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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매거진 Aug 02. 2020

쑥스토리; 어느 50대 여성의 인생 이야기

[20-39세] 나도 모르게 들어간 결혼의 구덩이에서 뛰쳐나오기까지.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우리 엄마였다. 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 온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쑥스토리는 가부장제 아래 태어난 어린 여성의 이야기이자, 두 딸을 가진 어머니의 이야기이고,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사회에 내던져진 여성의 이야기이자, 사회를 바꾸려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1호부터 3호까지 그의 인생을 나이별로 나누어 듣는다.





# [20-39세] 나도 모르게 들어간 결혼의 구덩이에서 뛰쳐나오기까지.





별 생각 없이 연애하다 별 생각 없이 결혼했다.


 공무원에 입사하고 일 년 정도 지났을 때, 엄마는 주말마다 선을 보라고 했다. 스물네 살이 금값이라고 지금 봐야 한다고 했다. 선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호기심도 있었고, 내 직업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별로 꿀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선을 봤다. 당당하게. 주눅 들거나 그럴 필요가 없어서.

결혼도 그저 그랬다. 하기 싫지도 않고 좋지도 않았다. 그때는 딱히 결혼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 결혼을 왜 해야 하는지, 어떤 가정을 꾸밀 건지, 나에게 장단점이 무엇인지, 평생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결혼의 의미와 짊어져야 할 책임 같은 것도 몰랐다. 그냥 큰일을 한번 제대로 치르는구나. 제대로 된 어른이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별 생각 없이 연애하다 별 생각 없이 결혼했다.


 그래서 상상했던 결혼생활도 없었다. 부모님 결혼 생활을 보고 그냥 다 저렇게 사는구나. 싶었기 때문에. 그냥 남들이 다 하는 결혼이니까 해야 되겠다. 적당한 사람 만나면 해야겠다. 사람이 아주 못되지만 않으면 살면 되겠지. 싶었다



넌 경제적으로 책임을 져야 해. 내가 애를 낳고 집을 돌보고 육아를 하는 것처럼.


 결혼 초반에는 직장생활을 계속했었다. 그러다 남편이 사업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나와 맞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남편이 나의 직업만 믿고 사업을 펼치는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있었다. 남편은 내가 벌어오는 돈이 있으니까, 그것만 믿고 자기가 하고 싶은 사업을 자유롭게 하려고 했다. 난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널 벌어먹이려고 결혼해서 들어온 사람도 아닌데. 그래서 나도 그만두고 사업 같이하자고 했다. 책임지기 싫어서 그랬다.


 피자가게를 할 때는, 남편은 육아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반면 나는 일도 하고 가사와 육아도 했다. 첫째를 임신하고 나서 만삭인데도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했고, 애가 나오고 나서도 업고 일을 했다. 대신 친정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엄마가 가사를 많이 도와줬다. 시부모는 과수원을 해야 해서 애를 못 본다고 했다. 불만은 없었다. 엄마를 많이 고생시킨 것 같다는 미안함은 여전히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이사를 한 후에 둘째 때는, 남편은 일을 하고 나는 가사를 전담했다. 그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아기와 집에 있는 게 좋았다. 내가 아무리 집에 있어도 넌 경제적으로 책임을 져야 해. 내가 애를 낳고 집을 돌보고 육아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했다.


 남편은 무책임했다. 내가 “친정에 너무 많은 부담을 주는 거 아닐까?”라고 얘기하면 “그럼 시댁에 있자.”라고 했다. 시댁이 여건상 가사와 육아를 도와줄 수 없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나 몰라라 했다. 결국 시댁에 가면 모든 걸 다 내가 감수해야 할 게 분명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무책임했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다. 사실 아무것도 안 도와줘도 되니까, 혼자 육아와 가사를 해도 괜찮으니까, 경제적인 문제나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빚은 계속 늘기만 했다. 있던 전셋집도 팔고 경제적으로 집안이 폭삭 망했다. 부모님이 땅을 팔아서 갚아줘도 빚은 계속 늘어났다. 법원에서 빨간딱지가 막 날아오고 그랬다. 그제야 결혼 생활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학습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남편이 제사가 있다고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안 간 적이 있다. 그랬는데 집에 와서 남편이 엄청 화를 내면서 나를 발로 찼다. 너무 놀라서 손이 벌벌 떨렸고, 응급실을 갔던 기억이 난다. 그다음 날 아이들을 친정에 두고, 아빠가 가서 남편을 혼냈다. 진심 어린 사과는 받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때때로 갑자기 숨이 안 쉬어졌다. 그래서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고, 의사가 정신과에 가야 할 것 같다고 해서 정신과에 갔다. 우울증 진단을 받았고, 6개월 동안 병원에 다녔다. 상담하면서 처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전부 한 것 같았다. 약도 먹고 상담도 열심히 했는데 우울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니까 누가 풀어줄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약도 끊고 상담도 안 갔다. ‘왜 나만 이혼하고 왜 나만 이렇게 살아?’ 하는 나의 생각이 문제인 것 같았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다시 일도 하고 밝게 지내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두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일단 첫째는 생겨서 낳았다. 빨리 낳아서 빨리 키우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요즘처럼 임신 계획이랄 건 없었다. 둘째는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긴 했지만, 마음먹고 낳았다. 둘 정도는 낳고 싶었고, 두 명의 나이 터울이 너무 많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혼자 살면 너무 외로울 것 같았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외동도 너무 별로인 것처럼 보였다. 또, 내가 나이 터울이 많은 형제들이 있어서 정상적인 터울의 형제를 원했다. 나도 그것 때문에 많이 외로웠으니까.


