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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우람 Sep 28. 2022

소설 <데미안>을 읽는 3가지 포인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모임 회원분들과 종종 독서모임을 가진다. 평소에는 각자 자유롭게 책을 지참하지만, 오랜만에 헤세의 명작인 <데미안>으로 도서를 지정했다. 나름 두툼한 책이기에 한 달간의 여유를 두었다. 그리고 당일! 모임 자리에서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며 느낀 포인트를 말씀드렸고, 다른 회원분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확실히 여러 관점으로 바라보니 새로 깨달은 점도 많았다. 내가 생각하는 <데미안>의 읽기 포인트를 3가지 정도로 정리해봤다. 





1. 섬세한 표현


<데미안>은 주인공인 싱클레어가 데미안, 그리고 여러 인물을 만나면서 내면적인 성장을 이루어내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인물 간에 여러 대화가 오고 가는데 표현이 굉장히 우회적이고 섬세하다. 역시나 독서모임에서도 글의 표현방식을 주제로 한 대화가 빠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호불호가 갈렸다. 직관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분들은 굉장히 난해하고 지루했다는 의견을 주셨다. 만약 그렇다면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데미안>의 표현이 참 멋스럽다고 생각했다. 마치 눈을 감고 워터 슬라이드를 타듯 표현을 따라가며 읽었다. 그렇게 유연과 여유를 가지고 읽으니 인물의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책은 간접적인 경험을 도울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사건을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는 현장감과 생생함이 떨어질 수 있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그리고 소설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상황이 주어지고 스토리가 전개된다. 여기서 독자는 주체가 아니라 제삼자, 즉 사건에 전혀 개입할 수 없는 객체가 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읽는 사람에게 무엇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를 선택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작가에게 있다. 헤르만 헤세는 특유의 섬세함으로 '독자를 배려하지는 않지만 친절하고 생생하게'를 선택한 것처럼 느껴졌다. 관심이 있는 사람만 들어오라는 신호일까.



2. 데미안의 정체 


소설 <데미안> 속 데미안은 너무나도 완벽한 사람이다. 책을 읽으며 데미안에게 마치 싱클레어의 삶 자체를 이끌어주는 성스러운 인도자와 같은 모습이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처음 '사실'이라는 프레임을 가진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점차 그 생각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온 세계와 인물들이 어떤 보이지 않는 의지에 홀린 듯이 싱클레어를 자극하고 이끈다. 그 의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 방향을 명확하게 가리키고 있었고,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쓰나미가 되어갔다.


데미안의 정체에 대한 독서모임 참여 회원분들의 의견도 갈렸다. "그는 실존할 수 있는 인물이다.", "싱클레어의 또 다른 자아다.", "소설을 작가의 의도대로 이끌어가기 위해 창조된 인물이다." 심지어 "데미안이 사이비 종교의 일원이다."라는 의견을 주신 분도 계셨다. 팩트체크는 이제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작가는 이런 열린 결말을 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의적인 해석의 시도를 통해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점검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3. 니체


소설 <데미안>을 읽으며 니체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 책은 여러 힌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여준다. 카인의 표식을 역설하는 데미안의 발언, 선과 악을 모두 포용하는 신 아브락사스와 그를 신봉하는 신도들. 여러 부분에서 그리스도적 가치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발견된다. 기존의 사회적 통념과 기준을 부정하는 태도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니체의 사상도 당시의 선과 악을 구분하는 통념인 그리스도적 가치관을 부정한다. 그렇게 선악을 구분을 붕괴시키고, 그 저울 속에서 기준점을 찾지 못해 헤매는 삶을 상정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싱클레어의 고뇌와 방황을 보며 이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는 헤매고 있었다. 허무주의(nihilism)에 빠져 허덕이면서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아 보였다.


니체는 여기서 한 발 나아간 사람, 즉 허무주의를 극복한 사람을 초인(위버멘쉬)이라고 부른다. 소설에서는 데미안이나 그와 같은 아브락사스의 추종자가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시하는 도덕적 가치를 기준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 그 기준을 정립하고, 신념을 발판으로 한 발 나아가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찾아보니 실제로 헤르만 헤세가 니체를 굉장히 사랑했다고 한다. 어쩌면 데미안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은 싱클레어를 초인(위버멘쉬)으로 만들기 위한 재료이자 장치가 아니었을까. 가상의 세계를 통해 니체의 철학을 실현시킴으로써 그를 지지하고 그의 사상을 증명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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