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가을밤, 초겨울을 대비하려는지 나무는 어느새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친구랑 오랜만에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지나가버린 추억에 대한 이야기, 서로에 대해 쌓인 생각과 감정 등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헤집고 들어왔다. 생각의 실타래도 풀어낼 겸 괜히 강변으로 돌아간다.
강 건너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걸었다. 생각보다 먼 거리에 괜히 돌아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멍하니 강변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선선한 강바람이 오히려 나의 센치함을 달래주는 것 같아 오히려 외롭지 않다.
횡단보도 앞에 다다른 나는 빨간 불에 멈춰 섰다. 눈의 초점을 바로잡고 주위를 둘러봤다. 횡단보도 건너편에는 한 커플이 팔짱을 낀 채로 애틋하게 서있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거 같은데 그저 서로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짓고만 있다. 옆에서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른쪽을 둘러보니 한 커플이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세상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아, 나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저런 모습이 남부럽지 않았는데..."
다 잊은 줄만 알았던 전 애인이 생각났다. 그녀의 이름을 내 인생에서 완전히 지운 줄 알았는데, 모퉁이 부분은 미처 지우지 못해 흔적이 남아있었나 보다. 머릿속의 지우개를 바꿀 때가 됐나..
생각난 김에 괜히 한 번 카톡을 꺼내 그녀의 프로필을 살폈다. 공항이 보이는 걸 보니 영종도로 여행을 다녀왔다보다. 사진 속의 그녀는 바다 앞에서 이륙하는 비행기를 풍경으로 두 팔을 벌린 채로 서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잘 사나 보네...'
나와 함께 찍은 사진들로 가득 찼던 그녀의 프로필에 더 이상 나는 없다. 다채로웠던 내 프로필도, 이제는 푸른 배경에 하늘색 사람 모형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황량한 내 프로필을 생각하니 갑자기 내 자신이 초라해졌다.
괜한 생각들을 잊으려 폰에서 눈을 뗐다. 강물을 건너편 아파트 단지로 모두 날려버릴 듯한 한숨을 크게 쉬고, 다시 강 건너를 바라보며 걷기 시작한다. 아까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걸으려 했지만 생각들이 나를 괴롭히려 한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더 괴롭다. 누군가 마음의 문을 시끄럽게 두드리는데, 열어서 확인해보면 도망치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는 셈이다.
마음 한 구석이 계속 아파온다. 이건 무슨 감정일까? 그녀와 함께 했던 순간에 대한 미련일까, 그녀가 이별의 우울함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질투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정체모를 마음 한 구석의 시림이 조용히 몰려와 점점 마음의 공간을 채우는 것은 확실하다. 몇 달 전에 헤어질 때 깨끗하게 게워낸 줄 알았는데..
그녀와 함께 했던 여러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하나같이 즐거웠던 기억들 밖에 남아있지 않다. 돌아간다면... 어땠을까? 다시 그 순간을 마주한다면 나는 다르게 행동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오만가지 감정들도 교차한다. 미련, 안도, 후회, 추억, 그리움...
하지만 그냥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다.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뛴다. 술을 먹어서 비틀거리지만, 그래도 앞을 향해 뛰어나간다. 달리다 보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과 감정이 바람에 실려 흩어지겠지.
생각을 더 격렬하게 떨쳐내고 싶어 속도를 점차 높여본다.
그러고는 전속력으로 달려본다. 마치 내가 달리는 속도만큼 그녀와 지금 감정들을 잊는 속도가 빨라지기를 바라면서.
개인적인 감상평
노래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이야기와 풍경을 글로 담아보았다. 쓸쓸함이 느껴지는 멜로디, 애절함을 와닿게 하는 기타, 덤덤하게 내뱉는 가사. 조용한 새벽, 한강 변을 걸으며 지난날에 대한 후회를 곱씹으면서 듣기에 적격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밤 산책할 때 듣기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이기도 하다. 위 이야기도 그런 느낌을가지고 풀어보았다.
개인적으로 넬의 숨겨진 명곡이라고 생각하는 노래이다. 밴드 공연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첫 기타 리프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처음 듣게 된 이후로 아직까지도 꾸준하게 찾아 듣는 노래이다. 마지막에 있는 기타 솔로까지 애절함을 담아낸 듯하여 뭉클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밴드에서 기타를 맡고 있어서 그런지, 이 곡에서 기타로 만들어낸 리프나 솔로, 그리고 멜로디까지 모든 파트가 내게는 최애 파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