 둘째를 낳을 때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만약 딸이면, 첫째 것을 물려 입으면 되었다. 만약 아들이면, 친정과 시댁에서 다들 좋다고 뭘 사주겠지 싶었다. 먹고 싶은 것도 다 먹고 살았다. 친정엄마도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줬다. 아이를 낳는 것이 경제적인 문제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임신 초기에는 입덧이 너무 심해서 꼭 토하다 죽을 것만 같았다. 노란 물까지 나왔다. 모든 냄새가 다 이상했다. 엄마가 애가 자리를 잡느라 그렇지 나중에는 잘 먹힐 거라고 했고, 실제로 5개월쯤 되니까 정말 음식을 먹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 달이 되고 나서는 빈혈이 오기 시작했다. 미리 철분제를 챙겨 먹었어야 했는데 못 챙겨 먹어서 세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찼다. 애를 낳은 후에는 수혈을 두 통이나 맞았다. 배가 점점 불러올 때는 기대감도 있었다. 내가 두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분신술같이. 똑 닮은 애가 나오겠구나. 신기하고 설렘도 있었다. 출산 때는 이러다 죽는 것 같았다. 하늘이 노랗고 배를 찢는 기분이었다. 소리를 엄청나게 질렀다. 12시간 진통을 하고 첫째를 낳았다.



딸 둘 낳고 아들 낳으면 홈런, 딸 하나 아들 하나면 안타.


 첫째를 너무 부실하게 나았던 것 같아서, 둘째를 임신하고 나서는 몸보신을 하기 위해 한약방을 갔다. 그때 그 한의사가 진맥을 하고 남자아이 같다고 했다. 그래서 빚이 많은 상황이었는데도, 다들 좋아했다. 옛날에는 ‘남자아이가 나오면 집안이 핀다.’ 그런 소리가 있어서 환영했던 것 같다. 남자를 그런 전환점 삼는 분위기가 있었다. 아들이면 시댁에서 조금 더 많은 지원을 해줄 것 같아서 나도 내심 아들을 바랐던 것 같다. 돈이 급해서.


 실제로 딸인 걸 확인하고 나서, 시댁에선 셋째를 낳길 원했고 엄마는 그만 낳으라고 했다. 나도 그만 낳겠다고 생각했다. 두 명을 낳겠다는 목표를 이뤘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는 내가 나가서 경제적인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딸딸이 엄마, 딸기 엄마. 나를 그렇게 불렀다. 딸 둘 낳고 아들 낳으면 홈런, 딸 하나 아들 하나면 안타. 그런 말이 있었다. 마지막에 대박을 터트렸다고 생각하니까. 딸 둘은 나중에 친구처럼 좋겠네. 그런 반응이었다. 엄마는 매일 이야기 했다. 어휴, 지지배들만 둘이야. 아들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딸이 더 낫다고 얘기했던 것 같다. 작은오빠보다 내가 더 나은 거 몰라? 큰아들이 더 속 썩이잖아. 분명히 딸이 나중에 얼마나 좋은 줄 알아?



중고차 파는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영업하는 사람들끼리 카드를 쳤다.


