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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by 우선열


어린 시절 나는 수줍은 아이였다. 언니 뒤에 숨거나 친구들의 뒤편에 서 있는 편이었다

"아이가 순하고 착해요"

나를 데리고 나가면 어머니께서 늘 하던 말씀이다. 그 말씀을 따르느라 나는 좀 더 조신하게 굴어야 했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공기놀이를 하거나 바지를 걷어 올리고 고무줄놀이를 하는 친구들을 먼발치에서 구경만 했다. 친한 친구와 소꿉놀이, 아니면 종이 인형을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니 종이 인형은 언니가 그려준 그림이었다. 우리 언니는 그림을 잘 그렸다. 구불구불한 긴 머리칼의 서양 아이, 예쁘게 머리를 딴 한복 입은 아이, 긴 드레스를 입은 아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리본을 단 아이, 언니의 손끝에서 그려지던 그림들이다. 자랑스레 친구들 앞에 그림을 내놓으면 친구들은 각자 자기가 마음에 드는 인형을 고르곤 했다, 물론 내가 제일 먼저 골랐다. 내가 고른 그림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머리를 짧게 커트한 인형이었다. 긴 드레스를 입은 서양 종이 인형을 제일 먼저 고른 친구가 말했다


" 그 애가 제일 밉지 않아? 이 인형이 공주 인형이야, 무르기 없기" 제가 고른 인형그림을 그 자랑스럽게 흔들며 내인형을 타박하는 친구가 있어도 나는 늘 공주 인형보다는 멜빵바지를 입은 선머슴 같은 여자아이 인형을 고르곤 했다. 얼굴이 큰 민소매 셔츠를 입은 인형을 골랐을 때 손이 빠른 친구가 공주 인형으로 얼른 바꿔주기도 했지만 나는 인형놀이를 할 때 공주 역할이 싫었다. 주근깨투성이의 빨간 머리 앤이 되어 꼼짝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기보다는 그네도 타고, 시소도 타고 흙바닥에 주저앉아 공기놀이도 하고 싶었다.


엄마는 얌전하고 착한 아이라 자랑하셨고 그 칭찬이 좋은 나는 공기놀이 한번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다. 철퍼덕 땅바닥에 주저앉아 본 적이 없다, 쪼그리고 앉아하는 공기놀이가 제대로 될 리 없어서 나는 늘 깍두기였다. 아무도 제 편에 넣어주지 않았고 깍두기로 양편에서 공기알을 쥐지만 금방 놓치고 말았다. 다서 알 한꺼번에 줍기, 꺾기를 넘어 가위바위 보까지 단숨에 올라가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고무줄놀이를 할 때도 친구들은 고무줄 잡는 일도 내게 맡기지 않았다. 그 악스레 까치발을 떼며 두 손을 들어 올려야 하는 일을 나는 할 수가 없었다.


그 무렵 학교에서 어머니 날기념 어머니에 대한 작문 쓰기 대회가 있었고 우리 어머니라는 내 글이 게시판에 올랐다. 초등학교 입학 후 첫 번째 행사였다. 조용하고 뒷전으로 물러나 있던 내게 스포트라이트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매사에 신중하고 친구들의 신망이 두텁다는 선생님 말씀이 뒤따랐다. 어머니의 순하고 착한 아이란 말처럼 마음에 들었다. 내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들끓었고 이때쯤 우리는 인형놀이보다는 연극에 빠져들었다. 몇몇 친구들이 모이면 성냥 팔이 소녀나 백설공주 같은 연극을 하곤 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건만 우리는 자연스레 연극마다 자기 역할을 정하고 연극에 몰입했다. 대여섯 명쯤 앞장서서 친구들을 모아 연극 판을 벌리곤 했다. 주인공이 되고 싶었지만 주인공을 뽑고 연극을 만들어 가는 역할을 번번이 맡아야 했다, 친구들에게 신망이 높은 아이였으므로


우리 어머니에 대한 작문은 어린 시절, 나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준 사건이다. 수줍고 조용하던 아이가 명랑하고 친구들 간에 신망이 두터운 아이로의 변모였다. 조금 우쭐하기는 했지만 흡족하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나보다는 남의 마음에 드는 아이였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옛말 그르지 않다. 일흔이 넘은 지금도 나는 나보다 주변의 눈치를 살핀다. 착한 사람이고 싶다. 착한 사람이 좋기만 할리는 없다. 때로는 억울한 것 같은 생각도 드니. 제대로 착하게 살지도 못하면서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일에 집착한다. 어린 시절 칭찬에 기대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기량을 펼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드는데 어차피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회한은 남는 법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어느덧 나이 70을 훌쩍 넘긴 지금, 이루어 놓은 것 별로 없는 초라한 삶이고 제대로 착하게 산거 같지도 않지만, 부족한 대로 무난하게 살아온 것 같기는 하다. 할 수 있다면 남은 삶도 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 보고 싶다. 다른 건 이번엔 남의 칭찬이 아니라 나의 자의이다. 착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착하게 살려고 노력한 순간들이 좋다. 예쁜 종이 인형을 두고 못난이 인형을 고른 건 뛰어놀고 싶은 것에 대한 대리만족이 아니라 착한 내 심성일 수도 있다.


이젠 가지지 못한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가진 것에 충실하고 싶다. 모든 것을 가진 공주이기보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빨간 머리 앤이 되고 싶다. 어린 시절처럼 엄마나 선생님의 칭찬 때문이 아니다. 세 살 버릇이 이젠 내 모습으로 고착화되어 버려 착한 사람이 좋고 성실한 사람이 좋다. 이제는 남의 눈치가 아니라 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겠다. "이제 와서···'라는 세간의 말에 휘둘리지 않겠다.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글쓰기가 노후 삶에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글쓰기를 통해 나를 성찰해 보는 시간들이 좋다. 세 살 버릇이 내게 준 고마운 선물이다. 여든까지는 지켜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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