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마드리드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안녕! 나 드디어 마드리드로 출발해
그나저나 비행기 오랜만에 타본다.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몇십 번은 탄 비행기일 텐데 비행기가 이륙할 때 이 설레는 느낌은 여전하네.
아마 너는 갑자기 뭔 말인가 싶기도 하고 그리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어젯밤에 나 잠깐 여행 다녀온다고 말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그래도 3주나 떠나니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는 말처럼 그래도 잠깐 갔다 올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어.
물어보지도 않은 걸 말해놓고는 혼자 안심하는 나를 보면서 도저히 평소의 나라면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이라 진짜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싶었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내 무한한 사랑을 줘보고 싶은 건지도 의문이 들 정도로
스페인에 가서 다리가 부러져라 걷다 보면 뭔지 알게 되려나, 그랬으면 좋겠다.뭐 무슨 마음에서 비롯된 건지 이제는 정확히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너를 좋아하는 건 맞는 거 같아. 지금 이렇게 비행기 타서도 그냥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쓰는 거 보면
어느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세상과 잠깐 단절되는 이 비행기 안이 너무 불편하고 심심하고 답답한데 또 어느 때에는 강제로라도 이렇게 세상과 단절되는
이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들이 되려 좋을 때가 있어
가만히 눈 감고 떠올려보니 여행을 진짜 많이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가만 생각해 보니 이렇게 오롯이 혼자만 떠나는 여행은 또 처음인 거 같아. 혼자 타보는 열두 시간짜리 긴 비행기인 데다가 이 어딘지도 모르는 상공에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느낌이 나쁘지 않은 거 같아.
핸드폰도 안 터지고 낯선 사람들밖에 없는 이 어둑어둑한 비행기 안에서 왠지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거 같은데 알게 모르게 묘한 해방감 같은 것도 있고,다소 낯선 시간을 마주하면서도 이걸 적고 있는거 보면 이 순간에도 네 생각은 났다는 말이기도 해.
스물두 살 때인가, 한창 한국에 막 산티아고 순례길이 알려지고, 다녀온 사람들이 적어서 다녀오면 책을 내던 시절에 (지금은 너무 많이 알려지고, 책도 너무 많아서 희소성이 없어졌지만은)
어쩌다 발견한 산티아고 책들을 읽으면서 언젠가 가봐야지 했던 게 어느덧 십 년이나 지난 일이네, 그랬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산티아고를 드디어 가다니!
스물 두살땐 분명 가기 전에 체력 단련 하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장비부터 준비하려면 족히 6개월은 준비해야 할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서른두 살의 나는 한 이틀 만에 결정해 버리고 쿨하게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까짓것 가보지 뭐 해 버리는 내가 되다니, 십년 동안 제법 용감해지고 과감해진 사람이 된걸까
그렇게 꿈만 꾸던 산티아고 걸으러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나니, 갑자기 문득 내가 왜 걸으려고 할까 생각 해봤어.
친구들이랑 여행 가도, 어쩜 그렇게 뭘 안 사냐고 할 만큼 남들보다 물욕도 없고 뭘 잘 사지 않는 편인데
항상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서는 굳이 굳이 고생은 항상 사서 하는 편인 거 같기도 하고,
어느 덧 인생의 봄을 지나 여름을 맞이해야 하는 때 인거 같기도 해서, 나에게 터닝포인트를 주고 싶기도 했어
이렇듯 내가 산티아고를 걸어보겠다고 결심한 순간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복합돼서 충동적으로 결정했지만은 그 이유 중에 분명히 너도 있는 거 같아.
열흘 넘는 기간 동안 스페인까지 가서 하루 종일 걷고 또 걷고 걷기만 해도, 지금처럼 내가 네 생각을 할까, 이 길을 다 걷고 나서도 지금과 같은 마음일까
아님 그저 반짝이는 마음이었어서, 희미해진 채로 돌아오게 되려나 나도 전혀 모르겠어서 궁금하다
이제 두 시간 후에 마드리드에 도착한다고 안내 방송이 나오네, 방송을 듣고 나니 갑자기 급 내일부터 걸어야 하는 게 걱정이 태산이야.
11월 스페인은 우기라는데, 순례길은 비수기라는데 비가 많이 오면 어떡하나, 길에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걷다가 소떼나 들개를 만나면 어떡하지,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다리가 너무 아파서 돌아가고 싶으면?
길 위에서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고, 재밌게 걷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겠지 등등
그냥 오만가지 막연한 두려움과 막막함도 밀려오지만 그렇지만 늘 그랬듯 나는 또 어떻게든 해내고 오겠지?! 그럴 거야!
이 와중에도 스페인에 가는 김에, 바르셀로나에 들러서 네가 엊그제 말했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가서 사진 찍어 보내주면 네가 좋아할까 싶고
사진 보내 준다는 그 핑계로 한번 더 연락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이 나는 건 비행기에 산소가 부족한 탓으로 할게, 이제 눈 좀 붙여야 하는 시간인가 봐
착륙하기 전까지만이라도 잠깐 눈 감아볼게,
너도 오늘은 부디 잘 자! 좋은 꿈 꾸고