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하는 일로는 밥 벌어먹기 힘듭니다"
"그러면 발로 먹고 사나요?"
"머리나 말로 먹고 사세요"
젊은 시절 친구를 따라 방문한 철학관에서 들은 말이다
그 후로도 몇 번 철학원을 들락거렸던 거 같은데 그때마다 들은 다른 말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말만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진다.
기억이라는 게 그리 믿음직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오래되어 젊은 날 어느 하루라는 것 밖에는 왜 갔는지,
누구랑 갔는지, 어디였는지, 그 밖에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는데
손으로 하는 일에 직면할 때면 이 말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사람들이 만든 예쁜 수공예 제품들을 대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곤 지레 포기를 하고 만다
처음부터 무조건 포기를 했던 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일단 시작 먼저 하던 무모한 시절도 있었다.
뜨개질이나 음식 플레이팅 하기, 꽃꽂이, 그림 그리기, 서예, 내방 인테리어 등 신명 나게 시작하였건만
결과는 늘 엉망이었다.
만드는 게 아니라 망치고 마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일단 시작부터 하고 보는 의욕 충만한 시절도 있었다
예쁜 레이스 실로 뜨려던 레이스 뜨개는 쭈글쭈글하고 코가 빠지기도 하고
섬세한 레이스 실보다는 조금 다루기가 쉬울 것같아 시작했던 털실 뜨개도 울퉁불퉁해졌다
주제 파악은 제대로 하는 편이라서 몇 번의 시도 이후로는
"손으로 하는 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 하고 포기하고 만다
서예는 조금 달랐다. 글씨는 인품을 나타낸다지 않은가
누구보다 좋은 인품을 가지고 싶은 열망과 달리 내 글씨는 그야말로 개발새발이었다
심지어 내가 써 놓고도 내가 읽을 수 없는 정도였다
'글씨만큼은 고쳐보자'. 다부진 마음을 먹고 서예를 시작했다
먼저 벼루며 붓, 먹, 화선지 등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화선지를 미리 넉넉하게 사 쟁여 놓으며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다부진 결심을 하였다
먹을 갈고 글씨를 쓰는 순간의 고요가 좋았다
무념무상이랄까 그 순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글씨 쓰는 일에만 몰두 있었다
"서예는 내'체질이야,
흐뭇한 생각이 들어 남보다 더 열심히 써보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면 서툴기 짝이 없었다
글씨 크기는 들쑥날쑥, 모양도 예쁘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쓰는 모습을 본 선생님이
"글 씨에 힘이 있으십니다" 칭찬을 해주었다.
'예쁜 글씨는 아니지만 힘 있는 글씨야, 추사 선생님처럼'
의기양양했지만 선생님을 같이 공부하던 다른 친구들 보다 더 늦게 글씨본을 내려 주시곤 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결심이 단단했던 터라
2~3 년 이상 서예학원을 꾸준히 다니며 동인전에 몇 번 출품도 하였다.
액자에 근사하게 표구를 해 놓아도 "힘 있는 글씨야" 할 뿐 좀체 글씨체가 잡히지 않았다
같이 서예 전시회에 참가했던 친구가 내 펜 글씨를 보고
"펜과 붓은 다른가 보지?"한걸 보면 붓글씨는 그런대로 볼만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글씨를 그리 잘 쓰는 편은 못되었다.
보다 못한 선생님이 글씨보다 사군자 치기를 권했다
그럴듯했다,
매란국죽, 사군자를 치고 있으면 신사임당 못지않은 품위를 갖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들 뜬 마음으로 시작했건만 분명히 선생님은 글씨에 힘이 있다고 했는데
내가 사군자를 그리기만 하면 사군자는 힘없이 축 처졌다
같이 배우기 시작한 친구 그림에 꽃 들은 한 송이씩 살아나는 것 같은데
내 사군자는 힘없이 누워 있는 것만 같았다
의기소침 해 질 무렵 화선지가 복잡하게 널브러지고 여기저기 먹물 흔적이 튄 내 방을 보고
기타 치는 친구가
"넌 왜 이렇게 지저분한 취미니?" 하는 것이다.
내 딴엔 가장 고상한 취미였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지저분한 취미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기타 하나 들고 어떤 모임에서나 주인공이 되는 그녀가 눈부시게 보였다
평소엔 딴따라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었다
1970년대, 그때는 그래도 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그 말 한마디에 지저분한 취미를 걷워 치기로 할 만큼 그 말은 충격적이었다
'무 재주 상팔자'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손으로 하는 일을 잘 못하면 발로하면 되고 머리로 하면 된다
스스로를 위로해 가면서 ···
어느 날, 친구가 영화관에 가서 남자친구에게 손을 잡혔다는 말을 듣고
"발을 잡을 수는 없지 않겠니?"
하는 엉뚱한 위로를 하고 말았다.
그 시절엔 손잡으면 결혼해야 하는 줄 알던 시절이었다.
기타를 치던 친구도 영화관에서 손을 잡힌 친구도 잘 먹고 잘 살고 있건만
손으로 하는 일에 취미가 없는 나는 머리나 발로 먹고살아야 하는데
발도 머리도 그리 시원치 않으니 잘 먹고 사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늦게나마 글을 쓰는 재미를 알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열심히 쓴 글에 누군가의 공감을 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멋진 일이다
손으로 예쁜것을 만들 수는 없지만
글로 누군가에게 감동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내가 만든 나만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