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시간

기억 4_엄마가 우울증이 가라앉았을 때

by Shine 샤인

내 기억 속에 엄마는 대부분 우울했지만 또 대부분 쾌활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울증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학부모 회의도 참석하고 적극적으로 나와 동생의 학교 생활을 돌보기도 했으니까.

너무나 에너제틱하게 열정적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엄마의 본모습이 아니었을까.

엄마도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따뜻한 엄마의 품에서 자랐다면 아주 쾌활하고 에너지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울증이 있는 엄마 곁의 아빠는 그렇게 좋은 남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빠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집안을 돌보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70년대, 80년대 그 시절 학생운동을 해서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들은 몇 년을 취조받고 뒷조사받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감옥에도 몇 달 있었고 나와 내 동생이 대학을 갈 때쯔음 민주화운동 유공자 자녀로 대학 학비 면제를 받을 정도였다. 결혼 후에는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 조용히 살 줄 알았는데 농민운동에 앞장서던 사람이었다. 늘 아빠는 엄마를 천사라고 부르며 자신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어느 날 아빠가 농민운동 모임에 나가고 나서 엄마가 조용히 빨래를 개다가 수건을 찢는 것을 목격한 이후로는 엄마가 이해하기보단 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라는 사람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반대하거나 자신을 더 돌보아 달라고 말은 못 하면서 혼자서 끙끙 앓던 엄마. 아빠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으니 그것을 반대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정치색이 없다. 이것이 맞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정치보다는 생명이 더 중요하고 가정을 지키는 것이, 생명을 지키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활동이 틀렸다기보다는 그때 아빠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엄마의 곁을 더 지켜주며 엄마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원망보다는 그랬으면 좋았을걸 하는 마음이다.


그렇게 바깥활동에 열심인 아빠를 대신해서 학교를 다녀온 후 대부분의 시간은 엄마와 함께였다. 엄마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우리와 놀고 이야기해 주었다. 우울하지 않을 때의 엄마는 우리 남매에게 최고의 엄마였다. 동생은 특히 엄마를 너무나 좋아했는데 엄마에게만 보이는 애교와 행동이 있었다. 그 시절 동생은 정말 사고뭉치에 개구쟁이어서 요즘 같으면 [금쪽같은 내 새끼] 같은 곳에 나올만했는데 그래도 엄마의 말은 들으려고 했다. 엄마만이 동생을 돌볼 수 있었고 잠잠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셋이 같이 노는 경우가 많았는데 별 것 하지 않아도 재미있었다. 하루는 아빠가 저녁에 나가고 우리는 밥을 먹고 방에 앉아 있었는데 공놀이가 시작되었다. 작은 방에서 셋이서 그냥 공을 가지고 장난치고, 서로 삼각형을 만들어 던지고 이야기하는데 깔깔 웃고 난리가 났더랬다. 지금 와서 아이를 키우며 생각해 보니 아이가 놀아달라고 할 때 별 것 아니지만 같이 이야기하고 놀아주면 엄마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엄마와 가장 행복했던 날은 그날이었다. 엄마가 즐거워하고 웃으니 우리 남매는 그냥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엄마가 행복하고 웃는 그 시간이 우리 남매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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