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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석 Dec 10. 2021

먼지 쌓여버린 그 시절

김필, 《그 때 그 아인》

김필, 《그 때 그 아인》

노래를 들으면서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노래가 만들어낸 이야기


또 면접에 떨어졌다.


이걸로 면접에서 떨어진 회사는 한 손에 꼽을 정도를 넘어섰다.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이다 생각하며 전념을 다했는데... 6시간씩 자던 잠은 5시간으로 줄이고 곁눈질로도 보지 않았던 웅변학원까지 다녔다. 이번 면접을 준비하며 인생에서 처음으로 쌍코피라는 것을 마주하기도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았고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겪었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모든 노력은 나를 결국 이 순간에 데려다 놓기 위함이었나보다.


이 짓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까. 지금 책상에 놓인 책들을 몇 번이고 더 봐야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괴롭지만, 이러한 공부가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지가 불투명하다는 점이 내 마음의 상처를 쑤셔댄다. 처음에는 멋진 신입사원이 되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멋진 정장을 입은 내 자신이 사원증을 찍고 사옥으로 들어가고, 통장에 찍힌 월급으로 부모님께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내 자신에게도 선물을 사고 싶었다. 사회초년생으로 성장한 내 자신을 상상하며 책상 앞에 꾹 붙어있었는데, '아쉽게도'라고 적힌 문자를 받을수록 그 상상은 멀어져 망상에 가까워져 갔다.


이런 생각이 머릿 속을 헤집어 놓은 상태에서는 더 이상의 공부는 의미가 없다 생각한 나는 의자를 뒤로 밀어낸다.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는 내 방 한 면을 가득 채운 책장을 바라본다. 내가 읽었던 책이 이렇게 많았었나... 만화책부터 고전소설까지. 참 옛날에는 독서든 공부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뭐가 좋다고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같은 시간 축 위에 있는 동일한 나 자신이지만 다른 사람인 듯 거리감이 느껴진다.


책장을 훑어보다 고등학교 때 필기노트에 눈이 머무른다. 내가 애정을 가지고 썼던 노트이다. 고등학교 때 썼던 필기노트인데, 이것만큼은 열심히 꾸며보겠다고 5색 볼펜을 산 기억이 있다. 내 고등학교 생활의 역작이라 불러도 손색없을만큼 깔끔하고 예쁜 노트라고 자부하는 편이다. 오랜만에 그 아름다움과 그 때의 뿌듯함을 느껴보고 싶어 책장에서 꺼내본다.


표지에 정자로 적힌 '심화화학'부터 열정이 느껴진다. 내가 저렇게 또박또박 글자를 쓰는 경우는 수능 시험지에 이름을 쓸 때 말고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한 장씩 넘겨본다.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그리고 보라색. 형형색색의 볼펜이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낸 글은 오히려 그림 같고, 자와 각도기를 사용해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림들은 일러스트로 그렸다고 해도 못 속일 사람이 없을만큼 정교하고 군더더기 없다. 매번 보면서 느끼지만, 이거 쓸 때 열정은 정말 대단했던 것 같다.


계속 페이지를 넘기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하나의 메모가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노트에 애정이 과분했던 나머지, 정리노트를 끝마치면서 일종의 소감문까지 쓴 것 같다. 뭐 이렇게까지 했나-싶지만, 그만큼 이 노트를 아꼈으니까. 대충 읽어보니 그 당시 내 새벽감성도 많이 가미된 듯하다."재밌었다"라고 시작한 글은 이렇게 이어졌다.


"하지만 힘들었다. 연구 때문에 힘들고 바쁜데, 시간을 쪼개가면서까지 정성들이는 것이 벅차기도 했다. 그깟 노트 하나인데-라는 생각에 포기하려고도 했다. 그렇지만 나만의 멋진 노트 하나쯤은 만들어보자는 일념으로 시작한 이 작품, 그 때의 초심을 놓칠 수는 없었다. 노트를 다 작성할 때를 생각하며 힘듦을 잊고 무작정 이어갔다. 그 끝에서 이 노트를 얻게 되었고, 뿌듯함도 느꼈다.

