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일 레온 도착
오늘도 안녕,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나 비행기에서 내려서 무사히 300km 코스 출발지인 레온까지 도착했어. 스페인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도, 저번엔 바르셀로나로 도착했기도 하고
외국을 많이 가봤어도 이렇게 수도 대도시가 아닌 지방(?)으로 바로 내려온 적은 또 처음인 거 같아
너는 스페인에 와봤으려나, 나중에 돌아가면 물어봐야겠다 저번에 이탈리아 안 가봤다고 가보고 싶다고 했었던 거 같은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마드리드 공항에서 버스터미널까지 찾아가는 미션이 주어졌어. 셔틀버스를 타고 T4(terminal 4)로 가라고 하더라고, 버스터미널 가는거 조차 쉽지 않다니
오랜비행에 내가 예민해진건지 장시간 이동하는 시외버스다 보니 시간 놓치면 큰일 날 거 같아서 정신 바짝 차리고 오느라 비행기에서 내려서 터미널까지 가는데 화장실도 안 들렸다가 겨우겨우 터미널까지 오고 나니 드디어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어
터미널 와서도 안내소에 가서 어디서 타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비행기 내내 씻지도 못했으니 터미널 화장실 세면대에서 에라 모르겠다 세수도 하고 양치도 하고 로션하고 선크림도 발랐어.
순례길에서의 일상생활은 거의 나는 자연인이다 수준이라던데, 나 자연인의 생활을 오늘부터 시작하는건가, 무사히 버스를 타니까 이제야 좀 마음이 놓여
원래 이동수단에서 잘 안 자는 편이기도 하고 까딱 졸면 큰일 날 거 같아서 점점 시골스러워지는 스페인 풍경을 눈에 가득 담았어,
저번에 네가 시골에서는 못 살 거 같다고 얘기 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여튼 그렇게 버스를 4시간이나 타고 벌써 레온에 오니 껌껌하고 비도 주룩주룩 온다.
도착날부터 비가 오다니, 첫 번째 알베르게까지 걸어서 찾아가야 하는데 짐이 잔뜩 든 배낭을 다 뒤집어 휘적여서 우비를 꺼낼 수도 없을 거 같고 그냥 얼른 가방에 커버를 씌우고
다행히 방수 바람막이라 바람막이 모자를 대충 뒤집어쓰고 빗속을 터벅터벅 걸었지 뭐, 구글맵 보느라 손도 시리고 비가 와서 그런가 유독 으슬으슬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씨 때문에 15분 남짓 걸어가는 길이 천릿길 같더라
아홉 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겨우 도착했어. 방은 5명 정도가 쓸 수 있는 알베르게였는데 알베르게는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저렴한 가격에 운영되는 숙소야
이층 침대 몇 개가 놓여있고 공용화장실 정도 갖춰진 굳이 따지자면 낙후된 호스텔같은 그런 느낌이야
이제 열흘 넘게 이런 숙소에서 자야 하니까 오늘부터 적응해야지! 나는 사실 고등학교 내내 이런 척박한 환경의 기숙사 생활을 해서 그런가, 이런 환경이 그다지 낯설진 않아 다행(?)이야
오늘 도착한 레온은 앞으로 걸을 300km 코스에서 몇 안 되는 대도시라, 800km 코스를 걷는 사람들은
레온에서 연박하면서 관광도 하고 쉬기도 한다는데 내가 너무 길게 이동해서 지쳤기도 하고 혼자라 그런가 레온대성당도 그렇고 타파스 맛집도 그렇고 가 볼 엄두가 안 나더라
그래도 밥을 못 먹었으니 뭐라도 먹어야 할 텐데 싶어서 아까 오는 길에 봤던 버거킹에 가서 와퍼세트 하나를 시켰는데, 비도 맞고 내일부터 걸어야 하는 게 너무 막막하고 낯설어서 그런가 나답지 않게 평소 좋아하는 와퍼가 안 먹히는 거야
감자튀김 좀 집어 먹고 와퍼는 한 세입 먹은 거 같은데 더 이상 안 먹히더라고 햄버거를 버리고 갈까 싸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남은 햄버거를 버려 버리고 왔어
그리고 숙소에 들어왔는데 아까 짐 둘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드디어 사람을 만났어!! 왠지 엄마뻘 돼 보이는 동양인 한 명과 서양인 한 명이 룸메이트로
있는 거야 그 순간 갑자기 두 번째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어, 아 드디어 사람이다…! 혼자가 아니다..!
