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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이 Dec 21. 2022

미국의 한국 불승인 입장을 변화시킨 태평양 전쟁과 냉전

대한민국의 국가승인을 주도한 미국

[우수미의 한미 프리즘으로 365 시사 읽기: 1/1 미국대한민국 정부 승인]


1949년 1월 1일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백악관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 국가승인(diplomatic recognition)을 공식 발표했다. 미국은 한국의 국가승인 과정에서 그 어떤 국가보다도 주도적 역할을 한 나라이다. 


국가승인이란 타국에 의해 주권 국가로서의 법률적 권리를 인정받는 것이다. 타국과의 상호관계가 중요한 근대 국제정치에서 국가성(statehood)을 확보하지 못한 미승인국가는 불완전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3․1운동 이후 수립(’19.4.11)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는 타국의 국가승인을 얻지 못했다. 국가성은 선언만으로 확보되지 못했다. 임정의 국가승인 외교 노력이 좌절되면서 국가성을 확보하지 못한 임정의 독립운동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광복 이후 한반도는 국제법상 무주지(no man’s land)로 분류되었고, 미군정은 한국의 정부를 대신해 주권적 권한을 행사했다. 이런 점에서 타국의 국가승인은 국민, 영토, 주권과 함께 국가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광복 이후 한국의 국가승인을 주도했던 미국은 조선이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가장 먼저 공관을 철수시킨 나라였다. 미국의 정책이 한국 무시에서 한국의 국가승인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방향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을사늑약 직후 가장 먼저 공관을 철수시킨 미국


미국의 한국 국가승인 정책은 국제정세의 변화와 이에 따른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와 맥을 함께 한다.


첫째, 미국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05.7.27-31)을 맺고 필리핀을 지배하는 대가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사실상 묵인했다. 밀약 4개월 후 일본은 강압적으로 조선과 을사늑약(’05.11.17)을 체결했고, 미국은 을사늑약 직후 더 이상 조선의 외교적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 T. 루즈벨트 행정부는 조선과 관련된 외교적 사안은 일본과의 교섭을 통해 처리한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다른 국가들에 앞서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05.11.28)했다. 공관 철수는 조선의 국가승인 철회와 국교단절을 의미했다. 이로써 조미수호통상조약(1882.5.22) 체결로 시작된 한미관계는 단절되었다. 


미국은 조선이 최초로 조약을 맺은 서양 국가였다. 19세기 중화 질서에 변화가 시작됐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조선은 중국, 연해주를 병합한 러시아, 메이지유신(1868)을 거쳐 근대국가로 발전한 일본의 각축전 무대가 됐다. 조선은 거중조정(居中調停)을 동맹조약으로 여기며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조선의 안위는 미국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이 힘의 균형을 잡아주는 데서 오는 국익을 추구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중립노선을 유지하면서 사실상은 일본 편을 들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이러한 맥락에서 체결된 것이고, 조선은 강대국 비밀 외교의 희생양이 되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조선은 국제무대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세기 초 임정의 지도자들은 파리강화회의에서의 국가승인 외교가 좌절되고 난 후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우는 미국 윌슨 행정부를 상대로 국가승인 외교를 집중했다. 그러나 미국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됐을 뿐 한국에 대한 불승인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미국의 한국 불승인 입장에 변화를 가져온 태평양 전쟁


둘째, 미국의 견지해온 한국 불승인 입장의 전환점이 된 것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41.12.7)으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태평양 전쟁이다. 본격적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미국 F.D. 루즈벨트 행정부는 1942.2월 전후의 미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 질서의 청사진을 담은 대서양헌장(Atlantic Charter, ’41.8.14)에서 재확인했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아시아가 포함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에 미국의 대일전쟁 선포를 지지하는 서한을 발송했던 임정은 미국의 한국 불승인 원칙을 바꾸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국가승인 외교를 펼쳤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전후 일본의 영토 방침을 공식화한 카이로 선언(’43.11.27)에서 조선의 독립문제가 최초로 결의됐다(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대서양헌장의 식민지 해방 원칙이 한반도에 구체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미국은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임정이 유엔가입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45.4.25-6.26)의 초청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임정이 △합법적 통치체로서 요건이 불충분한 점, △한국 영토에 대한 행정적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한 점, △한국민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 점 등을 지적했다. 임정에 대한 미국의 불승인은 대서양헌장의 정신에 입각한 미국 정부의 일관된 원칙도 있었지만, 당시 미국의 정치적 고려도 한몫했다. 미국이 국익의 관점에서 소련, 영국, 중국과 함께 한국 문제를 처리해 소련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했고,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 후 한국 정부 수립방안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불승인 입장은 광복 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계속됐다.      



소련과의 체제 경쟁 속에 한국의 국가승인을 주도한 미국


셋째, 미국의 한국 승인 정책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은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45.8.14)으로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45.8.16)한 후 냉전이 격화되면서부터이다. 미국은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의 합의로 신탁통치를 거친 후 새롭게 수립되어 유엔 회원국의 지위를 얻은 한국 정부를 승인코자 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정치적 합의를 기다리지 않고 점령 직후 친소 공산정권 수립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한반도 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46.3.20~’47.10.21)는 양국의 견해차로 결렬됐다. 소련과의 합의가 어려워지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다. 유엔총회는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안을 가결(’47.11.14)했다. 그러나 인구 비례에 의한 전국 총선거가 북한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소련은 결의안을 거부했다. 미국은 소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유엔 회원국들을 설득해 남한만의 총선거 결의안을 통과(’48.2.26)시켰다. 


총선거(’48.5.10)를 통해 수립(’48.8.15)된 새 정부의 안정은 미국의 영향력과 위신에 관한 문제가 됐다. 미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 정권과 체제 경쟁 속에서 새 정부에 대한 즉각적인 국가승인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영연방 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를 사실상 승인(de facto recognition)하는 성명을 발표(’48.8.12)하며 미군정의 권한을 이양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유엔을 압박해 한국 정부를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48.12.12)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다음 다른 나라에 앞서 가장 먼저 한국 정부의 법률적 승인(de jure recognition)을 공식적으로 발표(’49.1.1)했다. 이로써 1905년 단절되었던 한미관계가 다시 복원되었다.      



요약하자면, 미국의 한국 승인 정책의 변화는 선의가 아닌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미국의 국익과 정치적 고려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은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전략을 구상해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자 했을 때는 불승인(1905-1941), 대일전쟁을 선포하며 2차 세계대전에 개입했을 때는 정치적 고려(1941-1948), 미소 냉전이 전개됨에 따라 적극적 승인(1948-1949)을 택했다. 


한국의 국가승인 획득 과정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배울 점은 국익의 관점에서 득이 되면 손을 잡는 것이 국제정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한국이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주권 국가로서의 법률적 권리를 인정받는 데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역할이 컸지만, 20세기 초 미국의 배신이 비통했던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여전히 빠르게 변하고 있는 국제정세 속에서 미국의 대외정책도 재조정되고 있다. 우리의 운명을 남의 손에 떠맡기지 않으려면 동맹이라고 하더라도 상대국의 의도를 면밀히 파악하고 판을 짜는데 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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