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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아빠라 부르지 못하고

엄마의가출일기


나에게 아빠라는 존재는 여러 의미로 특별하다. 어린시절 대부분의 추억은 아빠와 닿아있다. 나의 모든 여행은 그와 함께 했었고, 사진 속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모습은 모두 그의 작품이 다. 어린시절 그는 나의 가장 친한 단짝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미술 숙제는 함께 만들기 바빴고, 나를 데리고 어린이 모델 활동을 지원해주시느라 바빴다. 대구에서 열리는 패션쇼가 있으면, 열일제쳐두고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들고 나와 함께 했다. 아빠가 옷도 골라줬고 포즈도 가르쳐 줬다. 서울 출장을 다녀 오시는 길에는 항상 두손 가득 남대문에서 산 최신 유행의 옷가지들이 가득했다. 때로는 지방 촌년이 소화하기 힘든 공군 올인원 제복이나 육군 군복을 내 사이즈에 맞게 주문제작해서 가져 오시기도 했다. 


유별스런 아빠 덕에 친구들 사이에서 튀는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패션사랑 덕에 나의 무의식 속에는 ‘패션은 나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었는지, 사범대를 갔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바람을 뿌리치고 호기롭게 의류학과에 진학했다. 그렇게 나는 아빠와 가까웠다. 


아빠와 점점 사이가 멀어진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사춘기가 찾아온 시기이다. 학교에서는 가장 밝은 여중생이었다가, 집에만 가면 입을 꽉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엄마와도 말 섞고 싶지 않았지만 유독 아빠와는 마주치는 것도 싫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나의 일기에서 조금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겉멋이 잔뜩 들어있는 남자라 생각했고, 다른 사람에게는 세상 좋은 사람인데 엄마한테는 다정하지 못한 모습에 같은 여자로서 그가 싫었다. 술에 잔뜩 취해 고주망태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나에게 일장연설을 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남편이 술에 취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술이 쎄던가 아님 취하도록 마시지를 말던가 한다. 그리고 유난히 바짓단이 짧은 그의 바지가 싫었다. 키가 작으셔서 바짓단이 짧았을 뿐인 데,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 키가 작은 아빠가 싫었던 것인지, 허리통은 큰데 바지길이는 짧아 미학적으로 보기가 싫어서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싫은 이유가 황당하고 웃긴데 그냥 싫었다. 


학교 가는 길에 함께 집을 나서는 일이 많았다. 사업이 잘 풀 리셨을 때는 늘 택시를 타고 다니셨는데, IMF 여파로 사업이 힘들어진 이후에는 버스를 타고 다니셨다. 버스정류장은 학교 가는 방향에 있어서 가는 길이 같았는데, 나는 그보다 앞서서 오른쪽으로 걸었고 그는 나의 뒤에서 왼쪽으로 걸어오셨다. 아무런 말씀도 없으신채 그렇게 걸었다. 


그 옛날 손을 꼭 잡고, 하하호호 웃으며 거닐었던 아빠와 딸은 그곳에 없었다. 옛날의 아빠는 내게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기고, 재미있고 든든한 존재였다. 중학생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딸 앞에 있는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못난 남자가 되어 있었다. 아마도 어린 시절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던 두분 사이의 균열이 조금씩 내 레이더에 잡히면서 여자인 나는 그녀의 편이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에게 미안해지기도 한다. 


아빠를 못 본지 언 15년이 다 되어 간다. 마지막으로 본 건 경기도 연천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민속주점을 하던 그였다. 잘 나가는 사장님을 하시던 그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 초라했다. 가게 한 켠에 있는 작은 골방에서 지내시면서 서툰 솜씨로 장사를 하고 계셨다. 초라해보였지만, 얼굴은 좋아보였다. 나는 딸이라는 이유로 늘 엄마의 편에 더 많이 설 수 밖에 없었지만, 어린시절 아빠와 겹겹이 쌓아온 사랑 때문에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컸다. 그래서 부모님이 떨어져 지내기로 했고, 각자의 일이 어려워져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도 두 사람 모두를 이해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아빠가 잘 계신지 확인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홀로 먼 길을 나서서 만나러 가기도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그는 더 이상 딸의 연락을 받지 않았고, 엄마는 그를 원망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증오했다. 그래서 더 이상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스물다섯 취업에 성공하고 연수원에 들어가 있을 때다. 아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취업을 했다 들었다며 잘 지내는지, 한 번 만나보고 싶다 말했다. 너무 오랜만의 전화가 반가운 마음보다는 원망이 더 컸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도와달라 연락했을 때 늘 외면만 하더니, 왜 이제와서 연락이 오나 싶었다. 나는 모질게 말했고, 내가 제일 싫어했던 중학교 2학년 때 아빠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쩌면 나는 아빠로부터 그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내가 기대한 말은 들을 수 없었고 오히려 과거의 아팠던 기억들만 더 생생해졌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의 연락처를 ‘삭제’했다. 


물론 사과는 어렵다.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노래도 있다. 엘튼 존이 목놓아 불렀다. 