평소였으면 일반적인 여행이였으면 절대 말도 안걸었을텐데, 평소와 다른 심신미약 상태였던 나는 심지어 동양인이길래, 슬쩍 용기내서 혹시 한국인이세요? 했더니 한국인이셨어 (오마이갓 하느님 감사합니다!!)
생존을 위해 내 인생 최대치 친근함을 장착하고 아주머니께 질문공세를 펼쳤어, 언제 도착했는지 언제 출발하는지 등등 오늘 도착하셨고 사실 나를 공항에서도 보셨었대, 대화를 해보니 나랑 같은 비행기 타고 오셨던 분이시더라고!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더니, 아니 이런 우연이!! 갓블레스미!! 그렇게 만난 첫 한국인 혜원 아주머니는 55세셨고 이번 스페인 산티아고 길이 생에 첫 해외여행이신 분이었어.
천주교도 분이셔서 버킷리스트셨고 오래 다니시던 직장을 은퇴하시고 평생을 꿈꾸던 산티아고를 오랫동안 준비하셨대, 딸이 앞으로 있을 산티아고 길의 모든 숙소를 다 예약해서 프린트도 다 해줬더라고,
엄마의 첫 해외 여행을 걱정하고 응원하는 혜원 아주머니 딸의 마음이 나한테까지도 느껴져서 감동이고, 나도 괜스레 엄마 생각도 나고 그랬어, 나중에 나도 엄마가 어디 간다고 하면 해줘야지
두 번째 룸메이트 루씨는 영국인이었는데 스페인 발렌시아에 살고 있었어. 나중에 들어보니 남편이 스페인인이라 스페인에 사는 거더라고, 순례길이 처음도 아니었고 회사원으로 마케팅 직무를 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요가를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했어.
앞으로 돌아가면 회사는 안 다니고 요가 강사가 돼서 요가 클래스를 열거라고 했어. 전 세계 어딜 가나 회사원들은 퇴사를 꿈꾸는구나 싶어서 괜스레 공감 가고 웃음이 났어, 오늘 처음 봤고 국적도 다르지만 루씨의 마음이 너무나도 이해가 간달까 (나도 그런마음도 다분히 섞여 잠깐 순례길로 도망 온 거니까)
루씨에게도 내일 우리랑 같이 걷자고 제안했는데 초행길이 아니어서 더 긴 다른 코스로 걷는대서 아쉽게 같이 가진 못하게 됐어 아쉽지만 인스타 아이디만 교환하고 셋이 사진 한 장을 남겼어 내 첫 까미노 친구들을 만난 역사적인 순간이니까!
그래도 난 혼자 왔지만 운 좋게 첫날부터 혼자 걷지 않을 수 있게 됐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온 건데 막상 비 오는 어두컴컴한 레온 거리를 걷다 보니 내일부터 어쩌지 싶어 와퍼도 하나 못 먹는 영락없는 겁쟁이더라, 모르던 내 모습을 벌써 하나 발견한거 같아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간다고 생각하니 바로 다시
내일부터 걸을 날들이 기대되고 설레더라, 역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걸까 아니면 내가 사람을 유난히 좋아하는 걸까 뭐 아무렴 어때, 기분 좋으니 됐지 뭐
이제 긴장이 풀리고 나니까, 배도 고프고 아까 버리고 온 와퍼가 아른아른거려..버리지 말고 가져올걸
혜원 아주머니와 내일 6시에 함께 출발을 약속하고 드디어 대장정의 출발을 하루 앞두고 침낭 속에 쏙 들어왔어, 이제 푹 자려고
오늘은 하루를 꼬박 다써서 레온까지 이동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국에서의 수 많은 일들이 벌써 어느새 조금 까맣게 잊힌 거 같은 느낌이야
넌 오늘 하루 잘 보냈을까 부디 좋은 하루였길,
그럼 오늘도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