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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방 주인 Dec 21. 2022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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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살아갈 책임


나는 기억한다. 어릴 적 외할머니께서는 나와 누나에게 예쁜 장난감 보석을 선물해주셨다. 꽤나 애지중지하게 여긴 그 보석은 항상 우리와 함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발장과 벽 사이 좁은 공간으로 쏙 하고 들어가 잃어버리기 전까지 말이다. 그 주위를 살피며, 어떻게 빼면 될까 고민하던 나와 누나의 모습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어찌 보면 아주 짤막한 유년의 추억이지만 나에게는 그 이외에 그전의 내가 어떤 것을 보고 느꼈는지 기억해낼 방도가 없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애를 써봐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이상하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아장아장하던 ‘나’의 첫 옹알이를 기억하시는 걸 보면, 나는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인 내가 마구 꿈틀거리던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참 놀랍기도 하다. 심지어는 정말 ‘뿅’하고 보석을 찾던 그 순간부터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는 것도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진다.


심리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보석을 찾던 그전부터 조금씩 자의식이 형성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나임을 알고 행동했을 것이다. 최근 내가 읽은 심리학 교수의 책에 의하면 자의식이란 인간과 동물을 나눌 수 있는 척도이다. 즉,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는 갓 태어난 아기 강아지랑 다를 바 없는 존재지만, 자의식의 형성을 통해 인간은 끊임없이 성장해 나갈 수 있다. 아기 강아지도 걸음마를 떼고, 옹알이를 하며, 점차 세상을 배워나간다. 주인이라는 존재를 기억하고 따른다. 강아지들도 감정을 가지고 일정한 방식으로 소통을 하며 살아간다. 다만 그뿐, 진정한 의미의 자의식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이는 자라서 자의식을 형성한다. 자기가 찾고 있는 것이 예쁜 보석임을 알고, 누나와 함께 신발장에 끼인 그 보석을 찾아 나선다. ‘신발장 사이에 끼었네, 어떻게 하면 뺄 수 있지’에 대해 누나와 간단히 의논을 하고 협업한다. 학습은 적절한 보상을 통해 훈련받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점점 자신의 선호, 주장, 및 의문을 가지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는 수준까지 나아간다. 결국엔 아이는 세상과 소통하며 배운 지식들로 하여금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자의식이 있다는 것은 생명체 중 유일하게 선택받은 축복인 동시에, 더 나은 삶을 추구할 당위가 있다는 큰 짐을 지운 저주이기도 하다. 결국 자의식이 존재함으로써 선과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나운 개가 지나가던 새를 잡아서 잔인하게 물어뜯는 행위를 보고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 개가 먹잇감을 노리고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은 본능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오로지 고통을 위한 고통을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존재이다. 생존이라는 원초적 목적 이외의 여타 이유로 타인을 괴롭힐 수도, 억압할 수도, 고문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즉 인간이 자의식을 가진 이상, 인간이 하는 모든 선택은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잘함과 못함의 척도 위에서 일정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결국 우리는 태어난 동시에 가치의 척도 위에서 평가질 당하는 선택을 하며 살아갈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이다. 성서 가장 맨 앞에 있는 창세기는 이런 인간의 존재론적인 숙명을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존재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헐벗은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듯이, 우리의 멍청한 선택과 생각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전 우주를 통틀어 자의식을 가진 존재가 또 있을까. 왜 지구에는 인간만이 자의식을 지닌 채 태어났는가? 누가 인간에게 자의식을 불어넣었는가? 어째서 자의식은 거짓말처럼 ‘뿅’하고 생기고 ‘뿅’하고 사라지는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어쩌면 인류가 살아있는 동안엔 절대 풀리지 않을 질문일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삶과 죽음, 행복과 고통, 좋음과 나쁨은 실존하고, 우리는 그렇기에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우리의 삶에 지워진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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