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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성 Jan 14. 2019

관계는 고전적이다

능수능란한 DM 같은 건 결국 얄궂다.

만날 때마다 숲에서 하는 산책 같았다. 야근에 야근을 반복하던 날 어떤 새벽에 20분만 만났을 때, 스트레스가 정수리를 뚫고 터져 나갈 것 같은 날에도 그랬다. 우린 회사 앞에서 만나 편의점에서 마실 거리를 샀다. 그대로 차를 타고 가깝고 한적한 공원으로 갔다. 피곤했던 것도 지쳐있었던 것도 몸보단 마음이었다. 내 마음을 들여다 볼 때마다 어떤 구석부터 심하게 녹슬어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같이 있었던 공원에선 다시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서로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지대가 높은 공원이었다. 그런 높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서늘하고 맑은 공기였다. 둘이 얘기하는 목소리가 촘촘한 안개입자 사이에 머물다 사라지다 했다. 그때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둘만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사이, 그나마 한 동안은 못 봤던 사이였다. 그러다 무심코 닿았다. 전화로 안부를 주고 받았다. 가끔은 이렇게 만나기도 하는 사이가 됐다.


“그렇게 힘들어서 어떡해?”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좀 나아, 넌?”


대화는 소소했고 소재는 일상이었다. 그게 쌓이더니 밀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드물게나마 서로의 건강과 컨디션을 챙기기 시작했다. 멀리서 걱정하거나 안부를 묻는 식이었다. 달이 예쁘게 떴을 땐 가까스로 초점을 잡아 찍은 사진을 주고 받기도 했다. 순간의 마음을 나누는 일이었다. 몸을 챙기고 마음을 나누기 시작하니 관계가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음 계절처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다 어떤 날 밤엔 점점 더 오래, 조금만 더 가까이 있고 싶어지기도 했다. 담백하게 알아왔던 지금까지 그런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아주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딱 한 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몇 잔의 술을 나눌 수 있는 정도의 시간, 그러다 머뭇거렸던 때, 정신없이 반했으면서 숨기려고 애쓰다 결국 안전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헤어졌던 밤. 몇 번을 돌이켜도 좋았지만, 그때의 머뭇거림에는 후회가 짙었다. 에둘러 말하지 않았어야 했다. 솔직하게 움직였어야 했다.


몇 번이나 다시 떠올리면서 모든 대화와 몸짓을 복기해 봤다. 시간에 끼워놓은 책갈피 같은 밤이었다. ‘호로록’ 넘기다 보면 그때였다. 최고로 빨랐던 심박수, 사진처럼 찍혀서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기도 했다. 조금 확장된 것 같은 동공, 어쩐지 부스스하게 일어난 것 같은 머리, 살짝 상기돼서 점점 분홍색이 되어가던 피부색 같은 것들.



관계를 정의하려는 몇 가지 단어들에 이미 신물이 나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썸이니 연애니 연인이니 하는 말들. ‘사귀는 사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영원히 가볍고 모호한 뉘앙스에 지쳐있던 것 같기도 했다. 누구나 한 때는 연인일 수 있잖아? 그렇게 뜨거웠다가 겨울처럼 식어버리는 게 연애잖아? 잿더미가 된 것 같은 심정으로 며칠 앓고 나면 다시 새로워지는 것도, 결국은 그런 마음이잖아? 일상이 사막 같았다.


마음이 점이라면 관계는 선 같았다.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 연필 하나를 같이 쥐는 것 같은 느낌. 둘이서 하는 일이니까, 직선이든 곡선이든 내 마음대로 그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연필은 내 마음 같이 움직일 수 있어도 나 아닌 사람의 마음은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날 밤도 그랬다. 마주 앉아서 그렇게 예쁜 눈이랑 피부를 보고 있는데 이렇게 허무한 생각이 무슨 바위처럼 들어앉아 있었다. 서로의 피부를 느끼다가, 밤이 조금 더 깊어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바위였다. 그러니 머뭇거릴 수밖에, 그렇게 중요했던 인연을 놓치곤 회상하는 수밖에.


그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조금 더 바빠졌다. 저녁과 밤을 같이 보내다가 머뭇거릴 시간조차 사라졌다는 뜻이다. 보고 싶은 순간은 잦아졌지만 볼 수 있는 순간은 귀해졌다. 가끔 만났을 때도 시간에 쫓겼다. 몇 세기였지? 앤드류 마블이라는 영국 시인이 생각났다.


“하지만, 나는 항상 듣는다오 / 바로 나의 등 뒤에서 / 날개 달린 시간의 마차가 황급히 다가오는 소리를 / 그리고 저편 우리 앞에 / 광막한 영겁의 사막이 놓여 있습니다.”


바로 다음 싯구는 이렇게 썼다.


“대리석 무덤 속에선 그대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응큼하지만 우아하고 솔직해서 떠올릴 때마다 웃게 되는 시. 인간이란 결국 시간에 쫓기고, 결국은 늙고, 당신의 아름다움과 내 정열도 시간이 지나면 곧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러니 바로 지금 사랑을 나누자는 유혹의 시였다. 유튜브에는 이 시를 갖가지 방식으로 낭독한 영상이 있다. 때론 우아하고 진지하게, 어떤 사람은 익살스럽고 과장되게.


만날 때마다 이 시 같은 심정이었다. 나는 반갑고 좋아서 강아지 같았는데, 목줄이 점점 짧아져서 가까이는 못 가는 상황 같았다. 그렇게 시간만 흘렀다. 보고 싶을 때마다 ‘날개 달린 시간의 마차’가 뒤에서 뭔가 모조리 휩쓸고 달려오는 소리가 긴박하게 들렸다. 그러는 동안 ‘좋아해요’ 말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단단해졌다.


하지만 그때 놓친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았다. 시간을 돌리려고 억지를 부리면 연필이 부러질 것 같았다. 이럴 때마다 깨닫는다. 언제든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어도 관계는 고전적이다. 때론 살갑게, 가끔은 솔직하고 능란하게 보내는 DM 같은 건 결국 얄궂다. 진짜 중요한 건 둘이 마주 앉은 순간의 마음이었다. 머뭇거릴 여지도 없이 떨리는 결심이었다. 지금은 돌이킬 도리조차 없는, 하지만 몇 번이고 다시 펼치고 싶은 페이지였다.


글, 사진/ 정우성


elle.co.kr에 연재 중인 관계 에세이를 기초로 살짝 퇴고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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