16부작 드라마로 하자고 들고 온다면 내가 퍽-난처해할 그런 아이템들. 건강 정보프로그램을 보다가도 또 일 생각을 하고 말았다. 눈물의 여왕이나 봐야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