“미안하다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말인 것 같아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사과가 뭘까. 도대체 그게 뭐기에 나이가 들수록 어렵게 느껴 지는 걸까. 우린 왜 “미안해”라는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을 승 자가 아닌 패자로 간주하는 걸까.
 - 이기주, 언어의 온도 중에서 -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13년 여름이왔다. 엄마는 암 환자가 되었고 보호자는 달랑 나 하나였다. 스물여덟, 성인이었지만 ‘사망할 수 있습니다’라는 동의서에 사인을 하기에는 어렸고 두렵고 무서웠다. 그 순간 아빠가 생각났다. 그녀의 끔찍한 이 병의 근원일 것 같은 존재이지만, 무섭고 두려운 순간 함께 슬퍼하고 힘을 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어렵게 연락했지만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전화 한통도 없었다. 두 번 다시는 그를 보지 않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힘든 일이 닥치고 나서, 그녀의 이야기만 들어줬지 그의 이야기는 들을 기회가 없었다. 대부분의 아빠들이 그러하겠지만, 아빠는 힘들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내가 미워하는 마음이 조금 덜 했을지는 모르겠다. 서로 솔직한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한 덕에 오해는 쌓이고 관계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내가 조금 가까이 가려 노력한다면, 어쩌면 다시 찢어진 상처를 봉합하고 새 살이 돋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암으로 투병하는 엄마를 단 한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으로, 그를 이해하고 용서할 기회를 날려버렸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기간이 길어지고 점점 결혼을 생각하게 될 때 항상 망설여졌던 이유도 바로 아빠라는 존재때문이었다. 부모님이 증오로 가득차서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연락도 안 하며 살고 있는데 내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불완전한 가족으로는 결혼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보였다. 나이가 차고, 주변 지인들의 결혼식을 갈 때마다 아빠의 손을 잡고 행복한 얼굴로 식장에 들어가는 신부의 모습을 보는 일은 나에게는 꽤 나 아팠다. 


‘차라리 없는 아빠였으면 좋겠다...’ 


이런 나쁜 생각도 수없이 했었다. 아빠 덕분이 아니라, 그 때문에 내가 제대로 된 행복을 못 찾을 것만 같았다. 결혼도 못 할 것 같았고 불완전한 내 가족이 불편했고 계속 신경쓰였다. 


하지만 지금의 남편은 한번도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그건 부모님의 문제지 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편은 이순재 선생님 말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나만 바라보았고 우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아직도 남편이 시댁에 나의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했는지는 모른다. 아픈 상처에 대해서 되묻지 않은 아버님과 형님들 그리고 남편에게 너무 고마웠다. 궁금할법도 한데, 아니 당연히 궁금하실텐데 존중해주신 것 같아서 감사했고 괜시리 눈물도 났었다.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된 나는, 아빠 손이 아닌 아빠의 존재 그 이상의 막내 삼촌 손을 잡고 들어갔다. 조카와 함께 식장에 들어가기 위해 멋진 양복도 직접 사 입으시고, 나의 아빠보다 더 따뜻하게 내 손을 잡고 걸어주셨다. 그 어떤 신부보다 밝고 환한 모습으로 신부입장을 했다. 그날의 사진만 봐도 안다. 열 개의 치아가 다 보일정도로 환한 웃음으로 결혼식을 즐겼다. 양가 부모님에게 인사할 때도 울지 않았다. 엄마는 화장이 다 지워질만큼 많이 우셨지만, 나는 그저 활짝 웃었다. 


사실 삼촌의 손을 잡았을 때부터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울음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내가 울면 그녀가 더 울 것 같았다. 행복한 예식의 순간을 울음바다로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억지로 울음을 삼키고, 마른 입으로 크게 온힘을 다해 웃었다. 식장에 입장하기 전부터, “신부님 너무 많이 울거나 웃으면 사진이 예쁘게 안 나와요.”라고 주의를 받았는데 아랑곳 하지 않고 웃었다. 활짝.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신부이고 싶었다. 아빠의 손을 잡고 들어가지 않는 것을 아는 나의 친구들에게 “나 괜찮아.”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웃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진한 화장과 스프레이 덕지덕지 붙은 머리를 씻어내며 물소리에 내 울음을 흘려 보냈다. 


나에게 아빠라는 단어는 15년여간 낯설었다. 낯설었던 그는 저만치 흘려보내고, 이제 내 아이들의 아빠만 남았다. 나의 딸과 남편은 내가 아빠와 그랬던것처럼 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사춘기가 와도 온갖 시련이 와도 아빠와 딸 사이가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가끔 서로에게 토라져 등돌리고 있을 때는, 내가 너무 속상해 어쩔 줄 몰라해 하며 어떻게든 서로 화해 시키려 애쓴다. 혹여나 이 작은 기억이 어느 날 둘의 사이를 멀어지게 할까봐 조마조마해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몫인데, 내가 신경이 쓰인다. 우리 아빠와 나처럼 될까봐 두려운 것이겠지. 하지만 남편은 나의 아빠와 다른 사람이다. 내 딸도 나와는 다르다. 그들은 둘도 없는 친한 부녀관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기억에서 점점 지워져가는 아빠지만, 가끔 그가 끓여주던 명란젓을 넣은 갈비탕, 국수와 계란을 풀어 넣은 라면이 생각 날 때가 있다. 아빠와 함께 엄마가 해 준 맛있는 집밥을 먹으 며 역시 엄마 음식솜씨는 최고라며 엄지 척을 내밀었던 행복한 순간이 떠오를 때가 있다. 누군가는 부모가 되면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거라 말했다. 부모 4년차, 아직 그 이해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나쁜 기억만 남아있지 않은 걸 보면, 언젠가 이 뒤엉킨 관계도 풀어질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오늘따라 그리워진다, 행복했던 나의 어린시절이. 그 때의 엄마와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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