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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석 Sep 21. 2021

종이 너머로 느껴보는 일상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_이도우

책을 접하게 된 계기


훈련소 때 진중문고에서 읽을 책을 찾다가 우연하게 집게 된 책이다. 고리타분하지 않으면서 공감이 잘 될만한 소재의 책을 둘러보다가 눈에 들어왔다. 표지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어디서 들어본 듯한 제목이 관심을 끌었다.


특히 '우편물'이라는 단어에 가장 강하게 이끌렸다. 우편물은 애틋하고 정겨운 감정을 지니고 있다. 이동통신이 발달된 현대 사회에서 난무하는 메시지들은 특별한 의미나 감정을 실어 나르고 있지 않다. 빠른만큼 그 알맹이도 무겁지 않다. 마음과 생각을 꾹꾹 담은 우편을 느린 우체통에 실어 보내는 것이 정겨운 이유는 이 때문이다. 누군가의 진심과 정성이 느껴질 뿐만 아니라, 지금은 흔하게 찾아볼 수 없는 옛것에 대한 향수랄까나. 아무튼 그렇게 내 손에 이 책을 쥐게 되었다.


줄거리


책은 라디오 작가로 일하는 공진솔을 비추며 시작한다. 공진솔은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옮기며 그곳의 피디인 이건을 만나게 된다.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은 그의 모습에 공진솔은 경계하지만, 그의 당돌한 모습에 점점 그와의 거리를 좁혀나가며 애정이라는 감정까지 키워나간다. 그러나 이건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옛 친구 애리를 두고 혼란스러워하는 상태였다. 애리는 이건의 단짝 친구인 선우와 오랜 연애를 하고 있지만, 너무나도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선우 때문에 애리는 힘들어한다. 이건은 친구를 자처하며 그녀의 곁을 꾸준히 지키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결단 내리지 못한다. 이런 사랑 관계를 둘러싸고 4명의 인물은 각자의 상황과 감정에 충실하며 자신 앞에 주어진 일상을 살아간다.



특별하지 않은 책의 특별함


 책의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좋게 말하면 전개에 이입하고 인물의 감정에 공감하기 쉬운 이야기이고, 나쁘게 말하면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오히려 특별할 게 없었던 것이 내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책을 읽으면 무언가를 얻으려는 강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책을 편하게 이야기를 접하는 수단이 아닌 특정 지식을 얻는 매체로의 의미가 강해지고 있다. 당장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만 살펴봐도, 자기 계발서와 철학서적, 그리고 경제/정치 서적이 태반을 이루고 있다. 그 속에서 일상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소설은 점점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특히나 한국에서의 생활, 그중에서도 지극히 평범한 직장생활을 배경으로 하는 책을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평범함이라는 희소성 덕에 책이 색다르게 보였다.


이러한 평범함 속에서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소설 속의 이야기를 있는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움이 되었다. 편안하게 소설의 흐름에 의식을 내맡길 수 있다는 것만큼 좋은 책이 또 어디 있을까. 정보가 휘몰아치는 바다와 같은 이야기가 아닌, 잔잔한 시냇물이 흐르는 듯한 이야기에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종이 너머로 느껴보는 일상


일상을 담아낸 책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살지 못했던 또 다른 삶을 겪게 해 준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삶이 있지만, 내가 한 번 나아간 길은 쉽게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내 삶 이외의 삶을 체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책으로 전해지일상은 잠시나마 내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삶으로의 상상을 가능하게 해 준다.


이 책의 경우에는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혹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몰입을 더 쉽게 만들어준다. 특히 주변 환경을 묘사하는 문구들은 현장감을 더해주고, 인물들의 생각은 직접 그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다. 마치 내 이야기처럼, 하지만 내 이야기는 아닌, 그러한 적절한 거리에서 이야기를 관람할 수 있다. 덕분에 한 페이지를 가볍고 재미있게 넘길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이야기가 더 재밌게 느껴졌던 이유에는 아마 "일상"을 상실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상을 박탈당했고, 이 책을 읽을 당시에는 입대로 인해 내겐 사회의 자유 또한 결여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상의 이야기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오랫동안 겪어보지 못한 일상에 대한 그리움 탓일까, 다른 세계의 인물이 살아가는 일상임에도 그 속의 사소한 변화에 감동받게 된다. 그러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런 일상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만든다. 희망찬 미래를 위해 현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현재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남의 일상을 함께 살아가며 일상에 대한 추상적인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나도 한 때 가지고 있던 일상을 떠올려 보게 된다. 내가 중심이 되는 나만의 일상 속에 다시 돌아가, 그때의 사건과 감정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지금까지는 기억의 촉발점이 없어서, 혹은 빈틈없이 빽빽한 생활 속에서 미처 떠올리지 못해서 잊고 있었던 추억을 헤집는다. 그리고 여기로부터 행복한 감정들 - 그것이 비록 미화된 감정일지라도 - 을 꺼내보며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책을 읽고 내게 던진 질문


편하게 읽은 책이라 그런지 감정 이외의 생각이 많지는 않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인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림의 미학에 대한 고민이다.

 

최근 들어, "느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느린 사람'은 내 이상향이다. 말을 하든 행동을 하든, 느리지만 확실하게, 나만의 확고한 신념과 근거를 가지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빠르기 흘러가는 사회에서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하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외부의 속도와 내면의 속도를 달리하다 보면 그 경계에서는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마찰에도 사회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확실한 자아가 있다는 점에서 '느린 사람'이 부러웠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 이점이 확실하다 생각했고, 그래서 더욱더 이루고 싶었다.


책의 등장인물들은 느린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본받을만한 부분들이 많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자신을 챙기는 노력을 잊지 않는다. 때로는 하늘을 바라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내가 어느 세계에 살아가는지 인지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통해 여유를 누리며 스스로의 속도를 재설정한다. 람과의 갈등 속에서 자신만의 템포를 찾고, 인간관계 속에서도 자신과 타인의 속도가 어우러질 수 있도록 맞춰나간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도 속도를 유지해나가는 인물들의 노력은 우리 일상 속에서도 실천할만한 것들이다. 책을 읽으며 인물들에게 경외심이 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고, 책을 덮으며 내 삶에 대한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 것 또한 이 때문이다.



마무리하며


이 책은 너무 편안하고 행복하게 읽어서 책을 잡은 지 하루 만에 다 읽어버렸다. 그만큼 몰입이 잘 되었다. 가끔 이들의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도 있을 정도이었으니...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책이었다. 훈련소나 후반기 교육에서 누군가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항상 이 책을 먼저 꺼내들 정도였다. 편하게 읽어 내려갈 책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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