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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호지방이 Jun 10. 2024

여름과 친해지기

 여름에만 볼 수 있는 풍경들에 대해 감각을 열어두고 싶다. 초록초록한 나뭇잎과 말간 하늘. 강가를 따라 걷다 보면 하늘 밑에 펼쳐진 윤슬. 햇빛을 받아 쨍하게 빛나고 있는 스테인리스 난간.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바닥에 흔들리고 있는 볕뉘들. 비 온 다음 날 출근길 물웅덩이에 비친 나무들. 아지랑이 낀 수평선 너머로 흔들리며 걸어가는 사람들. 등등. 

     

 물기를 머금은 이미지들. 여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물성이다. 습기를 머금어 살갗들이 눅진눅진하게 느껴지는. 심지어 공기마저 물기를 머금어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계절. 이러쿵저러쿵해도 여름을 대표하는 가장 주된 이미지는 ‘물’이지 않나. 비, 물웅덩이, 젖은 바닥, 땀 등등. 

      

 그런 여름이 20대에는 참 싫었다. 나는 전통적으로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가. 공기가 팔랑팔랑하게 느껴지는 가을, 겨울이 좋다. 뭐 딱히 그런 걸 제외하더라도 여름을 싫어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비만 오면 홀딱 젖게 되는 양말. 피부 위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끈적끈적한 땀. 타노스의 마음을 알게 해주는 한 여름밤의 모기 소리. 등등. 


 여름은 낭만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찝찝함을 형상화 시켜놓은 느낌이랄까. 인류애를 상실케 할 요소가 너무나도 많은 계절일 뿐이었다.  

    

 그런데 웬걸.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어제 오전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다 보니 여름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으니 마음이 유해진 건가. 아니면 감정 기복이 심해진 건가. 찐득찐득한 살갗을 그늘진 바닥에 대니 나름의 쾌감이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긍정적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뒤에나 돌아올 이 계절을 충분히 느껴보자고. 안 좋은 모습만 보려 하지 말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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