나중의 내가 이 노트를 꺼내볼지는 모르겠다. 꺼내보더라도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이해 못할 것이다. 왜냐면 지금의 나도 이해 못했으니까ㅎ.ㅎ 대신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힘들었지만 과거의 초심과 미래의 기쁨만 생각했다. 열정이 가득하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이어갔다. 그렇기에 이 노트가 나올 수 있었다."



코 끝이 찡해졌다. 그 때의 결연한 의지와 확고한 목표의식은 지금의 나에겐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마치 사막에 떨어진 이방인과 같다. 이방인에게는 황야를 떠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있을 뿐, 광활한 모래와 부족한 물은 의지를 꺾고 목표를 흐린다. 나에게도 회사를 붙겠다는 목표가 있다. 그리고 처음에는 열심히 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나머지 지쳐버렸고,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고 힘들어서 더 지쳐버렸다. 처음의 순수함은 온데간데 없이 취업이라는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옛날의 나를 마주하자니 반성하게 된다. 과거의 나는 할 수 있었는데, 왜 지금의 나는 하지 못할까. 과연 저 때의 생각과 감정을 되찾을 날이 오기는 할까. 옛날의 나 자신를 배신한 듯한 느낌에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입에 왠지 모를 미소가 지어지지만, 씁쓸함이 가득함은 확실하다.


추억의 늪에서 더 이상 헤어나오지 못하기 전에 나는 책을 덮고 다시 책상 앞으로 간다. 내 자신이 미워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힘을 얻어간다. 과거의 나도 했는데 지금의 나는 못할 이유가 있나. 물론 그 때의 순수함은 이제 없다. 혹독한 현실만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꿈꿔왔던 모든 걸 가지진 못했다. 그 때만큼의 의지와 열정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스스로 노트에 썼던 것만큼은 지키고 싶다. 내 자신이 부끄럽지 않게, 10년 전의 내가 실망하지 않도록.

 


과거의 모든 순간들이 나에게 항상 새로움을 가져다주었듯이,
지금 이 순간은 나를 더 좋은 미래로 데려다 놓기 위함일 것이다.







개인적인 감상평


<이태원 클라스>의 ost로 접한 이 노래는 우울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왠지 모를 희망이 노래 곳곳에 숨겨져있다. 잔잔한 멜로디는 평화로웠던, 좋은 기억들만 남아있는 옛날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겨있는 듯하다. 하지만 애절함을 담아낸 목소리는 추억을 실망시키지 않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소리치는 듯 하다. 지금 돌이켜 보았을 때 과거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듯이, 지금 이 순간이 미래에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을 수 있게 열심히 현실을 살아가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하루가 후회스러운 날, 내가 잘 나가던 순간이나 좋았던 때가 유독 많이 생각나는 날. 그런 날에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좋은 노래로 추천하고 싶다.






가사

길었던 하루 그림잔

아직도 아픔을 서성일까

말없이 기다려 보면

쓰러질 듯 내게 와 안기는데

마음에 얹힌 슬픈 기억은

쏟아낸 눈물로는 지울 수 없어

어디서부터 지워야 할까

허탈한 웃음만이

가슴에 박힌 선명한 기억

나를 비웃듯 스쳐 가는 얼굴들

잡힐 듯 멀리 손을 뻗으면

달아나듯 조각난 나의 꿈들만

두 갈래 길을 만난 듯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다

무언가 나를 이끌던

목소리에 한참을 돌아보면

지나온 모든 순간은 어린

슬픔만 간직한 채 커버렸구나

혼자서 잠들었을 그 밤도

아픔을 간직한 채

시간은 벌써 나를 키우고

세상 앞으로 이젠 나가 보라고

어제의 나는 내게 묻겠지

웃을 만큼 행복해진 것 같냐고

아직 허기진 소망이가득 메워질 때까지

시간은 벌써 나를 키우고

세상 앞으로 이젠 나가 보라고

어제의 나는 내게 묻겠지

웃을 만큼 행복해진 것 같냐고

아주 먼 훗날 그때 그 아인

꿈꿔왔던 모든 걸 가진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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