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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성 May 27. 2019

보고 싶어

그 말을 담백하게 들을 수 있었던 아침, 나는 조금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보고 싶다는 문자 받으면 기분이 어때?”


같이 산책 중이었던 후배에게 물었다. 


“그냥 보고 싶은가 보다 해요.”


뭘 그런 걸 다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거의 심드렁했다. 사실 좀 심각한 고민이었는데, 후배가 너무 담담하게 얘기하니까 요동치던 마음도 같이 편평해졌다. 그냥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였다. 그렇게 가만히 몇 분인가 더 걸었다. 이번엔 후배가 물었다. 


“왜요? 선배는 어떤데? 누가 자꾸 보고 싶다고 그래요?”


그 문자가 부담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작지 않은 스트레스였다. 하루를 쪼개고 또 쪼개서 일하던 때, “보고 싶다”는 문자는 “오늘 당장 만나자”는 종용 같았다. 모레 만나기로 했고 어제 같이 있었는데 오늘 또 만나? 진심으로 사랑해도 각자 보내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건강한 관계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혼자 쫓겼다. 하지만 그런 마음에 대해 침착하게 대화할 깜냥은 없었던 시기, 나는 친절하고 싶어서 애만 썼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런 바보가 또 없었다. 나쁜 친절. 관계에 도움이 될 리가 없는 태도였다. 


“혹시, ‘보고 싶다’는 문자 보낼 때 말이야. 어떤 마음으로 보내는 거야?”


결국은 묻게 됐다. 그때 우리는 술을 마시던 중이었나? 커피? 음료는 가물거려도 내용은 정확히 기억한다. 상대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마음인 게 뭐야? 그냥 보고 싶을 때 보고 싶다고 하는 거지, 뭐.”


산책하던 후배보다 더 심드렁했다. 당연한 걸 왜 그렇게 어렵게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역시 잘못된 질문이었을까? 상대가 이어 물었다. 


“그런데 왜 물어요, 그건?”


자초지종을 설명했을 때 상대의 얼굴엔 당황과 황당, 약간의 화가 스쳤다. 그 말이 스트레스가 될 줄 상상도 못 했다는 말, 그럼 안 보고 싶었는데 만나 왔느냐는 오해, 그럼 앞으로 그 말은 하지 않겠다는 투정까지. 어쩌면 여기서부터가 진짜 대화의 시작이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원인은 분명해졌다. “보고 싶다”는 말에는 죄가 없었다. 내 마음이 문제였다. 결국 그즈음의 내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지, 사람이 바빠지면 일상적인 마음조차 투명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까지. 



“그랬구나? 앞으로는 스트레스받지 말아요. 아깝지 않아? 좋은 말인데. 보채려고 하는 말이 아니야. 그냥 보고 싶으니까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때, 숲에서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그토록 편해졌던 마음을 아직도 못 잊는다. 관계는 끝났어도 그 말과 마음은 남았다. 우리는 “보고 싶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하던 사이였다가,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다가, 어쩌면 매일 하는 산책처럼 심드렁했는지도 몰랐다. 어렸으니까, 일상이 섞인다는 말의 무게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권태야말로 소중하다는 걸 알 길이 없었다. 관계는 무게를 잃고 흩어졌다. 섞였던 일상은 분리되기 시작했다. 지루함과 소중함이 같이 사라졌다. 이제 “보고 싶다”는 말은 하고 싶어도 하면 안 되는 사이가 됐다. 노래 가사처럼, 우린 젊었던 걸 몰랐다.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메시지 보관함에서 “보고 싶어”가 사라졌을 때 그 공백을 채운 건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그때 겨우 알았다. 나한테는 시간이 참 많았구나. 우린 참 가까운 사이였구나. 너무 가까워서 그걸 몰랐구나. 하지만 한 번 닫힌 마음을 다시 연 적은 없으니까,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 모든 이별은 의지였다. 지난 모든 사랑이 의지였던 것처럼. 


다행히,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명료해지는 건 있었다. 관계의 상수는 나뿐이니까, 상대가 변해도 나에 대해선 조금 더 알게 됐다. 연애는 내 마음의 원인이 나 자신이라는 걸 가차 없이 깨닫는 과정이었다. 상대가 보채는 게 아니라 내가 쫓기는 거였다. 상대를 탓하기 전에 내 마음을 돌볼 일이었다. 내 마음이 준비가 돼 있어야 상대의 마음도 받을 수 있는 법이었다. 


그 후로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을까? 혹은 몇 개월? 요즘은 “보고 싶어요”라는 문자를 다만 기쁘게 받는다. “언제 한 번 만나요”, “시간 맞춰 봐요”, “요즘도 많이 바쁘세요?” 같은 말도 살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때보다 몇 배는 더 바쁜 날에도 그 정도의 공간은 비워둘 수 있게 됐다. 넓어진 틈에 새살이 돋는 걸 지켜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는 걸까?


 “시원하게 잘 잤어요? 보고 싶어.”
 “나도 :-)”


 보송보송한 마음으로 답했던 아침, 서울의 여름은 벌써부터 뜨거웠다.


글, 사진 /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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