 돈을 벌기 위해 남편이 원래 하던 일을 하려고 다른 지역으로 옮겼다. 남편은 그 와중에 중고차 파는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 영업하는 사람들끼리 카드를 쳤다. 그런 생활 태도가 싫었다. 나 같았으면 그 시간에 막노동하더라도 돈을 벌어서 갚았으면 좋겠는데, 빚은 많고 자본도 없으면서, 돈 벌 생각도 안 하고 계속해서 사업을 꿈꿨다. 크게 망했던 기억이 있는데도 달라지지 않았다. 월급쟁이나 택시기사나 부지런하게 노동할 수 있는 게 많은데도 계속해서 사업을 꿈꿨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이혼을 하게 되었다. 이혼하지 않고 일을 하면서 경제적인 상황을 개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책임감이 없었고, 경제적인 위기에 대처하려는 태도도 없었다. 지금 경제적인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빚이 얼마인지,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물어봐도 답이 없었다. 빚은 점점 늘고, 그 빚의 반은 내가 떠안아야 했다. 그래서 이혼했다. 신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가난이 지겨웠다. 가난에서 나아지는 모습이 없는 게 지겨웠다.


 이대로라면 아이들을 키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경제적인 활동을 해서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두렵지는 않았다. ‘내가 나가서 노동을 뭐라도 하면 돈이 없을까. 내가 설거지를 해서라도 애는 키울 수는 있다. 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혼을 고민할 때까지는 힘들었다. 결심하고 난 후에는 힘들지 않았다. 확신이 있어서. 그렇지만 사회에서 이혼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별로여서 조금 우울하긴 했다. 우울하긴 했는데 지금 빨리 돈을 벌어야 해서, 우울함이 뒷전이었다. 힘들고 우울하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경제적인 활동을 열심히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혼한 보람이 없었다. 친가의 반응은 모르겠고, 우리 부모님은 네가 한다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냥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언젠가 한 번 엄마가 남편한테 전화해서 잘살아 보라고 권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엄청 뭐라고 했다.



그때 만족했다고 말했던 건, 따지고 보면 자기합리화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성적도 안 좋고, 다니던 과에도 관심이 없어서, 구인 구직보고 서울에 가서 카드 판매원, 골프 샵 경리를 했었다. 그러다 다시 충주로 내려와서 아빠의 권유로 공무원 시험을 봤다. 결혼 후 공무원을 그만두고 남편의 일을 돕다가, 학습지 선생님을 시작했다. 6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빚을 갚았다. 그 후에는 지인의 추천으로 학습지 선생님보다 안정적인 청소년 관련 일을 했다. 돈이 또박또박 나오고, 제시간에 출퇴근할 수 있는 직장이었다. 실제 받을 수 있는 돈은 적었지만, 오전에 집안일을 할 수 있고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었다. 일을 하다 보니 자격증이 필요해서 지도사 3급을 땄다. 그 후에 2급을 따고, 다시 1급을 땄다. 3년 계약이 끝나고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더 높은 직급을 올라갈 수 있어서이기도 했고, 환경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무원을 할 때는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다른 일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혼 후에는 그렇지 못했다. 경제적인 압박이 있었고 육아를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더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직장을 고를 때 따질 것도 많았다. 이혼 후 직장과 육아를 혼자 감당하면서 분명 어려운 점도 있었다. 그렇지만 통장에 돈이 쌓이니까,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니까 견딜만한 정도였다. 아이들을 많이 못 돌본 건 사실이다. 아이들이 비뚤게 자라진 않을까 걱정은 되었지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니까 아이들이 알아줄 거라고 믿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성과도 잘 냈고 꽤 성공도 했지만, 돈 이외에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 관계도 좋지 않았고, 구설수도 많았다. 가정이 파탄 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다. 자아실현의 의미가 아니었다. 직업적 성취도 없었다. 그냥 더 높은 위치에 가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만족했다고 말했던 건, 따지고 보면 자기합리화였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살아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지나고 보니 가면이었다. 내가 시간의 제약을 받는 게 싫었다. 내가 하고 싶은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다. 일은 그냥 다른 의미 없이 노동이었던 것 같다. 싫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는데 그걸 입 밖으로 꺼내면 더 하기 싫어질 것 같아서 그 말을 저 아래에 묻고 살았다. 나는 어차피 이걸 못 그만두니 절대로 싫어도 내색하지 말고 싫으면 안 돼.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어느 정도 위치에 이르기 전까지는 싫다는 소리 절대 하면 안 돼. 절대 안 돼.



인생에 대해 되돌아봄이 있었다면 좋은 선택을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인생에 대한 정리가 아무것도 안 되었다. 인생에 대해 되돌아봄이 있었다면 좋은 선택을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냥 돈을 먼저 벌어서 그런 게 없었다. 내 가치관도 없고 인생에 중요한 것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는 새아빠가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경제 관념이 있는 보통 사람이 들어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다 하는 것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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