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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BTS

엄마의가출일기


프라하의 이곳 저곳을 걷다보면 절로 마음의 여유와 평화가 찾아온다. 보통 이런 여유는 휴양지의 썬베드에 누워 쨍쨍한 하늘을 바라볼 때 생기기 마련인데, 거리 곳곳을 거닐면서 그런 여유와 평화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프라하를 더 매력적인 도시로 만든다. 아마도 곳곳에서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들 덕이 클테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클래식 연주부터, 요즘 유행하는 POP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악기로 다채로운 소리를 내며 프라하의 풍경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연주자들의 얼굴은 행복하며 꾸밈이 없다.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나의 입꼬리 마저 올라가고 있지 않은가. 


사실 나는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다. 클래식도 들으면 어디서 들어봤구나 하는 정도지 이 곡이 모짜르트 교향곡 몇번인지, 비발디 사계의 봄인지 여름인지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또 팝송도 좋아하는 몇 곡 이외에는, 그냥 흥얼거리며 들을뿐이지 가사를 다 외우거나 그 가수의 노래만 찾아 듣거나 하지는 않는다. 음악적 취향이 뭐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사람이 없는 카를교가 보고 싶어 아침 7시가 좀 넘어 이 곳에 도착했다. 혼자 멍하니 바닥에 앉아서 유투브 뮤직이 추천해주 는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혼자온 여행자가 말을 걸었다. 미안하지만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지, 굉장히 수줍게 내게 물었다. 환하게 웃으며 ‘물론이지’를 외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각도 저각도, 사람없는 카를교를 전세낸 듯 다양한 구도로 셔터를 눌러내며 나의 작품세계를 펼쳐냈다. 그리고 이때다 싶어 나의 사진도 몇 장 부탁했다. 사진을 다 찍은 후, 그녀는 내게 한국인인지 물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왔고, 한국에서는 3년 정도 공부를 해서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알았다. 그리고 대뜸 내게 BTS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 아닌가! BTS의 국제적 인기를 이곳 프라하에서도 경험하는구나 싶었다. BTS의 노래는 희망이고 사랑이라고 고백했다. 그녀는 아미가 분명했다. 그런 그녀의 고백에 나는 ‘저는 신화창조에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혼자 웃고 말았다. 


맞다. 음악적 취향이 없는 나는 그냥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중생이었다. 그저 신화가 좋아서 앨범을 낼 때마다 테이프가 늘어지게 듣고, CD가 튕길때까지 즐겨들었다. 노래를 외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중간중간 신화창조의 응원구렴까지 공부하듯 외웠다. 신화의 음악적 세계를 이해할리 없고, 그냥 오빠들이 좋았다. 그게 나의 음악이었다. 이 정도면 음악적 취향을 ‘아이돌’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신나는 비트’라고 해야할까. 


그녀의 부끄럽지만 열광적인 BTS 팬 고백에 나의 여중시절이 떠올랐다. 응답하라 1997 속 성시원과 아주 닮아 있었다. 팬클럽 가입을 위해 중간고사 평균을 95점 이상 받아야 했고 기를 쓰고 공부했다. 팬클럽 입회비를 입금하고 받은 입금증은 코팅해서 방 한구석에 붙여 두었고, 택배로 배달된 신화창조 우비와 주황봉은 가보로 대대손손 전할거라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사실 그 가보는 내가 고2가 되면서 사촌동생 유리에게 선심쓰듯 물려주었다. 유리는 카시오페아였는데 왜 그런 말도 안되는 짓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웃긴다. 


사랑하는 에릭 오빠에게 전해줄거라며, 엽서를 에릭 오빠 키만큼 이어붙여 편지를 써서 SM으로 보내기도 했다. 읽어는 봤으려나. 신화 사서함에 전화를 걸어, ‘안녕하세요! 신화입니다!’ 목소리만 오백만번은 더 들은 것 같다. 6월 6일은 신화의 상징 ‘6’이 두번이라 의미있는 날이라며, 경비아저씨한테 혼나 면서 주황색 종이에 오글거려 손발다 없어지는 글귀를 써서 이곳 저곳 붙여댔다. 


뮤직뱅크를 하는 날이면 집에서 우비와 응원봉을 들고 방청했다. 지방 어느 작은 도시에서 그렇게 열정적인 주황공주가 되어 신화를 응원하고 있었다. 온라인 상에서 쓰는 나의 ID는 에릭바라기였고, 메일 주소는 [하나정혁영원히 사랑해]의 의미를 담은 hjlike0024였다. 아 정말 오글거려 못 봐주겠다. 그러고보니 나의 남편 이름 첫자 이니셜이 j이니까, 지금 써도 어색하지 않을 메일계정이다. 


6-7년 전 쯤, 2PM 콘서트를 간 적이 있다. 당시 신화 활동이 뜸할 때였는데, 신화와 느낌이 비슷한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2PM을 좋아하고 있었다. 콘서트 장에서 아이와 함께 온 엄마 들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가방에는 멤버들의 이름이 가득한 이름표를 달고, 최신스타일의 LED 응원봉을 들고 한 손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엄마들의 모습은 미래 어느 날의 내 모습이지 않을까 했다. 


딸이 나의 그때 그 시절만큼 컸을 때, 아이돌을 열렬히 응원하고 사랑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신화창조 출신 엄마인데 아이돌 빠순이 된다고 말리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의리없는 빠순이지. 같이 콘서트 티켓 광클하고, 손잡고 룰루랄라 공연을 즐기러 갈것이다. 그러고보니 요즘 내 주변에 딸아이와 함께 BTS 콘서트를 보러가는 아빠들이 많다. 시대가 많이 바뀌 긴 했나보다. 아빠랑 아이돌 콘서트라니! 


그녀가 찍어준 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수줍게 밝게 말하던 그녀와 BTS가, 그리고 신화창조였던 내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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